[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⑥] 공정무역을 달성하기 위해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 미일 반도체 분쟁과 전략적 무역 정책 논쟁[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⑥] 공정무역을 달성하기 위해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 미일 반도체 분쟁과 전략적 무역 정책 논쟁

Posted at 2019. 1. 13. 23:26 | Posted in 경제학/국제무역, 경제지리학, 고용


※ 일본의 불공정 무역관행이 기울어진 경기장을 만들었다


지난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시리즈[각주:1]를 통해 누차 살펴봐왔듯이, 1980년대 미국은 대내적으로는 경기침체 · 대외적으로는 세계경제적 지위 감소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시적 환경은 미국 내에서 보호주의 압력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리고 타겟은 '일본' 이었습니다.


'닫혀있는 일본시장(closed Japanese market)'[각주:2]은 미국 기업들의 불만을 자아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낮은 관세율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일본정부의 지도 아래 시행되는 차별적 규제 · 일본기업들 간 폐쇄적 경영 등은 미국기업이 일본시장에 진입하기 어렵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GDP 대비 제조업 상품 수입 비중은 수십년이 지나도록 낮은 수준을 기록한 반면, 미국으로의 수출은 계속 늘려왔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기업들의 불만에 불을 부은 것은 '정부의 보호와 지원에 힘입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성장' 입니다. 


위에 첨부된 1985년 및 1990년 세계 반도체 회사 매출액별 순위를 보시면 NEC · Hitachi · Toshiba 등 일본 기업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반도체 세계시장에서 미국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0% 였던 반면 일본기업은 30% 미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두 국가는 45%씩 동률이 되었고 때때로 일본이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D램 분야에서 일본의 성장이 돋보였습니다. 미국기업 점유율은 1978년 70%에서 1986년 20%로 하락했고, 일본기업은 30%에서 75%로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일본 반도체 기업의 성장에는 일본정부, 특히 통상산업성(MITI, Min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과 재무성(MOF, Ministry of Finance)의 보호와 지원이 있었습니다. 통산성과 재무성은 외국 기업의 일본시장 접근을 차단한 채, 선택받은 일본 기업들에게 금융 · R&D 지원을 대규모로 단행하였습니다. 또한, 외국기업이 기술이전을 하지 않으면 일본시장에 진입할 수 없게끔 막았습니다.


덕분에 일본 기업들은 미국 반도체 기업의 선진기술을 빌려오거나 무단으로 모방할 수 있었고, 대규모 투자를 위험을 줄인채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덤핑을 통해 해외시장에 아주 값싼 가격에 물건을 팔아 점유율을 늘려나갔습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덤핑'(dumping) · '시장 접근'(market access) · '반도체 설계 특허권'(chip design patent) 이슈를 두고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었고, 일본정부로 인해 '기울어진 경기장 위에서 불공정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공정무역'(fair trade)을 강조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 1985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주 :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시리즈 첫번째 글에서 첫번째로 나온 문단) 


"국제적인 무역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이 규칙(rules)을 준수하고 개방된 시장(open market)을 보장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자유무역(free trade)은 말그대로 공정무역(fair trade)이 된다."[각주:3]


"다른 나라의 국내시장이 닫혀있다면(closed) 이는 자유무역이 아니다(it is no longer free trade). 다른 나라 정부가 자국의 제조업 및 농업에게 보조금(subsidies)을 준다면 이는 자유무역이 아니다. 다른 나라 정부가 우리 상품을 베끼도록 놔둔다면(copying) 이는 우리의 미래를 뺏는 것이고 자유무역이 아니다. 다른 나라 정부가 국제법을 위반하고(violate international laws) 그들의 수출업자를 지원한다면 경기장은 평등하지 않은 셈(the playing field is no longer level)이 되며 이는 자유무역이 아니다. 다른 나라 정부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산업 보조금을 집행하여 경쟁국에게 불공정한 부담을 안긴다면(placing an unfair burden) 이는 자유무역이 아니다."[각주:4]


"우리는 GATT 체제와 국내법 하에서 국제통상에 관련한 우리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다른 국가들이 우리와 맺은 무역협정과 의무를 준수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만약 무역이 모두에게 불공정하다면, 자유무역은 이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국의 불공정한 무역관행(unfair trading practices)으로 인해 우리의 기업인들이 실패(fail)하는 것을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서(do not play by the rules) 우리의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마는 사태(lose jobs)를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각주:5]


- Douglas Iriwn, 2017Clashing Over Commerce: A History of US Trade Policy, 606쪽 재인용


이제 1980년대 미국 무역정책 목표는 '평평한 경기장'(level playing field)을 만들어서 국가 간에 '공정한 무역'(fair trade)을 하는 것이 되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 중 하나가 '전략적 무역 정책'(Strategic Trade Policy) 입니다. 


  • 왼쪽 : 1980년대, 전략적 무역 정책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로라 D. 타이슨 

  • 오른쪽 : 전략적 무역 정책 이론을 만들었으나, 현실 속 적용은 반대했던 폴 크루그먼


로라 D. 타이슨(Laura D. Tyson)은 자유무역 체제의 한계를 강하게 비판하고 전략적 무역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하면서, 1980년대 미국 내 무역논쟁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녀는 반도체 · 전자 · 의약 등 고부가가치 최첨단산업(High Value-added, High-Tech)은 다른 산업보다 경제 전체에 더 이로움을 주기 때문에, 미국정부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전략적 무역 정책 이론을 만들어낸[각주:6]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정작 현실 속 적용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산업정책 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기준은 형편없으며 비생산적인 정책을 낳을 것이다. 경제이론상 정교한 기준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론적모형이 실제 정책처방으로 적절한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라며 산업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이제 이번글을 통해, 1980년대 미국-일본 간에 벌어진 '반도체 무역분쟁'을 살펴보면서 당시에 발생한 국제무역논쟁을 더 자세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 1970년대 말, 보호 · 통제 · 미국기술 모방으로 급성장한 일본 반도체 산업


1960-8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기관은 통상산업성(MITI)과 재무성(MOF) 입니다. 이들 기관은 기업들에게 자원을 인위적으로 할당하고 경영방향도 제시하는 '지도'(administrative guidance)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통산성(MITI)과 재무성(MOF)의 역할은 '일본 반도체 산업 발전과정'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1970년대 말부터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 반도체 산업 뒷면에는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통산성은 초고밀도 집적회로(VLSI) 연구개발을 위해 Fujitsu, Hitachi, Mitsubishi, NEC, Toshiba 등 선택받은 일본기업들에게 1976-79년동안 약 2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통산성은 '외국기업의 시장접근 통제'와 '일본기업간 공동 R&D 지원' 정책을 통해 선진 미국 기술을 일본으로 옮겨왔고 일본 기업간 불필요한 경쟁을 억제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반도체산업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 통제된 접근 (Controlled Access)


통산성과 재무성은 일종의 '도어맨'(doorman) 역할을 하였습니다. 외국기업이 일본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재무성은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규제했고, 통산성은 특허 · 라이센스 형태의 기술수입(technology imports)을 통제했습니다. 


즉, 통산성은 외국기업의 시장진입 조건으로 '기술이전'(transfer of technology)을 강요했는데,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의 사례가 이를 보여줍니다.


1968년 TI는 일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SONY와 합작투자 협약을 맺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100% 지분을 가진 자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었으나 일본정부가 허가하지 않아서 합작투자로 선회한 겁니다.  


이과정에서도 반도체 부품 중 핵심기능을 맡는 집적회로(IC) 설계 특허를 일본기업에게 라이센스 해주느냐를 놓고 줄다리기가 오고갔습니다. 일본정부는 TI가 가진 특허권 효력을 일시정지 시키면서 협상에 응하기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협상의 결론은 'TI와 SONY의 5:5 합작투자 및 TI의 일본시장내 점유율 최대 10%로 제한'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보러스(Michael Borrus) · 제임스 밀스타인(James Millstein) · 존 지즈먼(John Zysman) 등은 <미국-일본 간 반도체 산업 경쟁>(<U.S.-Japanese Competition in the Semiconductor Industry>)을 통해, "TI의 사례가 보여주는 기술확산 및 제한된 시장접근 전략은 일본기업이 미국의 기술수준을 모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각주:7]고 말합니다.


▶ 일본 기업간 R&D 협력 (Collaborative R&D)


일본 통산성은 이렇게 들여온 미국 선진기술을 사용하는 방식마저 통제하였습니다. 정부는 일본기업들 간에 범용기술이 확산되도록 독려하였고, 특정 상품에만 사용되는 기술은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지원을 꺼렸습니다.


그리고 일본 기업간 (쓸데없는) 경쟁이 초래할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통제하였고, 기업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 보호와 통제 그리고 미국으로부터의 기술이전으로 급성장한 일본 반도체 산업


1980년대가 되자 미국 반도체 기업의 일본시장 접근이 겉보기에는 보다 쉬워졌습니다. 미국산 반도체 상품 관세가 지속적으로 인하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시장은 여전히 폐쇄성을 띄고 있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다른 전자상품도 생산했기 때문에 반도체 구매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산 반도체의 구매량과 종류를 통제하였고, 케이레츠(keiretsu)를 구성하고 있는 계열회사에게도 이를 강제했습니다. 


이런 보호 속에서 일본정부의 R&D 투자 금융지원은 확대되었고, 미국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수준을 재빠르게 끌어올렸습니다. 그 결과, 1984년 세계 RAM 생산에서 일본 기업들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제품 종류별로 60~90%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반도체 산업 발전은 '정부가 비교우위를 창출'(Creating Advantage)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글 '생산의 학습효과가 작동하는 비교우위'[각주:8]를 통해 일본 경제발전의 이론적 함의를 배웠습니다. 폴 크루그먼은 1987년 논문 <The Narrow Moving Band, The Dutch Disease, and The Competitive Consequences of Mrs.Thatcher - Notes on Trade in the Presence of Dynamic Scale Economies>를 통해, 과거부터 많은 양을 생산하여 지식을 많이 축적한 기업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기업이 자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생산에 착수하고 관세라는 보호막에 힘입어 자국 내에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면, 이러한 보호 기간 중에 쌓은 지식과 노하우로 언젠가는 상대적 생산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보호가 비교우위를 영구히 바꿔놓은 겁니다.


크루그먼은 일본정부의 산업정책을 사례로 논문을 썼던 것이고, 제목 중 'The Narrow Moving Band'는 한 산업을 발전시킨 뒤에 다른 산업으로 정책이 옮겨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1981년, 정치적행동을 시작한 미국 반도체 산업 협회(SIA)


이렇게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성장한 일본 반도체 업계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시장을 점유해감에 따라, 미국 반도체 업계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고 정치적행동을 개시합니다. 이들은 1977년 반도체산업협회(SIA, 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를 창립합니다.


SIA가 미국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국기업 보호와 지원. 둘째는 일본의 불공정 무역관행 시정 입니다.


SIA는 반도체 칩 설계 특허권 보호, R&D 세제지원 등을 미국 정부에 요구하였고, 덤핑(dumping)과 시장접근(market access) 등 일본의 불공적 무역을 정치적으로 이슈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이목을 끌기 위하여 '공정무역'(fair trade) · '평평한 경기장 만들기'(level playing field)를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는데, 이 단어들은 1980년대 미국-일본 간 무역분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미국정부는 우리 기업을 보호하고 지원하라!



당시 미일 반도체 분쟁은 메모리칩을 중심으로 발생했습니다. 1985년 기준 전체 반도체 상품 중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18%였고, 특히 DRAM 하나가 7%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특징은, ①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R&D 고정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며(large fixed costs), ② 제품 출시 사이클이 매우 짧으며(rapid product cycles) ③ 기업들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메모리 반도체 세대 전환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점(unprepared transition) 입니다. 


① 앞서 말했듯이, 일본정부는 초고밀도 집적회로(VLSI) 개발에 4년간 2억달러를 투자했으며, 전체 반도체 산업에 들어간 직접적 · 비집적적 금융지원은 1976-82년간 약 5억~2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②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DRAM 메모리는 짧은 주기로 고성능 상품이 출시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 1K 램이 등장한 이래 1973년 4K, 1976년 16K, 1979년 64K, 1982년 256K, 1985년 1M, 1989년 4M, 1991년 16M 램이 개발되었죠. 


③ 이때 제품의 상용화는 개발이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생산비용이 이전세대에 인접한 수준으로 떨어졌을 때 이루어지는데, 기업은 이 시점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976년 개발된 16K 상품은 생산비용이 4K와 유사한 수준까지 하락한 1978년이 되어서야 상용화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반도체 업계 R&D 투자는 본질적으로 위험성이 높다'는 점을 드러내줍니다.


본 블로그의 다른글 '창조적파괴를 통한 경제성장 모형'[각주:9]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성공한 기업이 누리고 있는 독점이윤은 오직 다음 혁신이 발생할 때까지만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혁신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은 혁신에 성공했을 때 기쁨을 누리는 기간이 짧아짐을 의미합니다.


즉, ① 대규모 R&D 투자를 단행해야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는데 ② 짧은 제품 출시주기는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기간도 짧게 만들며 ③ 정확히 언제 수익을 실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현재 상품이 구세대로 전락할지 정확한 예측은 힘듭니다. 


여기서 미국기업이 가진 불만은 "일본기업은 정부의 보호 아래 투자위험성을 줄이고 있는데, 미국정부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고있냐"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공동 R&D 투자를 통해 위험을 줄이고 싶었는데 反독점법은 이를 규제하고 있었으며, 미국정부는 일본기업의 특허권 침해도 수수방관 하고 있었습니다.


SIA가 반도체 칩 설계 특허권 보호, R&D 세제지원 등을 미국 정부에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미국정부는 일본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시정하게끔 압박하라!



SIA가 더욱 중점을 둔 것은 '일본의 불공적 무역관행 시정' 이었습니다. 아무리 미국정부가 기업들을 도운다 하더라도, 일본기업의 덤핑과 일본시장 접근 제한이 계속된다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반도체 업계의 불만은 반도체 산업 침체기에 더욱 높아졌는데, 특히 1981년 DRAM 가격 하락으로 인한 침체가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일본기업의 덤핑 → 가격 하락 → 치킨 게임 → 미국 반도체 기업 침체 및 퇴출'이 발생하면서, 미국 기업들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 시기 상무부 부차관보을 역임했던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Clyde V. Prestowitz)는 다음과 같이 회고 합니다. "시작은 1981년 가을이었다. 미국 반도체 업계를 대변하는 사람이 워싱턴에 빈번하게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일본 덤핑의 종료 · 일본이 미국에서 물건을 파는 것과 동일한 기회를 일본시장에서 갖기 · 반도체 설계 특허 침해 방지 등을 요구하였다."[각주:10]




※ 최첨단산업의 중요성 및 전략적 무역 정책의 필요성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왜 유독 '반도체 산업'을 둘러싸고 미국-일본 간 무역분쟁이 크게 벌어진 것일까요? 물론 당시 전자 · 자동차 · 철강 · 섬유의복 등등 다양한 산업들도 일본 및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따른 경쟁심화에 불만을 가졌으나, 대중들의 주목을 유독 끈 것은 반도체 였습니다.


미국 대중들은 반도체 산업을 '최첨단산업'(High-Tech Industry)으로 인식하였고, 일본기업에게 최첨단산업 주도권을 내준다면 미국의 미래도 빼앗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 로라 D. 타이슨과 그의 1984년 저서 『누가 누구를 때리는가? - 최첨단 산업 내 무역분쟁』


최첨단산업의 중요성 · 국가경쟁력 상실 · 정부개입의 필요성 등의 인식이 확산되게끔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로라 D. 타이슨(Laura D. Tyson) 입니다. 그녀는 1984년 『누가 누구를 때리는가? - 최첨단 산업 내 무역분쟁』(『Who's Bashing Whom? - Trade Conflict in High-Technology Industries』)과 여러 논문·보고서를 통해, '일본정부의 불공정 무역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미국 최첨단 산업의 현실'을 묘사했고, '미국정부가 전략적 무역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녀가 왜 이러한 주장을 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합시다.


▶ 반도체 · 컴퓨터 등 최첨단 산업이 다른 산업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이유


타이슨은 반도체 · 컴퓨터 등의 '최첨단산업'(high-tech)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미국정부가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최첨단산업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이 전체 경제에 이로움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성격은 '초과이윤'(excess profits) 및 '고부가가치'(high value-added) 입니다. 반도체 등 최첨단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고정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진입장벽이 존재합니다. 만약 진입을 한다고해도 고정비용을 회수할만큼의 이윤을 거두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됩니다. 결국 이미 자리를 잡은 한 개 혹은 소수의 기업만이 시장에 존재하여 양(+)의 이윤을 누리게 됩니다.


두번째 성격은 'R&D 활동의 파급영향'(spillovers from R&D activities) 입니다. 반도체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R&D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기술 및 축적된 신지식이 다른 산업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지식의 외부성[각주:11] · R&D 그 자체의 중요성[각주:12] 등을 강조한 신성장이론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도 최첨단산업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세번째 성격은 '연계가 가져다주는 외부성'(Linkage Externality) 입니다. CPU와 RAM 등 반도체 부품은 여러 제품에 투입요소(input)로 들어갑니다. 이때, 반도체 산업은 기술이 발전하고 경험이 축적될수록 생산성이 향상되어 비용이 감소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 발전은 다른 제품 생산비용을 감소시키는 긍정적 영향을 가져다줍니다.    


▶ 전략적 무역 정책을 통해 미국 기업을 보호·지원 해야하는 이유


이렇게 가치 있는 최첨단산업을 보호하고 키우기 위해서 자유무역 원리에 위배되는 무역정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특정 산업이 가치가 있다는 것과 보호무역 정책을 써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최첨단 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생산자 간 전략적 고려가 행해지는 과점시장'(strategic behavior in oligopoly market) 이라는 점 입니다. 


'전략적 무역 정책'을 소개한 지난글[각주:13]에서 이야기 했듯이, 과점 생산자는 '다른 생산자의 선택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리는 전략적 행위를 합니다. 이로인해 상대방 이윤이 늘어날 때 자신의 이윤은 감소하는 '전략적 대체관계'가 나타납니다. 이는 정부의 개입으로 초과이윤을 만들어내는 산업에서 외국기업을 희생시켜 자국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increase a country's share of rent in a way that raises national income at other countries' expense)는 함의를 안겨다 줍니다. 


로라 D. 타이슨은 "미국 최첨단기업의 세계시장 속 경쟁 지위가 약화됨에 따라, 보호와 지원을 바라는 요구가 증대되었다"[각주:14]고 말합니다. 그리고 "최첨단산업의 특별한 특징-규모의 경제와 가파른 학습곡선-을 고려하면, 기업의 전략적 무역 접근 요구가 증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외국시장 접근 여부와 외국 기업 및 정부의 행위는 국내 기업의 수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은 개방되어 있고 외국 시장은 닫혀있다면, 외국 경쟁자는 자국내 생산량 증대 덕분에 효율성과 생산의 학습효과을 누리게 되는 반면, 국내 경쟁자는 쪼그라든다."[각주:15]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개입하여 외국 기업의 초과이윤을 국내 기업으로 이전시키는 '전략적 무역 정책'(Strategic Trade Policy)의 필요성이 부각됩니다.


타이슨이 생각하는 전략적 무역 정책은 ① '국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규칙'을 정립하고(internationally accepted rules of the game for competition), 이를 외국에게 강제하고 압박하기 위하여 ② 달성해야할 부문별 성과를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specifying sectoral outcomes) 입니다.


이전글에서 살펴본 루디 돈부쉬[각주:16]가 "일본의 미국산 제조업 상품 수입 증가율은 다음 10년간 연간 15%씩 증가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규칙 보다는 결과'(Results rather than Rules)를 말한 것과 타이슨의 주장은 약간 다릅니다. 돈부쉬는 경제 전체 혹은 대분류 산업을 타겟으로 결과를 달성하기를 원했다면, 타이슨은 구체적인 산업을 타겟으로 규칙을 먼저 정립하는 방식을 선호하였습니다. 결과를 추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외국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 현행 GATT 체제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타이슨은 당시 국제무역 체계였던 GATT 하에서는 전략적 무역 정책이 추진될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약 120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 GATT 시스템상 빠르게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GATT는 관세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보조금 · 덤핑 등 비관세장벽(non-tariff barriers)이나 지적재산권 침해로 인한 피해(intellectual property)를 규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타이슨은 반도체 부문을 대상으로 미국-일본 간 양자협상(bilateral agreement)을 통해 공정한 규칙을 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 이것은  '공정한 게임'(fair play)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무조건적인 보호무역정책(unconditional protectionism)보다 전략적 무역 접근(strategic trade approach)이 미국정부에게 우호적일 수 있다고 바라봤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전략적 무역 정책은 일본에게 '공정한 게임'(fair play)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보호주의가 아니라 불공정 무역관행을 시정하여 평평한 경기장을 만드는 것(level playing field) 입니다. 


둘째, 협정을 통한 규칙 제정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많은 외국정부들이 최첨단산업이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중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국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국가간 협정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 정부가 해야할 선택은 자유화와 개입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


로라 D. 타이슨은 경제학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였으나, 국제무역이론이 상정하는 세계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녀는 "현실 속 국제무역 세계는 자유무역 세계가 아니며,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무역을 관리한다(manage)"[각주:17]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무역론자들이 만든 GATT의 규제 또한 정부간 협상의 결과물 입니다.


그녀는 "일반론인 자유무역 이론을 현실에서 말해서는 안되며(no general theoretical principles), 정책결정권자가 해야하는 선택은 순수한 자유무역 vs 순수한 보호무역이 아니라, 자유화와 개입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이다(choices about the appropriate combination of liberalization and government intervention). 이것이 국민후생을 증대시키고 더 개방된 국제무역 시스템을 지속하게끔 만든다."[각주:18]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다른 선진 산업국가와 최첨단산업 규칙(rules)을 둘러싼 관리무역협정(managed trade agreement)을 맺는 것이 현명하며, 이를 통해 '특정 산업에서 협력과 표준을 달성할 수 있다'[각주:19]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 1986년, 미국-일본 반도체 협정 체결 


1980년대 초중반은 이처럼 미국 내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는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고, 반도체 업계의 요구에 회의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처마다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기업계와 노동계를 대표하는 상무부와 노동부는 일본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시정하기를 원했으나, 냉전기 동맹 · 안보를 중요시했던 국무부 등은 동맹국인 일본을 압박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85년 이었습니다. 


반도체 업계는 가격 하락으로 인한 또 다른 불황이 시작을 겪게 되었고 특히 메모리 칩 시장에 집중되었습니다. 반도체 판매는 20% 감소했고 DRAM은 60%나 줄었습니다. SIA는 다시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였고, 1985년 6월 14일 일본 반도체 기업을 '1974년 통상법 제301조' 위배혐의로 미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합니다. 


'1974년 통상법 제301조'(Section 301 of the Trade Act of 1974)란 'unreasonable, unjustifiable, discriminatory'한 외국의 무역행위를 USTR이 조사한 이후 대통령의 제재조치가 실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국 법안입니다. 1984년, unreasonable 정의에 '공정하고 동등한 시장 기회를 부정하는 어떠한 법안, 정책, 관행'(any act, policy, or practice which denies fair and equitable market opportunities)을 추가함으로써, 일본의 불공정 무역행위에 일방적 보복을 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재선에 성공하고 1985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 2기는 이전과 달리 일본의 불공정 행위를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달러가치는 최고수준을 기록하며 무역적자가 계속 심화된 경제 환경도 정책방향을 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1985년 9월, 레이건 대통령의 'fair trade' 연설이 나오게 되었고,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일본 반도체 업계의 행태를 크게 문제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86년 초, 미국 반도체산업 협회(SIA) · 무역대표부(USTR)와 일본 전자산업 협회(EIAJ) · 통상산업성(MITI) 간 시장진입(market access) · 덤핑(dumping)을 주제로 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EIAJ는 301조 보복을 종료시키고, 시장접근과 덤핑 이슈에 대해 구체적인 보장을 하지 않은채 협상을 끝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SIA는 덤핑을 확실히 방지하고, 실제적인 시장접근('real' market access) 보장을 얻어내지 않는 한 협상을 마무리 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일본에서 판매할 기회를 얻는 게 아니라 실제 판매의 증가(actual realization of sales)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1986년 미국-일본 반도체 협정'(1986 U.S.-Japan Semiconductor Trade Agreement)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협정과정에서 '향후 5년내 일본시장에서 외국산 반도체 상품 점유율 20%를 기록한다'는 구체적인 성과를 강요하는 내용이 다루어졌고, 1991년 반도체 협정 개정에서 공식적으로 문구가 삽입되었습니다. 




※ 전략적 무역 정책을 둘러싼 비판, 경제학자들의 노파심 때문일까?


1980년대 자유무역에서 전략적 무역으로의 미국 무역정책 전환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낳았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에게 공정한 게임을 요구했고, 반도체 협정을 통해 성과를 이루어냈으니 된 거 아니냐?" 라고 하기에는 더 생각해봐야 할 논점들이 존재했습니다.


  • 전략적 무역 정책을 이론화 하였으나 실제 적용에는 회의적이었던 폴 크루그먼

  • 1983년 잭슨홀미팅에서 '산업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다

  • 크루그먼의 발표 보고서 <Targeted Industrial Policies: Theory and Evidence>


결국 전략적 무역 정책의 현실 적용을 둘러싸고 경제학자들 간에 논쟁이 거세게 붙게 됩니다. 1983년 <산업변화와 공공정책>(<Industrial Change and Public Policy>)을 주제로 한 잭슨홀미팅이 논쟁이 벌어진 장소였습니다. 


폴 크루그먼은 <Targeted Industrial Policies: Theory and Evidence>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며 주목을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신무역이론[각주:20]생산의 학습효과[각주:21] · 전략적 무역 정책[각주:22] 이론화를 이끌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크루그먼은 "향후 10년간 산업을 targeting 하는 정책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산업이 targeted 되어야 하는가? 결국 중심 이슈는 선택의 기준(criteria for selection)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크루그먼은 "산업정책 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기준은 형편없으며 비생산적인 정책을 낳을 것이다. 경제이론상 정교한 기준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론적모형이 실제 정책처방으로 적절한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각주:23]라며 산업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전략적 무역 이론의 개발자가 왜 실제 정책 처방에 회의적인지, 그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이해해 봅시다.


▶ 대중적인 기준(Popular Criteria)이 가진 문제점


로라 D. 타이슨은 최첨단산업을 타겟으로 한 산업·무역정책이 실시되어야 하는 근거로 고부가가치 · 연계가 가져다주는 외부성 · 미래 경쟁력 등을 들었는데, 크루그먼은 이러한 기준들이 다 타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① 1인당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 (High value-added worker)


: '고부가가치 산업'을 선택하여 육성하자는 주장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고부가가치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 비중이 높아질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크루그먼은 "왜 산업별로 근로자 1인당 부가가치가 다르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특정 산업이 1인당 부가가치가 높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본이 많이 투입되었을 뿐이라는 게 크루그먼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들 산업의 자본/노동 비율은 매우 높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한다면 주어진 투자 수준에서 더 적은 사람이 고용될 것이고 실업률은 올라갑니다. 또한, 한계생산체감에 의해서 경제성장률은 점점 떨어집니다. 결국 고부가가치 부문 투자를 독려하는 산업정책은 실업률 상승과 느린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 크루그먼의 주장입니다.


② 연계된 외부성을 가져오는 산업 (Linkage)


: 앞서 타이슨은 반도체 등은 다른 산업의 투입요소(input)로 쓰이기 때문에, 이들 산업이 발전하면 타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다른 학자들 또한, 일본의 경제발전 성공요인을 철강 · 전자 · 반도체 등 투입요소의 성격을 지닌 산업을 육성했다는 점에서 찾곤 했습니다.


그러나 크루그먼은 "시장을 왜곡시키는 요인이 없다면, 시장은 알아서 연계산업에 필요한 적절한 양의 투자를 집행했을 것"[각주:24]이라고 말하며, 시장원리를 강조합니다. 물론, 연계산업 진흥을 방해하는 시장실패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산업의 투입요소로 작용한다는 기준만으로 산업정책을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합니다[각주:25]


③ 미래 경쟁력 (Future Competitiveness)


: 반도체와 같은 최첨단산업은 말그대로 최첨단이기 때문에, 미래 경쟁력을 위해 육성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궁극적 경쟁력은 산업정책 대상을 선정할 때 유용한 기준이 아니다. 이 산업이 경쟁력을 가지게 될지 아닐지 알더라도, 이것은 그 산업이 보호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각주:26]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유치산업보호론 논쟁[각주:27]을 통해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유치산업 정책은 '특정한 경우'에만 타당하며, 특정한 경우란 외부성 등 시장실패가 존재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단순히 잠재적 성장 가능성 등만으로 산업정책을 시행해서는 안된다는 게 크루그먼의 주장입니다.


▶ 더 정교한 기준(More Sophisticated Criteria)이 가진 문제점


전략적 무역 정책은 '규모의 경제 · 외부성 · 과점 등 불완전경쟁'을 기반[각주:28]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완전경쟁 시장구조는 자유무역 정책이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통찰은 제공하였지만, 항상 전략적 무역 정책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지난글에서 짚었듯이, 꾸르노 모형 · 스타겔버그 모형 등등을 사용하여 전략적 무역 정책의 논리를 그럴싸하게 설명 하였으나, 정부는 개별 기업의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혹시 어떤 행위를 선택할지는 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어느 정도의 보조금을 지원해야 외국기업의 행동을 자국기업에게 유리하게 변경시킬지는 알지 못합니다. 


즉, 전략적 무역 정책은 모형의 파라미터 값의 변화나 기본 전제가 변하면 결론도 크게 달라지며, 크루그먼은 이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 보호주의 정책이 자유무역 정책을 대체할 가능성에 노파심을 갖는 경제학자들 

 

전략적 무역 정책을 만든 경제학자가 현실 속 실행을 반대한다는 건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에게 이는 매우 자연스럽고 권장할만한 행위 입니다. 왜냐하면 경제학 이론과 학자들의 주장은 '특정한 조건이 주어져있을때'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것을 고려치않고 남용할 경우 해로운 결과를 사회에 안겨다준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레이건 행정부 시기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을 역임한 마틴 펠드스타인은 "감세로 인한 재정적자가 무역적자의 원인이다."[각주:29]라고 말하며 정부의 감세정책을 비판했으나, 레이건 정부 인사들이 감세정책을 고안해낸 건 그의 연구 덕분이었습니다. 펠드스타인은 "조세가 경제주체의 행위를 왜곡시킨다"는 논문을 출판했었는데, 보수 정치인들은 이를 "그러므로 세금을 없애야한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펠드스타인이 의도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정책입니다. 


전략적 무역 정책을 만든 폴 크루그먼 · 제임스 브랜더 · 바바라 스펜서도 이 점을 우려하여 논문 말미에 "이건 이론적 논의일 뿐이다"며 주의를 주었으나, 타이슨 및 기타 인사들은 "자유무역 정책은 오늘날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정부의 개입이 꼭 필요하다."로 선전했습니다. 이것은 신중한 경제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행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기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자유무역 주장을 고수하는 아이러니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1980년대 자유무역 정책을 고수하며 옹호했던 경제학자들은 그 누구보다 자유무역 원리가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더 문제로 인식하는 건, 그들의 주장이 보호주의자들의 선전으로 가로채질 가능성 입니다. 


우리는 [국제무역논쟁] 시리즈 첫번째 글[각주:30]에서 '노파심을 가지고 자유무역 원리를 계속 설파해야 하느냐 vs. 자유무역의 문제점을 대중들에게 신중히 설명해야 하느냐'의 논점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은 2018년 출판된 『Straight Talk On Trade』 서문을 통해, "트럼프의 충격적인 대선 승리에 경제학자들의 책임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신중한 분석이 보호주의자들에게 남용되어 '야만인들의 탄약'(ammunition for the barbarians)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에 노파심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노파심이 오히려 대중들의 외면을 부른다고 지적합니다.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대중논쟁장에서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가로채질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학자들은 국제무역에 있어 한 가지 방향만 말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경제학자들은 사회적 논쟁 장에서 목소리를 잃게 된다. 그들은 또한 무역의 옹호자로 나설 기회도 잃고 만다."


우리는 앞으로 살펴볼 [국제무역논쟁 10's 미국] 시리즈, 즉 오늘날 중국 제조업의 발전과 교역확대가 초래하는 무역논쟁을 볼 때에도, 노파심으로 인해 자유무역 원리만을 고수하는 경제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공격적 일방주의 및 GATT 한계가 가지는 의미는? 


미국 반도체 산업 협회(SIA)가 일본 반도체기업을 제소할 수 있었던 근거는 '1974년 통상법 제301조'(Section 301 of the Trade Act of 1974)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공정 무역 관행 여부를 판단한 것은 당시 국제무역 시스템이었던 GATT가 아닌 미국정부 였습니다. 미국정부가 자국의 무역이익 침해여부를 스스로 판단하고 일본을 상대로 보복조치를 취한 겁니다.


GATT는 말그대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을 의미하는데, 1980년대 벌어진 무역분쟁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GATT는 주로 관세를 규제하는데, ① 시 국가들은 관세가 아닌 보조금 · 덤핑 등 비관세장벽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보호했습니다. 또한, ② 국가간 무역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를 중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③ GATT는 서비스산업 · 지적재산권 등 당시 미국이 우위를 가지고 있는 부문을 다루지 못했고, 이는 미국의 불만을 자아냈습니다. 일본 등 다른나라들이 자국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데 GATT 체제 속에서 대응을 하지 못하였으며, 서비스산업 무역자유화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은 자국의 법률인 1974년 통상법 제301조를 근거로 일방적 보복을 행사하였고, 이후 1988년 종합무역법(Omnibus Trade and Competitiveness Act of 1988) 속 '슈퍼301조'(Super 301 Article)를 제정하여 '공격적 일방주의'(aggressive unilateralism) 행보를 강화해 나갑니다.


이처럼 1980년대 미국의 무역정책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국의 이익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GATT 체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격적 일방주의 행보'를 보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글에서 1980년대 미국의 무역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본 이후, [국제무역논쟁 10's 미국]으로 넘어가 오늘날 미국-중국 간 무역분쟁을 이해합시다.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⑦] '공격적 일방주의' 무역정책 -다자주의 세계무역시스템을 무시한채, 미국이 판단하고 미국이 해결한다


  1.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①] 198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보호주의 압력이 거세지다 (New Protectionism) http://joohyeon.com/273 [본문으로]
  2.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⑤] 닫혀있는 일본시장을 확실히 개방시키자 - Results rather than Rules http://joohyeon.com/277 [본문으로]
  3. to make the international trading system work, all must abide by the rules. All must work to guarantee open markets. Above all else, free trade is, by definition, fair trade. [본문으로]
  4. When domestic markets are closed to the exports of others, it is no longer free trade. When governments subsidize their manufacturers and farmers so that they can dump goods in other markets, it is no longer free trade. When governments permit counterfeiting or copying of American products, it is stealing our future, and it is no longer free trade. When governments assist their exporters in ways that violate international laws, then the playing field is no longer level, and there is no longer free trade. When governments subsidize industries for commercial advantage and underwrite costs, placing an unfair burden on competitors, that is not free trade. [본문으로]
  5. we will take all the action that is necessary to pursue our rights and interests in international commerce under our laws and the GATT to see that other nations live up to their obligations and their trade agreements with us. I believe that if trade is not fair for all, then trade is free in name only. I will not stand by and watch American businesses fail because of unfair trading practices abroad. I will not stand by and watch American workers lose their jobs because other nations do not play by the rules. [본문으로]
  6.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④] 전략적 무역정책 - 관세와 보조금으로 자국 및 외국 기업의 선택을 변경시켜, 자국기업의 초과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http://joohyeon.com/276 [본문으로]
  7. ''the strategy of technological diffusion and limited market access, implied in the TI story . . . enabled Japanese firms roughly to mimic technological developments in the United States.'' 폴 크루그먼이 편집한 '전략적 무역 정책과 신국제경제학'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8.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③] 외국 기업에게 한번 시장을 내주면 되찾을 수 없다 - 생산의 학습효과가 작동하는 동태적 비교우위 http://joohyeon.com/275 [본문으로]
  9. [경제성장이론 ⑨] 신성장이론 Ⅱ - 아기온 · 호위트, 기업간 경쟁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혁신을 불러온다(quality-based model) http://joohyeon.com/259 [본문으로]
  10. It was at this juncture in the fall of 1981 that representatives of the U.S. semiconductor industry began making regular trips to Washington. They asked not for protection but for an end to the Japanese dumping, for the same opportunity to sell in Japan as the Japanese had in the United States, and for an end to Japanese copying of new chip designs.- 출처 : Irwin, 1996 재인용 [본문으로]
  11. [경제성장이론 ④] 수렴논쟁 Ⅰ- P.로머와 루카스, '지식'과 '인적자본' 강조 - 수렴현상은 없다 http://joohyeon.com/254 [본문으로]
  12. [경제성장이론 ⑧] 신성장이론 Ⅰ - P.로머,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다양한 종류의 투입요소가 끝없는 성장을 이끈다 (variety-based model) http://joohyeon.com/258 [본문으로]
  13.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④] 전략적 무역정책 - 관세와 보조금으로 자국 및 외국 기업의 선택을 변경시켜, 자국기업의 초과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http://joohyeon.com/276 [본문으로]
  14. demands for protection and support by high technology producers have intensified as their competitive position in world markets has weakened. [본문으로]
  15. The special features of high-technology producers make their growing demands for strategic trade approaches understandable. 32 As just noted, such producers are often characterized by large economies of scale and steep learning curves. Under these circumstances, access to foreign markets and the behavior of foreign firms and governments can directly affect the profitability of domestic producers. In industries in which the U.S. market is open and large foreign markets are closed, foreign competitors may be able to achieve more efficient scale and learning advantages as a result of increased volume in domestic and overseas markets, while domestic competitors are squeezed into a portion of the domestic market. [본문으로]
  16.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⑤] 닫혀있는 일본시장을 확실히 개방시키자 - Results rather than Rules http://joohyeon.com/277 [본문으로]
  17. In reality, the world of inter national trade is not a world of free trade. Governments control or manage trade in various ways. [본문으로]
  18. For informed policy making, the real choices are not choices between pure free trade and protection-which most economists incorrectly equate with managed trade-but choices about the appropriate combination of liberalization and government intervention that will improve national economic welfare and sustain a more open, international trading system over time. [본문으로]
  19. greater coordination and standardization of behavior in specific industries [본문으로]
  20. [국제무역이론 ④] 新무역이론(New Trade Theory) - 상품다양성 이익, 내부 규모의 경제 실현 http://joohyeon.com/219 [본문으로]
  21.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③] 외국 기업에게 한번 시장을 내주면 되찾을 수 없다 - 생산의 학습효과가 작동하는 동태적 비교우위 http://joohyeon.com/275 [본문으로]
  22.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④] 전략적 무역정책 - 관세와 보조금으로 자국 및 외국 기업의 선택을 변경시켜, 자국기업의 초과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http://joohyeon.com/276 [본문으로]
  23. The answers I will suggest are not encouraging. Most criteria for targeting suggested by the advocates of industrial policy are poorly thought out and would lead to counterproductive policies. While there are more sophisticated criteria suggested by economic theory, we do not know enough to turn the theoretical models into policy prescriptions. [본문으로]
  24. What does formal economic theory have to say? In textbook economic models, the fact that some industries are inputs into other industries is not in and of itself a source of market failure. In the absence of other distorting factors, the market will in theory produce exactly the appropriate amount of investment in linkage industries. [본문으로]
  25. The fact that an industry provides inputs into other industries does not in and of itself mean that markets underinvest in that industry. There may be market failures which do make it desirable to promote a linkage industry, but the fact that an industry provides inputs to the rest of the economy gives us no help in deciding whether or not it should be targeted. [본문으로]
  26. Unfortunately, knowing that an industry will or might become competitive tells us nothing about whether it should be promoted. [본문으로]
  27.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http://joohyeon.com/272 [본문으로]
  28.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④] 전략적 무역정책 - 관세와 보조금으로 자국 및 외국 기업의 선택을 변경시켜, 자국기업의 초과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http://joohyeon.com/276 [본문으로]
  29.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②] 마틴 펠드스타인,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은 국가경쟁력 상실이 아니라 재정적자 증가이다" http://joohyeon.com/274 [본문으로]
  30. [국제무역논쟁 시리즈] 과거 개발도상국이 비난했던 자유무역, 오늘날 선진국이 두려워하다 http://joohyeon.com/2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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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Posted at 2018. 12. 7. 17:28 | Posted in 경제학/국제무역, 경제지리학, 고용


※ 유치산업보호의 타당성을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글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을 통해,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및 자유무역 사상을 반박하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사상'(liberalism)[각주:1]은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사고방식 입니다. 국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며, 이익을 쫓는 개인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공의 이익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comparative advantage)[각주:2]은 여러 국가가 서로의 상품을 자유롭게 교환하여 전세계적인 후생을 극대화하는 '자유무역'(free trade)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자유무역론은 "자유무역 및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에만 유리한 이론 아니냐"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리카도가 살았던 시대상황[각주:3] · 보호무역을 추구했던 1920-30년대 호주[각주:4] ·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한 1950-70년대 중남미[각주:5]에서 누차 짚었듯이...)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똑같은 물음을 던지며, "제조업 육성을 위해 일시적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하자(temporary protection for infant industry)"는 주장으로 애덤 스미스를 정면 공격했습니다. 


스미스는 개별 국가들이 비교우위 특화 및 분업을 통해 각자 상품을 생산하는지 여부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은데 반하여, 리스트는 민족경제 발전을 위해 제조업 육성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농업 발전에 성공한 국가는 다음 단계인 제조업 발전을 위해 보호체제가 이로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리스트의 보호론은 산업발전 단계(stages of development)에 따른 일시적인 조치(temporary)이며, 궁극적으로 제조업 발전 이후에는 자유무역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보호체제는 오직 민족의 산업적 육성 목적하에서만 정당화(only for the purpose of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the nation)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대외 경쟁을 완전히 배제하면 나태와 무감각이 조장되어 민족에 해만 끼치게 됩니다.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을 설파한 애덤 스미스 · 데이비드 리카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유치산업보호론의 정당성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들의 논쟁을 살펴보면 "자유무역이 옳다! vs. 보호무역이 옳다!"와 같은 1차원적 접근 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물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그렇다면 '언제' 자유무역 정책을 쓰고, '언제' 보호무역 정책을 써야하나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접근 방식은 무역정책을 집행할 '상황'(circumstances)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리스트는 '산업발전 단계(stages of development)'를 상황의 구분으로 제시했으나, 거대한 단계의 구분보다는 좀 더 타당한 상황 구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제조업 발전 단계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유치산업보호 정책을 구사하더라도 항상 올바른 결과를 달성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숙된 농업을 가진채 제조업 단계로 넘어가는 상황은 유치산업보호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리스트는 영국 · 프랑스 등의 역사적 사례 분석(historical analysis)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여러 국가들을 살펴보니, 성숙된 농업과 함께 "제조업 역량을 배양하고 이를 통해 최고도의 문명과 교양, 물질적 복지와 정치력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특성과 수단을 보유"[각주:6]한 민족이 단지 "이미 더 선진화된 해외 제조업 역량의 경쟁에 의해 진보가 정체"[각주:7]되어 있을 때, 유치산업보호 정책을 구사하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는 사례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리스트의 접근방식은 '편향적 표본선택'(sample selection bias)' 문제가 있으며, '반사실적 검정'(counter-factual test)이 불가능 합니다. 


쉽게 말해, 리스트는 제조업 육성에 성공한 국가들이 채택했던 정책을 되돌아 봤을 뿐이지, 비슷한 조건에 있는 다른 국가들이 유치산업 정책을 채택했을 때 똑같은 성공을 안겨다줄 수 있는지는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만약 영국 · 프랑스 등이 다른 정책을 채택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지도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유치산업보호가 아닌 자유무역을 했더라도 제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면, "유치산업보호가 제조업 육성을 가져왔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현재를 희생하여 제조업을 육성하면 미래의 이익을 얻는다는 걸 아는 국가 · 민족 · 사업가라면, 보호조치가 없더라도 자연스레 이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스트는 "어린이나 소년이 힘이 센 사나이와의 결투에서 이기기 어렵거나 단지 저항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로 이미 앞선 외국 제조업과의 경쟁을 견딜 수 없고, 따라서 "'자연스런 사물의 흐름'(the natural course of things)에 따라 국내 제조업이 육성되는 건 전혀 불가능하며 어리석다"[각주:8]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말한 바와 같이 "각 개인은 자본이 가장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각주:9]합니다. 현재는 경쟁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미래에는 외국보다 낮은 가격에 상품을 제조할 수 있다고 믿는 사업가라면, 현재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제조업 분야에 투자를 했을 겁니다. 


리스트는 비교우위론을 정태적(static)으로만 받아들여 "비교우위에 따른 특화는 평생토록 변화하지 않는다"라고 간주했고, 유치산업보호 없이는 평생토록 농업 생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 사업가에 의해 국가경제의 생산성 · 부존자원 등이 시간이 흐른 후 바뀐다면, 비교우위도 자연스레 변화하는 '동태적 비교우위'(Dynamic Comparative Advantage) 양상을 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 및 유치산업 보호는 굳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리스트의 주장에 대응하는 자유주의의 반격으로 볼 수 있으며, 유치산업보호론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상황 및 조건이 필요함을 알려줍니다.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 무엇이 '중심'을 이루어야 하나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둘러싼 대립은 이처럼 학자들 간의 논쟁을 통해 이전보다 정교화된 논점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과거 만연해있던 중상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제시된 자유무역사상은, 시간이 흘러 유치산업보호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후 다시 자유주의 논리로 유치산업보호론의 허점을 찌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00% 자유무역이 옳다" 라거나 "100% 보호무역이 옳다" 라는 극단적인 생각은 배제되고, 어떤 상황에서 자유무역 혹은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해야 하며 평상시에는 어떠한 정책이 '중심'을 이루어야 하느냐 라는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주의 관점으로 유치산업보호론을 평가하면, 특수한 상황 및 조건(specific condition)을 필요로 하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평상시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어떤 경우'에는 때때로 정부의 산업정책 및 보호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럼 도대체 유치산업보호론이 타당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 및 조건이 무엇일까요?


▶ 새로운 학자와 새로운 주장의 등장 

 

  •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 1848년 작품 『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이를 처음 제시해준 학자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입니다. 『자유론』(『On Liberty』) ·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유명한 그 철학자 입니다. 밀은 1848년 작품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통해 뛰어난 통찰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 '일시적 보호가 정당화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제시


● 제10장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정부개입

(Of Interferences of Government grounded on Erroneous Theories)


정치경제학의 단순한 원리로부터 보호관세가 옹호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 자체의 본질상 그 나라의 여건에 완벽하게 알맞은 외국의 산업을 도입해서 (특히 신생 발전도상국에서) 토착화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부과하는 경우뿐이다.[각주:10]


생산의 한 분야에서 한 나라에 대한 다른 나라의 우위는 다만 먼저 시작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습득된 기술과 경험이 현재 우월하다는 점 말고는 한쪽이 유리할 것도 다른 쪽이 불리할 것도 본원적으로는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아직 이러한 기술과 경험을 습득하지 못한 나라지만, 그 분야에 먼저 착수한 나라들보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 생산에 더욱 잘 적응할 수도 있다.[각주:11] 


아울러 레이(Rae)가 적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어떤 분야의 생산이든 새로운 여건 아래 시도해보는 것보다 향상을 촉진하는 데 더욱 큰 요인은 없다. 그렇지만 개인들이 스스로 위험부담을 무릅쓰면서, 또는 사실을 말하자면 손해가 분명한데도 새로운 제조방식을 도입해서, 그 방식이 전통적으로 손에 익은 생산자들과 수준이 대등할 정도로 기술자들의 역량이 발전할 때까지 꾸려나가는 부담을 감수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합당한 시간까지 보호관세가 지속된다면, 그런 실험을 지원하기 위해서 한 나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 가운데 불편을 가장 줄이는 방법이 때로는 될 수도 있다.[각주:12] 


다만 그로써 양성되는 산업이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관세 없이도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한 사례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필수적이다. 또한 국내 생산자들에게는 자기들이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공정한 기회에 필요한 기간 이상으로까지 관세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여지를 남겨주면 안될 것이다.[각주:13]


(...)


생산비는 언제나 처음에 가장 크기 때문에 실지로는 국내생산이 가장 유리한 경우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금전적으로 손실을 겪는 후가 아니면 이익으로 나타나지 못할 수가 있다. 자기들이 망한 다음에 그 대신 들어오는 투자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투자자들이 그와 같은 손실을 감수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각주:14]


그래서 나는 신생국에서 일시적 보호관세는 때때로 경제적으로 옹호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간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하고, 종료시한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낮아져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그와 같은 일시적 보호는 일종의 특허와 본질이 같을 것이므로 비슷한 조건 아래서 시행되어야 한다.[각주:15] 


- 존 스튜어트 밀, 박동천 옮김, 『정치경제학 원리 4』, 제5편 제10장, 339-341쪽

- 영어 원문은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존 스튜어트 밀이 1848년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통해 제시한 논리는 유치산업보호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새로 정립시켰습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유치산업보호를 주제로 한 경제학 논문들이 오늘날에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밀은 두 쪽 가량의 짧은 문단을 통해 '일시적 보호가 정당화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The only case in which protecting duties can be defensible)을 논리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① 한 나라에 대한 다른 나라의 우위는 다만 먼저 시작했다는 데에 기인


19세기 당시 영국이 제조업에 비교우위를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요? 영국 민족이 태생적으로 물려받은 기술 · 기질 · 지리적위치 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제조업 생산에 유리해서 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통찰처럼 (부존자원이 아닌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 비교우위는 '역사적 우연성'(historical accident)이 먼저 시작하게끔 만들어주어서 획득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럼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 비교우위 결정에 있어 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② 시도해보는 것보다 향상을 촉진하는 데 더욱 큰 요인은 없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공부를 많이 하기 이며 다른 왕도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산기술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산경험 축적 입니다. 상품을 처음 제조할때는 미숙한 점이 많아 불량도 생기고 시간도 오래걸리지만, 점점 경험을 축적해나가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습니다. 


즉, 밀의 발언처럼 "시도해보는 것보다 향상을 촉진하는 데 더욱 큰 요인은 없"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을 거치면서 생산 경험을 쌓아가면(cumulative learning experience) 더 낮은 비용으로 상품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한 국가·민족이 비교우위 결정에 유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먼저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보다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고, 그 결과 낮은 비용으로 값싼 상품을 제조할 수 있게 되어 비교우위를 획득하게 된겁니다.


(주 : 무역을 만들어내는 것은 '서로 다른 상대가격'[각주:16]이며, 비교우위란 높은 기술수준[각주:17] · 풍부한 부존자원[각주:18] 덕분에 '상대적으로 값싼 상품을 생산하는 능력'을 뜻한다는 것을 기억)


존 스튜어트 밀은 '단지 먼저 시작하여 경험을 축적'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비교우위가 형성될 수 있다는 통찰을 제시하며 국제무역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혔습니다. 


③ 아직 이러한 기술과 경험을 습득하지 못한 나라지만, 그 분야에 먼저 착수한 나라들보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 생산에 더욱 잘 적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떠한 나라가 '역사적 우연성' 덕분에 먼저 생산을 시작하고 이후 '학습과 경험'을 통해 비교우위를 가지게 되는 원리는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가 먼저 생산을 시작했더라면, 현시점에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나라보다 더 우월한 생산능력을 가진채 더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잠재적인 비교우위는 뒤늦게 생산한 국가 혹은 아직 생산을 시작하지 못한 국가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비교우위 및 무역패턴은 가장 효율적인 결과물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잠재적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가 국내 산업 · 기업 등을 지원하여서 앞선 외국을 따라잡거나 혹은 생산을 시작하게끔 만들면, 보다 효율적인 무역패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뒤처진 국가 및 사업가가 스스로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다면, 미래의 이익 달성을 바라보고 현재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생산에 착수하지 않을까?" 입니다. 이번글 서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미래 이익을 쫓는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여 행위할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 및 보호조치는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또 다른 통찰이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무엇인지 한번 살펴봅시다.


④ 개인들이 스스로 위험부담을 무릅쓰면서, 또는 사실을 말하자면 손해가 분명한데도 새로운 제조방식을 도입해서, 그 방식이 전통적으로 손에 익은 생산자들과 수준이 대등할 정도로 기술자들의 역량이 발전할 때까지 꾸려나가는 부담을 감수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

자기들이 망한 다음에 그 대신 들어오는 투자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투자자들이 그와 같은 손실을 감수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들이 장기 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 손실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자유시장 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국가 및 사업가가 스스로 판단하여 생산에 착수할 겁니다. 문제는 자유시장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을 때 벌어집니다.


만약 장기이익을 바라본 사업가가 단기 손실을 감수해가며 생산경험을 축적하였는데, 이때 획득한 경험이 같은 나라의 다른 사업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럴 경우, 후발 사업가는 단기 손실을 보지 않고 바로 이익을 챙길 수 있으며, 단기 손실을 부담한 선발 사업가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줄어듭니다. 


이러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면, 아무도 먼저 사업에 착수하지 않으려 할테고, 결과적으로 그 국가 내에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밀의 표현처럼 "자기들이 망한 다음에 그 대신 들어오는 투자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투자자들이 그와 같은 손실을 감수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입니다. 


이를 현대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면 '외부성의 존재'입니다. (외부성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외부성'(externality)으로 인하여 비효율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참고 : 외부성 및 생산의 학습효과가 만들어내는 비교우위 패턴, 그리고 그 결과 초래될지도 모르는 잠재적 비효율성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무역이론 ③] 외부 규모의 경제 - 특정 산업의 생산이 한 국가에 집중되어야' 참고)


⑤ 합당한 시간까지 보호관세가 지속된다면 그런 실험을 지원 (...)

그래서 나는 신생국에서 일시적 보호관세는 때때로 경제적으로 옹호할 수 있음을 인정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여 국내 기업 · 산업을 지원하는 유치산업보호론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부가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되지 않게끔 보호한다면, 개별 기업들은 경쟁에 대한 부담을 덜고 단기 손실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또한 관세부과로 외국 상품가격이 오르게 되면 국내 생산자도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매출 및 이윤의 증가를 불러와 단기 손실 크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존 스튜어트 밀은 외부성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서 "합당한 시간까지 보호관세가 지속된다면 그런 실험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고, "신생국에서 일시적 보호관세는 때때로 경제적으로 옹호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도 밝힙니다. 


⑥ 다만 그로써 양성되는 산업이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관세 없이도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한 사례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

일시적 보호관세는 그 기간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하고, 종료시한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낮아져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논리를 다르게 보면, 장기 이익이 단기 손실을 초과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성의 존재로 인해 개인이 단기 손실을 부담하지 않으려 할때에만, 일시적인 보호조치가 정당화 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치산업보호가 때때로 타당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이 마치 무조건적인 보호무역 · 영구적인 보호체제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춰질까 염려하여, 밀은 '잠재적 성장 가능성이 있는 유치산업에 대한 일시적 보호'(Temporary Protection) 라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유치산업보호론은 현재 비교열위에 있는 산업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지원하는 정책도 아닙니다. '현재는 경쟁력이 없으냐 정부가 일시적인 지원을 하면 향후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산업'을 보호 · 육성하는 정책입니다. 


결론 : 정치경제학의 단순한 원리로부터 보호관세가 옹호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 자체의 본질상 그 나라의 여건에 완벽하게 알맞은 외국의 산업을 도입해서 (특히 신생 발전도상국에서) 토착화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부과하는 경우뿐이다.  

(The only case in which, on mer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protecting duties can be defensible, is when they are imposed temporarily (especially in a young and rising nation) in hopes of naturalizing a foreign industry, in itself perfectly suitable to the circumstances of the country.)


자, 이제 존 스튜어트 밀이 남긴 첫 문장이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완벽하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 보호주의 정책은 옳지 않으며 '옹호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그 경우란 단지 외국 산업에 비해 늦게 시작한 까닭으로 현재 경쟁력이 없으나, '본질상 그 나라의 여건에 완벽하게 알맞는' 산업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학습된 경험 축적 덕분에 비교우위를 찾을 수 있는 때 입니다. 오직 이때에만 '토착화되는 동안 일시적으로 보호관세를 부과'하는 유치산업보호 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통찰은 유치산업보호론 논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수행했던 역사적 사례분석에 의존하지 않은채 유치산업 보호가 정당화 될 수 있는 명확한 조건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자유주의 이념을 가진 당시 경제학자들도 '특정한 경우에는 자유무역 원리에서 이탈하여 수입관세를 이용한 일시적 보호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 로버트 발드윈, "무차별적 관세보호 보다는 직접적인 지원이 낫다"


시간이 흘러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 다른 학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학자는 "외부성 존재는 효율적 생산을 위해 정부가 개입할 필요를 제기해주지만, 과연 관세 보호 의도했던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까?"(What I will question is the effectiveness of tariffs in accomplishing this result.)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 로버트 발드윈 (Robert E. Baldwin), 1924~2011

  • 1969년 논문 <유치산업 관세보호에 反하는 경우>


그 인물이 바로 로버트 발드윈(Robert Baldwin)이며, 해당 주장이 실린 논문은 1969년 <유치산업 관세보호에 反하는 경우>(<the Case Against Infant-Industry Tariff Protection>) 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어깨 위에 올라선 로버트 발드윈은 외부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자원 이용이 불가능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정부개입의 수단(means of government intervention) 이었습니다. 


발드윈이 보기에 산업 내 전체 기업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보호관세는 외부성 제거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성 문제를 겪고 있는 개별 기업만 선별적으로 직접적인 지원을 해야 할 필요(much more direct and selective policy measure than non-discriminatory import duties)가 있었습니.


발드윈은 크게 2가지 경우를 제시하며 각각의 사례에서 보호관세의 무용성(ineffectiveness of protective duty) 및 직접적인 지원(direct subsidy)의 필요성을 설파합니다. 이번 파트를 통해 그의 주장과 논리를 알아봅시다.


● 개별 기업이 창출해낸 지식이 다른 기업에게 대가 없이 전파되는 경우


첫번째는 '개별 기업이 창출해낸 지식이 다른 기업에게 대가 없이 전파되는 경우' 입니다. 


로버트 발드윈은 "단순히 초기 생산비용이 외국보다 높다는 이유만으로 국내 기업을 보호해서는 안되며, 유치산업보호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는 '학습 프로세스와 연결된 기술적 외부성'(technological externalities frequently associated with the learning process)이 존재해야 한다." 라고 진단합니다.


왜냐하면 생산의 학습효과를 통해 미래에 외국기업보다 더 낮은 가격에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는 걸 국내 생산자가 알고 있더라도 기술적 외부성이 존재하면 아예 시장에 진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생산 방식을 발견하기 위해 비용을 투자하는 사업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잠재적인 경쟁자가 정보를 거리낌없이 쓸 가능성", 즉 기술적 외부성 이며, 이로인해 "개별 사업가가 지식 획득을 위한 투자를 꺼리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아무도 기술진보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 결과 그 나라의 지식수준은 사회적 최적 수준에 미달하게 됩니다. 


이는 앞서 소개한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밀은 보호 관세 부과로 외부성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만약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되지 않게끔 보호한다면, 지식획득에 수반되는 초기 비용투자 부담이 덜어지게 되어 단기 손실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수입관세 부과 이후 올라간 상품가격으로 이윤증대를 누리면서 단기 손실을 메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발드윈이 보기엔 국내 전체 기업에게 적용되는 무차별적인 관세(non-discriminatory import duty)는 외부성으로부터 초래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의 잠재적인 경쟁자가 나의 지식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수입관세 부과 이후로도 교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드윈은 기술을 무단으로 차용하는 국내 잠재적 경쟁자가 상품가격 인상 덕분에 더 높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선도적인 기업의 이윤은 국내 경쟁 증대로 인해 줄어들고 결국 지식투자 비용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심한 경우 기술개발에 투자한 기업들은 모두 퇴출되고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기업만 생존할 수도 있습니다.


로버트 발드윈이 진단한 사회적 비효율성이 초래되는 근본원인은 '지식투자로 인한 단기 손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한 기업이 전유할 수 없는 지식으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과 사적 비용의 차이'(knowledge is not appropriable by individual firm) 였습니다. 


단기 손실을 보전해주려는 보호관세는 지식에 투자한 기업의 단기 손실도 줄어주지만, 지식에 투자하지 않는 잠재적 진입자의 이윤도 증가시켜 줍니다. 따라서, 발드윈은 든 기업에게 적용되는 무차별적 보호관세가 아니라 지식을 발견한 기업에게만 주어지는 보조금(a subsidy to the initial entrants into the industry for discovering better productive techniques)이 필요하다 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 금융시장 정보 불완전성으로 자금조달이 힘든 경우


두번째는 '금융시장 정보 불완전성으로 자금조달이 힘든 경우' 입니다.


국내에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으로 국내 기업 한 곳이 신규진입 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이 기업은 기술개발 및 기반시설 건설을 위해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borrow funds from investors)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국내에서 이 산업에 대해 아는 투자자가 없다는 겁니다. 투자자들은 기업가치를 올바르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규 진입기업은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스스로 시장조사(market study)를 하여 투자자에게 상세한 정보(detailed market analysis)를 제공해줄 유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첫번째 경우와 유사한 문제가 초래됩니다. 


만약 시장조사를 하기 위한 비용이 발생하는 데 반하여, 이를 통해 얻게 된 정보를 다른 기업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어느 기업도 새로운 산업에 먼저 진입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먼저 진입하여 시장조사를 하기만을 바라겠죠. 그것을 못 견디고 먼저 진입하는 기업은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자금을 조달하거나 아예 빌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금융시장 정보 불완전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유익한 산업이 수립되지 않는 경우가 초래되고 맙니다.(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firm will not finance the cost of the study, and a socially beneficial industry will not be established.)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무차별적인 보호 관세가 아니라 지식획득을 지원하는 직접적인 보조금(direct subsidies to pay for the costs of knowledge acquisition) 입니다.


● 유치산업보호론을 둘러싼 논쟁에 로버트 발드윈이 기여한 것


번 파트에서 소개한 로버트 발드윈의 1969년 논문은 "유치산업보호를 위해 수입관세 부과 등으로 보호장벽을 높여야 한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대표적인 참고문헌 입니다.


로버트 발드윈의 첫번째 공헌은 '현재에는 생산비용이 높지만 학습효과에 의해 잠재적 비교우위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유치산업 보호조치가 항상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현대 경제학 프레임 내에서 논리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지식획득 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부성이 없다면, 기업은 단기 손실과 장기 이익을 스스로 비교 평가하여 시장에 진입할 겁니다. 또한 금융시장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면, 투자자들은 장기 이익을 내다보고 자금을 빌려줄 것이고, 기업은 단기 손실이 주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치산업 보호조치가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지식획득이 초래하는 외부성'(technological externality) 및 '금융시장 불완전성'(capital market imperfection) 이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로버트 발드윈의 두번째 공헌은 '비록 지식획득 외부성 및 금융시장 불완전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산업을 보유하지 못하더라도, 수입장벽을 높이는 보호조치가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입니다.


수입관세 부과는 외부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지식투자에 기여하지 않는 잠재적 진입자들의 시장진입만 되려 부추길 수 있습니다. 또한 금융시장 정보 부재로 인한 문제는 무역보호 조치로 해소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치산업보호를 위한 무역정책을 구사할 생각보다는 구체적인 시장실패를 직접 해결하려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은 '특정한 경우에 자유무역이 사회적으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수입관세 부과 등 보호무역 보다는 시장실패를 초래하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시정하는 구체적인 정부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호무역 정책은 최선이 아닌 차선의 정책(Second-Best)입니다.




※ 유치산업보호론 논쟁을 통해 보다 정교화된 자유무역 사상


애덤 스미스의 1776년 작품 『국부론』을 통해 세상에 나온 '자유무역 사상'은 이렇게 여러 학자들 간의 논쟁, 특히 유치산업보호 정책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을 거치면서 보다 정교화 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의 [국제무역논쟁] 시리즈와 이번글을 통해 알아본 '자유무역 사상의 진화과정'을 짧게나마 한번 정리해봅시다.


'무역수지 흑자'를 중요시 했던 중상주의 시대[각주:19]

- 토마스 먼, 『잉글랜드의 재보와 무역』, 1664년


"우호적인 무역수지가 필요하다"


'값싼 외국 상품 수입' 높게 평가하는 자유무역 사상의 등장[각주:20]

- 애덤 스미스,  『국부론』, 1776년 


- "거의 모든 무역규제의 근거가 되고 있는 무역차액 학설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 "금은을 살 수단[예: 포도주]을 가진 나라는 결코 금은의 부족을 겪지 않을 것이다.", "무역의 자유에 의해 우리는 우리 상품을 유통시키거나 다른 용도에 사용할 금은을 언제나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안심하고 믿어도 된다.


- "나는 이익이나 이득이라는 것은 금은량의 증가가 아니라 그 나라의 토지 · 노동의 연간생산물의 교환가치 증가나 주민들의 연간소득 증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 나라가 이러한 우위를 가지고 다른 나라가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한, 후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전자로부터 구입하는 것이 항상 더 유리하다."


'서로 다른 상대가격이 무역을 만들어낸다'는 비교우위론의 등장[각주:21]원리[각주:22]

-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1817년


- "그 나라가 식량의 수입을 자유롭게 허용한다면, 이윤율의 큰 하락 없이, 또는 지대의 큰 증가 없이 자본의 자재를 크게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 "한 나라에서 상품의 상대 가치를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규칙이 둘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상품의 상대 가치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 "포르투갈이 수입하는 상품이 잉글랜드에서보다 포르투갈에서 더 적은 노동으로 생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환은 일어날 것이다. (...) 왜냐하면 포르투갈은, 그 자본의 일부를 포도 재배에서 직물 제조로 전환시켜서 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직물을, 잉글랜드에서 획득하게 해주는 포도주 생산에 그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 "직물이 포르투갈에 수입되려면, 그것을 수출하는 나라에서 치르는 값보다 포르투갈에서 더 많은 금을 받고 팔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포도주가 [포르투갈에서] 잉글랜드로 수입되려면, 그것이 포르투갈에서 치르는 값보다 잉글랜드에서 더 많이 받고 팔릴 수 있어야 한다."


'비교우위론은 수확체증에 특화하는 영국에게만 이롭다'반박이 등장[각주:23]

- 제임스 브릭던, <호주 관세와 생활수준>, 1925년 논문


- "경제이론은 합리적추론의 기반이지만 일반적인 지침의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하면서 비교할 수 있는 결과물은 항상 시간 및 공간의 상황에 달려있다. 고전 국제무역이론은 영국의 상황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 "이러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자유무역이 영국에게 이로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호주에게 이로운 것은 보호무역 정책이다."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은 개발도상국을 선진국에 종속시킨다'주장이 등장[각주:24]

- 라울 프레비쉬,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발전과 주요 문제들』, 1950년


- "종속은 특정한 국가집단이 다른 경제의 발전과 확산에 의해 제약받는 경제를 가지고 있는 상황", "제조업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한 지배국가는 팽창하고 스스로의 발전에 자극을 가할 수 있는 반면, 1차상품 수출에 의존하는 종속국가는 이러한 팽창의 반사로써밖에 발전할 수 없을 때 종속의 형태"


- "비교우위에 입각한 무역을 하면, 기술진보의 혜택은 중심부-주변부 간에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대외지향 무역체제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한국의 경제발전[각주:25]


- "정부는 증산과 더불어 수출을 대지표로 삼았읍니다. 공업원료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수출은 경제의 생명입니다. 2차대전직후, 영국의 「처어칠」수상의 『수출 아니면 죽음』이란 호소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등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조선,기계,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의 제품 수출을 목적으로 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읍니다."


'민족경제 발전을 위해 인위적인 제조업 육성이 필요하다'유치산업보호론 등장[각주:26]

-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1841년


- "필자가 영국인이었다면, 애덤 스미스 이론의 근본 원리를 의문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오늘도 이 글을 가지고 나설 용기를 준 것은 주로 독일의 이익이다."


- "투박한 농사에서는 정신적 활력 · 신체적 둔함, 옛 개념 ·관습, ·습관 · 행위 방식에 대한 고수, 교양 · 복지 · 그리고 자유의 부족이 지배한다. 반면에 정신적, 물질적 재화의 끊임없는 증식을 향한 노력, 경쟁심, 자유의 정신은 제조업 국가 및 상업 국가의 특징이 된다."


- "상공업 패권을 쥔 (영국의) 공장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생 혹은 반밖에 장성하지 못한 공장들보다 앞서는 천 가지 장점을 가진다. (…) 그러한 세력에 맞서 자유경쟁을 하면서 사물의 자연스런 흐름에 대해 희망을 품는 것이 어리석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 "부와 생산 역량의 최고도에 도달한 이후, 자유무역과 자유경쟁의 원리로 점진적으로 회귀하여, 농부들 제조업자들 상인들을 게으름에 빠지지 않게하고 이들이 달성한 우위를 유지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 '유치산업보호 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제시'자유주의[각주:27]

- 존 스튜어트 밀, 『정치경제학 원리』, 1848년


- "보호관세가 옹호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 자체의 본질상 그 나라의 여건에 완벽하게 알맞은 외국의 산업을 도입해서 (특히 신생 발전도상국에서) 토착화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부과하는 경우뿐이다."


- "그래서 나는 신생국에서 일시적 보호관세는 때때로 경제적으로 옹호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간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하고, 종료시한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낮아져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보호무역 보다는 시장실패를 교정하는 정부개입이 필요하다'현대경제학의 반격[각주:28]

- 로버트 발드윈, <유치산업 관세보호에 反하는 경우>, 1969년 논문


- "생산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의 시장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관세부과를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수입관세 부과를 통한 일시적 보호조치는 효율적 생산을 달성케 할 수 없다.", "수입관세는 외부성의 문제를 교정할 수 없다."


- "필요한 것은 지식획득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보조금이다.", "유치산업이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보호관세가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선별적인 정책이다."




※ 한국에서 유치산업보호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이제 우리는 유치산업 보호조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육성하고 싶은 국내산업 중 아무거나 보호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② 현재 비교열위에 처한 이유는 단지 외국에 비해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며, 

 생산의 학습효과(learning by doing)를 통해 향후 더 낮은 가격에 상품을 생산할 잠재적 비교우위가 있으며, 

 장기 이익을 내다보는 국내 생산자가 외부성 및 금융시장 불완전성 때문에 생산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고, 

 시장실패를 직접적으로 교정하는 정책 대신 보호무역 조치가 더 확실한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 때, 

⑥ 유치산업보호 정책은 정당화되고 또 의도했던 결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국이 유치산업보호 정책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위의 조건들이 충족됐던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난글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에서 소개했듯이, 한국정부는 기계 · 조선 · 철강 · 화학 · 전자 등의 중화학 업종 육성하기 위하여, 수입장벽을 세워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시키지 않았고 보조금을 통한 직접 지원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중화학 공업화로 가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가 제철소 · 조선소 등을 건립하려고 했을 때, 외국 정부 및 학자들은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산업을 왜 키우려고 하느냐. 현재의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충실해라" 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지난글에서도 소개했던) 아래의 기사가 당시 정부가 마주했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다시 읽어봅시다.


<AID가 본 한국공업건설 (上 제철소의 경우)>

(주 : AID란 원조를 지원해주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의미한다)


경제5개년계획을 특징지으고 있는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그러기에 기자는 워싱턴에 닿자마자 AID가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타진해보기 위하여 AID의 문을 두드렸다. (...)


기자가 AID 당국자들과 만나서 얻은 결론은 제철소는 사무적으로는 절대로 무망한 것으로 느껴졌으나 정치적으로 배려를 한다고 하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비료공장은 AID가 주장하는 바 과인산질소 배합비료 공장을 세우는 데 한국측이 동의한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거부하교 요소 25만톤 용량을 만든다는 종래의 주장을 견지한다면 이 역시 AID에서 돈을 꾸지 못할 것이라 것이다.


AID는 대체로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① 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 탄 6천 칼로리 이상나는 역청회 등 제철에 필요한 자연자원이 극히 빈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50% 이상의 철분을 가지고 있는 철광석의 매장량은 지난번 탐광에 의해서도 겨우 5백만톤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이 나왔으니, 그처럼 빈약한 자원을 상대로해서 연간 25만톤의 제철소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는 것이다. (...)


② 그러니까 한국서 제철을 하자면 외국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사오지 않을 수 없는데 철광석을 100만톤, 석탄을 150만톤을 사오자면 적어도 3,500만불의 외화를 매년 지출하여야만 할 것이니 4,200만불의 수출실적 밖에는 못 가지 한국의 외화사정 아래서는 이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물론 철광석과 석탄도 연불 등 상업차관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기도 하나 AID 규정은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차관을 받는다는지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기로 되어있으므로 상업차관에 의한 원료 공급도 안된다는 것이다. (...)


③ 설령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준다고 해도 철의 시장경쟁은 지금도 치열하지만 장차 더욱 더 백열전을 전개할 것이니 과연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경쟁에서나마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데는 의문이 짙다는 것이다. 일본도 비록 철광석도 석탄도 사다가 쇠를 녹이고 있다고 하나 경영기술에 있어서나 작업기술에 있어서나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일본과 같은 생산비로서 제철을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


⑤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제철소를 만들려면 적어도 1억 5천만불을 들여야 할터이니 그 돈을 다른 산업들 한국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세우는데 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는 것 같다. 


- 이동욱, 1962년 10월 20일, 동아일보 칼럼/논단

- 네이버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현재의 포항 제철소는 1965년 한일협정의 산물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되어 1973년 가동을 시작 하였는데,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부터 종합제철소 건립을 꿈꾸었습니다. 


꿈과 달리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라는 견해를 내비쳤습니다. 이들의 주된 논거는 '한국의 제철소 건설 시도가 비교우위 원리에 벗어난다' 입니다. 


① 제철소는 원자재인 철광석과 석탄 등을 제련하여서 철판을 만드는 곳인데, 한국은 원자재를 풍부하게 가진 국가가 아닙니다. 헥셔-올린의 무역이론[각주:29]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relative abundant resource)을 가진 국가가 그 자원이 집약된 산업(resource-intensive)에 비교우위를 가지는데, 한국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② 또한 어찌어지 철판을 생산한다고 해도 과연 일본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겠냐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일본은 70년전부터 제철소를 운영하며 획득한 기술수준으로 낮은 생산비를 유지하는데, 이를 한국이 수년내에 따라잡기 힘들거라는 전망이죠.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날 한국은 세계 1위 제철소로 평가받는 POSCO(구 포항제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외국 기관 · 학자들이 충고했던 자유무역 논리를 그대로 따랐더라면 오늘날 한국에 제철소는 없었을 겁니다.


한국이 유치산업보호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한국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했던 미국제개발처의 발언에서 역설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미국제개발처(USAID)는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을 보유한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에 의문을 품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철강산업 우위는 '역사적 우연성'에 의한 것일지도...


1960년대 당시 일본이 한국에 비해서 철강산업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 연유는 선천적으로 제철기술이 뛰어나거나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일본이 한국보다 70년 일찍 철강업을 시작한 역사적 배경 덕분(historical accident) 입니다. 반대로 한국이 일본보다 일찍 제철소를 건립했더라면 1960년대 당시의 비교우위는 한국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철강산업을 보호하면서 육성하면서 70년이라는 시간을 따라잡으면, 장기적으로는 일본보다 경쟁력 있는 제철소를 보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을 따라잡는 동안에 한국 제철소는 큰 손실을 보겠지만, 정부보조를 받아서 버틴다면 언젠가는 우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지금 제철산업에 비교우위가 있느냐"를 따지기 보다는 "향후 제철산업에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느냐"(Dynamic Comparative Advantage)라는 물음을 던져야 마땅합니다. 한국정부는 후자의 물음을 던진 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 외부 규모의 경제


제철 · 조선 · 자동차 · 전자 산업 등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공장 하나를 짓고 기계설비만 도입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철광석 · 기계부품 등을 외국에서 조달해오기 위한 판로가 필요하고, 여러 하청 업체들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 산업에 맞는 기술을 가진 근로자 집단도 존재해야 합니다. 


이처럼 '같은 산업에 속한 여러 기업 · 근로자들이 한 곳에 모인 결과'로 집적의 이익을 향유하는 것을 '외부 규모의 경제'(external scale of economy)라 부릅니다. 이들은 노하우공유, 부품 공동구매, 근로자 채용의 용이함 등 덕분에,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평균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외부 규모의 경제 또한 외부성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만약 제철 산업을 하고 싶은 산업가 한 명이 혼자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업가가 동시에 산업에 진입하지 않는한 생산과정이 매끄럽게 돌아갈리가 없고, 그 결과 아무도 먼저 사업에 착수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정부가 국영기업을 설립하여 직접 사업에 착수하거나 여러 사업가가 동시에 진입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 미발달된 금융시장


미발달된 금융시장 또한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만약 사업가가 금융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 받을 수 있다면, 단기 손실에 대한 부담이 덜어집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금융시장이 미발달한 상태였고 형성된 자본 크기도 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국내자본과 차관 형태로 들여온 외국자본을 선별된 기업에 몰아주는 금융지원 정책[각주:30]을 구사했습니다. 


이처럼 외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제철 · 조선 산업의 특징, 부족했던 자본, 금융시장의 미발달 등은 일시적 무역보호체제와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 (보론) 장하준이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첫번째 : 장하준, 2004, 『사다리 걷어차기』
  • 두번째 : 장하준, 2007, 『나쁜 사마리아인들』
  • 세번째 : 서강대 교수진, 2012, 『한국경제를 위한 국제무역 · 금융 현상의 올바른 이해
  • 네번째 : 더글라스 어윈(Douglas Irwin), 2012 번역, 『공격받는 자유무역』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유치산업보호론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성공 스토리 입니다.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자유무역사상을 비판하는 단골 메뉴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정부주도 산업정책의 효과를 직접 경험한 한국인들은 유치산업보호 논리에 친숙하며, 특히 대중적으로 유명한 한 학자로 인해 '문제가 있는 자유무역과 이득을 불러오는 보호무역'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학자는 바로 장하준 입니다.


장하준은 2004년 『사다리 걷어차기』 · 2007년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을 통해 '선진국의 경제발전은 보호무역 덕분이며, 개발도상국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있다'는 식의 논지를 반복해서 주장해왔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수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비판해오고 있습니다. 국제무역 정책 및 역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더글라스 어윈(Douglas Irwin)은 서평을 통해 장하준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각주:31]하였고, 한국 학자들도 단행본 『한국경제를 위한 국제무역 · 금융 현상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장하준을 비판하였습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된 비판 요지는 크게 2가지 입니다. 


첫째, 편향적 표본선택 및 반사실적 검정의 부재


이는 이번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리스트가 학자들에게 비판받은 지점과 동일합니다. 


장하준은 오늘날 선진국인 미국 · 독일 등의 역사적 분석(historical analysis)을 통해, 과거에 이들이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했고 이것이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들과 같은 조건에 있었던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구사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편향적 표본선택(sample selection bias)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미국 · 독일 등이 보호무역이 아닌 정책을 구사했더라면 오늘날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반사실적 검정(counterfactual test)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장하준은 이들이 과거에 보호무역을 실시하였다고 보는데) 만약 이들이 과거에 자유무역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더 높은 경제수준을 누릴 수 있었더라면, 되려 과거의 보호무역은 악영향만 끼친 꼴이 됩니다.


둘째,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 vs.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가 중심' 구분의 부재

 

자유무역론을 믿는 주류 경제학자라고 해서 100% 자유무역 정책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이번글에서 누차 설명했듯이, 특정한 경우에는 시장실패를 교정하는 정부개입이 정당화 되고, 더 나아가 유치산업을 위한 일시적 보호가 필요할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단, 어디까지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유무역 이며, 보호는 특정한 경우에 일시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뿐입니다.


하지만 장하준은 시대적 상황 · 국가의 경제수준에 상관없이 어느때든 보호주의 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한국에서 유치산업 보호 정책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오늘날 한국에도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고 믿을 수는 없는데 말이죠


앞으로 쓰고 싶은 [실증분석을 위한 계량] 시리즈를 통해 장하준 주장이 가지는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80년대 미국, 국내산업 보호를 위한 적극적 무역정책 필요성이 제기되다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시리즈를 통해 봐왔듯이, 유치산업보호론 혹은 보호무역주의는 주로 개발도상국 내에서 자유무역론에 대항하여 제기된 사상 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 미국 내에서, 외국과의 경쟁에서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무역정책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외국은 주로 '일본'을 의미했으며, 보호하기 위한 국내산업은 주로 철강 · 자동차 등 '제조업'과 반도체 · 전자 등 '최첨단 하이테크 산업'을 뜻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트럼프행정부가 '중국'으로부터 '제조업 및 IT 지식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보호주의를 채택하려는 것과 똑같은 양상입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보호주의 압력이 거세지는 것일까요? 


앞으로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과 [국제무역논쟁 10's 미국]을 통해, 미국 및 선진국 내의 무역논쟁을 알아봅시다.


다음글 : [국제무역논쟁 80's 미국 ①] 198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보호주의 압력이 거세지다 (New Protectionism)


  1.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①] 애덤 스미스, 중상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무역 사상을 내놓다 http://joohyeon.com/264 [본문으로]
  2.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http://joohyeon.com/265 [본문으로]
  3.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http://joohyeon.com/265 [본문으로]
  4.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①]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 수입관세를 부과하여 수확체감과 교역조건 악화에서 벗어나자 http://joohyeon.com/268 [본문으로]
  5.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6.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5장 민족 정체성과 민족의 경제학, 259쪽 [본문으로]
  7.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5장 민족 정체성과 민족의 경제학, 259쪽 [본문으로]
  8.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24장 제조업 역량과 항구성 및 작업 계속의 원리, 412-413쪽 [본문으로]
  9.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4편 제2장, 548쪽 [본문으로]
  10. (The only case in which, on mer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protecting duties can be defensible, is when they are imposed temporarily (especially in a young and rising nation) in hopes of naturalizing a foreign industry, in itself perfectly suitable to the circumstances of the country.) [본문으로]
  11. (The superiority of one country over another in a branch of production, often arises only from having begun it sooner. There may be no inherent advantage on one part, or disadvantage on the other, but only a present superiority of acquired skill and experience. A country which has this skill and experience yet to acquire, may in other respects be better adapted to the production than those which were earlier in the field:) [본문으로]
  12. (and besides, it is a just remark of Mr. Rae, that nothing has a greater tendency to promote improvements in any branch of production, than its trial under a new set of conditions. But it cannot be expected that individuals should, at their own risk, or rather to their certain loss, introduce a new manufacture, and bear the burthen of carrying it on until the producers have been educated up to the level of those with whom the processes are traditional. A protecting duty, continued for a reasonable time, might sometimes be the least inconvenient mode in which the nation can tax itself for the support of such an experiment.) [본문으로]
  13. (But it is essential that the protection should be confined to cases in which there is good ground of assurance that the industry which it fosters will after a time be able to dispense with it; nor should the domestic producers ever be allowed to expect that it will be continued to them beyond the time necessary for a fair trial of what they are capable of accomplishing.) [본문으로]
  14. (The expenses of production being always greatest at first, it may happen that the home production, though really the most advantageous, may not become so until after a certain duration of pecuniary loss, which it is not to be expected that private speculators should incur in order that their successors may be benefited by their ruin.) [본문으로]
  15. (I have therefore conceded that in a new country a temporary protecting duty may sometimes be economically defensible; on condition, however, that it be strictly limited in point of time, and provision be made that during the latter part of its existence it be on a gradually decreasing scale. Such temporary protection is of the same nature as a patent, and should be governed by similar conditions.) [본문으로]
  16.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④] 교역조건의 중요성 - 무역을 하는 이유 · 무역의 이익 발생 http://joohyeon.com/267 [본문으로]
  17. [국제무역이론 ① 개정판] 1세대 국제무역이론 -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http://joohyeon.com/216 [본문으로]
  18. [국제무역이론 ②] 1세대 국제무역이론 - 헥셔&올린의 보유자원에 따른 무역 http://joohyeon.com/217 [본문으로]
  19.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①] 애덤 스미스, 중상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무역 사상을 내놓다 http://joohyeon.com/264 [본문으로]
  20.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①] 애덤 스미스, 중상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무역 사상을 내놓다 http://joohyeon.com/264 [본문으로]
  21.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http://joohyeon.com/265 [본문으로]
  22.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③]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ttp://joohyeon.com/266 [본문으로]
  23.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①]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 수입관세를 부과하여 수확체감과 교역조건 악화에서 벗어나자 http://joohyeon.com/268 [본문으로]
  24.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25.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 http://joohyeon.com/270 [본문으로]
  26.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 http://joohyeon.com/271 [본문으로]
  27.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http://joohyeon.com/272 [본문으로]
  28.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http://joohyeon.com/272 [본문으로]
  29. [국제무역이론 ②] 1세대 국제무역이론 - 헥셔&올린의 보유자원에 따른 무역http://joohyeon.com/217 [본문으로]
  30.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http://joohyeon.com/157 [본문으로]
  31. 세계경제사학회(Economic History Association), 2004.04. Book Review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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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

Posted at 2018. 10. 15. 00:57 | Posted in 경제학/국제무역, 경제지리학, 고용


※ 한국은 어떻게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나



35년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뒤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남았던 대한민국은 2018년 오늘날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섰습니다. 한국은 경제성장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과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GDP 추이를 그래프로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전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학부 경제성장론 교과서 표지가 한국이라는 점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모두가 이견없이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어떻게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나?"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혹자는 북한과 비교하여 자유시장체제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다른 누군가는 국가가 수출 및 금융지원 제도를 통해 기업을 통제하면서 발전[각주:1]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지향하면서 무역개방도를 높여온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보호무역을 통해 특정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냉전 시기 미국의 외교정책 아래에서 일본과 국제분업체제를 구축한 덕분에 급속한 성장을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반박하며 미국이 독재정권을 용인하고 한일수교를 독촉한 결과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고착화 되었고 민주화 달성이 지연되었다고 말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1961-79년까지 약 19년간 집권한 박정희정권의 공로를 치켜세우는 쪽도 있고, 반대로 박정희정권기에 수립된 경제정책이 오늘날까지 한국경제에 해를 끼치고 있다[각주:2]고 말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사항은 "한국은 대외지향적 무역체제를 추구한 덕분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였다(outward-looking trade regime)" 입니다. 대내지향적 수입대체 산업화를 선택한 중남미[각주:3]와는 달리, 한국은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진한 덕분에 오늘날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나타난 세부적인 행위가 시장주의적인지 국가주도적인지 · 자유무역인지 보호무역인지에 대해 이견들이 존재하고, 당시 미국과 박정희정권의 공과에 대해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어찌됐든 무역교류 확대를 통해 수출과 수입을 증가시켜온 대외지향적 무역체제가 경제발전에 핵심이었다는 건 다수가 동의합니다.


이 글의 주제는 한국경제 성장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게 아니라 [국제무역논쟁] 시리즈 속에서 한국경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역'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은 2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중남미와 달리 당시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를 선택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전글[각주:4]에서 살펴봤듯, 중남미가 수입대체를 선택한 배경은 '산업화를 위한 제조업 육성' · '1차상품에 치중된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함' ·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중남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35년간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겪고 경제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경제적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퍼져있었고 농업에 치중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은 자립경제와 산업화를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진흥 정책을 산업화 전략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입대체를 추구하다가 수출진흥에 더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부분적인 수입대체를 펼치는 동시에 항상 대외지향적 정책을 지향했습니다. 이때 부분적인 수입대체도 대내지향적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출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입대체 였습니다. 자동차 · 조선소 등 중화학공업 부문을 육성한 뒤 수출액을 늘린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중남미와 한국의 모습을 대조해보면, 처음에 선택하였던 대내지향적 수입대체를 계속 추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 아찔합니다. 따라서, 1950-60년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로 나아간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대외지향 수출진흥 산업화를 통한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나,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나? 


두번째 물음은 앞으로의 [국제무역논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질문입니다. 


분명 한국은 대외교역을 증가시켜온 수출진흥 정책 덕분에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외교역량은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보호무역' 덕분에도 증가할 수 있습니다. 


1920-30년대 호주의 보호무역[각주:5]은 1차 상품 특화로 인한 수확체감 및 소득분배 악화를 탈피하는 걸 목적으로 하였고, 1950-70년대 중남미의 수입대체[각주:6]는 아예 대내지향적 무역체제를 의미했습니다. 이 둘의 경우에서 교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을 구사하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1960~70년대 한국은 보호무역 정책을 하면서도 교역량 확대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박정희정권은 향후 수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특정 산업을 선택하여 집중 육성하고 수출보조금 등의 지원을 늘려나갔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의 이러한 모습은 '유치산업보호의 성공사례'(Infant-Industry Protection)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공요인을 온전히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라 하기에도 애매모호함이 있습니다. 1967년 7월 상공부는 수입허가 품목을 규정해온 포지티브 리스트에서 이제 수입금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입을 자동승인 하겠다는 네거티브 리스트로 전환하는 등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수입관세율도 점차 낮춰가며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커 온 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한국정부는 자유무역의 이점(gains from trade)을 살리는 방향을 꾸준히 추구했습니다. 


만약 온전히 국내산업 육성 및 보호에만 집중했다면 생산성 낮은 기업의 퇴출 등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아 비효율만 초래됐을 겁니다. 한국정부는 관료와의 결탁을 통해서 생존할 수 있는 국내시장이 아닌 가격과 품질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을 유도하고, 달성해야할 수출목표액을 완수해야 하는 수출책임제 등의 규율(discipline)도 강력히 부과함으로써 항상 경쟁체제를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형식은 국가가 주도했더라도 내용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의 이점을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의 경제발전 성공요인을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는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는지는 [국제무역논쟁]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결국 "유치산업보호론이 언제 유효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둘러싼 논점입니다.


우선 이번글에서는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로 나아간 배경과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이점을 모두 살릴 수 있었던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음글에서 [유치산업보호론]의 등장배경과 논리, 문제점 그리고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살펴봅시다.




※ 내포적 공업화와 자립경제 달성을 목표로 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통화개혁을 통해 내자를 동원하고 종합제철소 등을 건설하려 함


<1965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정부는 증산과 더불어 수출을 대지표로 삼았읍니다. 공업원료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수출은 경제의 생명입니다. 2차대전직후, 영국의 「처어칠」수상의 『수출 아니면 죽음』이란 호소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


앞으로 수년간만 국내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시책을 수출무역에 집중한다면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수출입면에서 자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경제시책의 방향이 무역진흥에 집결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무역에서 출발하여 무역에서 안정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 출처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대통령 박정희, 1965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강조표시는 블로그 글쓴이 본인이 한 것)


1965년 1월 16일, 대통령 박정희는 연두교서를 통해 "수출 아니면 죽음" 이라고 말하며 "경제시책의 방향이 무역진흥에 집결"할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1965년은 박정희정권이 수출제일주의를 본격적으로 내세운 첫 해 입니다.


그렇다면 1961~64년에 박정희가 내세웠던 경제정책은 수출중심이 아니었을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했고 1963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합법적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박정희정권이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통해 한국경제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출제일주의는 이들이 처음부터 내걸었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 박정희와 5·16 쿠데타 세력이 처음에 원했던 건 자립경제 달성

- 자립경제와 자주적 공업화를 추구한 박희범의 '내포적 공업화 전략'


1961년 박정희와 5·16 주도 세력들이 처음 가졌던 생각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난 자립경제 달성' 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963년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를 통해 "미국의 원조 정책을 기저로 하는 한국 경제의 이러한 경향은 기간산업, 중소기업 등 국내 생산 공업을 답보 상태로 낙후시킨 반면,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국민의 정신면에 회복할 수 없이 큰 멍을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1960년대의 한국은 확실히 외래상품이 한국 시장을 점령한 시기였다" 라고 말하며, 자립경제 달성에 못미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 경제학자 박희범 (1922~1981)

  • 주요 저서 : 『한국경제성장론』 (1968)


집권세력의 생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자문 위원으로서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에 관여한 인물이 박희범 입니다. 그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intensive industrialization)[각주:7]을 내세웠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 입니다. 


중남미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은 기초적 소비재를 우선 대체하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박희범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제철 등 금속공업, 기초화학공업, 조선, 공작기계 등 기초적 생산재를 우선 대체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어찌됐든 대외의존을 줄이는 자립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박희범이 이러한 이론을 주장했던 근간에는 냉전 이데올로기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해야 하며 따라서 대미 자주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서를 통해 "미국의 대한 정책은 한국에 대한 소비 시장화, 일본을 위한 예속화 작업이었다"[각주:8]라고 비판하며, 공업화를 가능케하는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배양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또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을 발달시킨 선진 산업국가에만 유리하다고 생각하며, 신고전파 자유주의경제는 선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적 비교 생산비의 원리처럼 국제분업의 원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 자립경제는 국제수지의 균형을 달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공업화, 즉 내포적 경제성장을 노리는 것"[각주:9]라고 주장하며, 현재의 비교우위에 고착화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166)

- 수입대체와 내자 동원의 강조 → 통화개혁과 산업개발공사 


  • 경제기획원,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56-59쪽

  • 당시 군사정부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 외자의존을 줄이고 내자동원을 강조했다


박희범과 군사정부가 공유했던 생각은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에서 구현되었습니다. 


이 안에서 군사정부는 수출산업 육성 보다는 종합제철소 건립 등 기초적 생산재의 수입대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에 수출증대는 6대 계획의 중점 중 5번째에 언급될 뿐이었습니다. 수출에 있어서도 2차 산품인 공산품이 아니라 1차 산품인 농업 생산물이 강조되었습니다. 


또 다른 주목할 특징은 '내자 동원의 강조' 입니다. 위의 표에서 나와있듯이 계획된 내자 비중이 약 75%에 달하는데, 박희범과 군사정부는 외자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 내자 동원에 힘을 쏟았습니다. 

 

계획 달성을 위해 군사정부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통화개혁' 이었습니다. 1962년 6월 9일 밤 10시 긴급통화조치법이 기습적으로 발표되며 예금동결이 이루어졌고, 동결된 예금은 6개월 내에 산업개발공사 주식으로 대체될 계획이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는 내포적 공업화론을 주장했던 박희범의 생각이 응집된 기관이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 운용 계획안은 투자 대상으로 약 40종류를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유공장 · 비료공장 · 종합제철공장 · 시멘트공장 · 종합기계공장에 우선순위"[각주:10]를 두고 있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는 기초적 생산재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고, 통화개혁과 예금동결 통해 획득한 국내 자본을 동원하여 산업화를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내포적 공업화 전략과 통화개혁 그리고 산업개발공사를 통한 종합제철소 건립은 하나로 연결된 묶음이었습니다.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자원의 동원 방법에 관해 상대적으로 대규모의 내자 동원에 관한 획기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희생해서라도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강제적 자원 동원이 있어야 당초의 계획대로 기간산업을 건설할 수 있고 그래야 빠른 시일 안에 자립적 국민경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내자 동원이 순조롭지 않은 가운데 통화개혁과 같은 혁명적 내자 동운 방법을 구상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이와 같이 모아진 자금을 산업개발공사라는 준 국유기업에 집중시키는 방법도 내포적 공업화론자들이 구상하는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자원 동원과 일치"[각주:11] 했습니다. 




※ 외화 부족으로 인한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통화개혁과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둘러싼 미국의 반대

- "비교우위론에 어긋나는 제철소를 왜 건설하려 하느냐"


자립경제와 내포적 공업화를 위해 제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시행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흔들리게 됩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의 입장이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제1차 계획이 목표로 한 경제성장률 7.1%가 너무 높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또한 통화개혁을 통한 예금동결이 경제를 국유화나 통제경제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시했습니다. 더 큰 쟁점은 종합제철공장 건설 계획이었습니다. 1962년 당시에 쓰여진 기사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AID가 본 한국공업건설 (上 제철소의 경우)>


경제5개년계획을 특징지으고 있는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그러기에 기자는 워싱턴에 닿자마자 AID가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타진해보기 위하여 AID의 문을 두드렸다. (...)


기자가 AID 당국자들과 만나서 얻은 결론은 제철소는 사무적으로는 절대로 무망한 것으로 느껴졌으나 정치적으로 배려를 한다고 하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비료공장은 AID가 주장하는 바 과인산질소 배합비료 공장을 세우는 데 한국측이 동의한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거부하교 요소 25만톤 용량을 만든다는 종래의 주장을 견지한다면 이 역시 AID에서 돈을 꾸지 못할 것이라 것이다.


AID는 대체로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① 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 탄 6천 칼로리 이상나는 역청회 등 제철에 필요한 자연자원이 극히 빈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50% 이상의 철분을 가지고 있는 철광석의 매장량은 지난번 탐광에 의해서도 겨우 5백만톤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이 나왔으니, 그처럼 빈약한 자원을 상대로해서 연간 25만톤의 제철소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는 것이다. (...)


② 그러니까 한국서 제철을 하자면 외국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사오지 않을 수 없는데 철광석을 100만톤, 석탄을 150만톤을 사오자면 적어도 3,500만불의 외화를 매년 지출하여야만 할 것이니 4,200만불의 수출실적 밖에는 못 가지 한국의 외화사정 아래서는 이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물론 철광석과 석탄도 연불 등 상업차관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기도 하나 AID 규정은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차관을 받는다는지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기로 되어있으므로 상업차관에 의한 원료 공급도 안된다는 것이다. (...)


③ 설령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준다고 해도 철의 시장경쟁은 지금도 치열하지만 장차 더욱 더 백열전을 전개할 것이니 과연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경쟁에서나마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데는 의문이 짙다는 것이다. 일본도 비록 철광석도 석탄도 사다가 쇠를 녹이고 있다고 하나 경영기술에 있어서나 작업기술에 있어서나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일본과 같은 생산비로서 제철을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


⑤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제철소를 만들려면 적어도 1억 5천만불을 들여야 할터이니 그 돈을 다른 산업들 한국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세우는데 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는 것 같다. 


- 이동욱, 1962년 10월 20일, 동아일보 칼럼/논단

- 네이버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지금 시점이 아닌 당시로 돌아가서 감정을 대입해서 보자면 상당히 비참한 상황 그 자체였습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제1차 계획이 담고 있던 내포적 공업화론 달성의 핵심인 종합제철소 건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격하게 표현하면 "주제 넘으려 하지 말고 수입해서 써라"나 다를 바 없습니다.


미국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이유는 크게 2가지 입니다.


첫째, 한국의 제철소 건설 시도가 비교우위 원리에 벗어난다 입니다. 


제철소는 원자재인 철광석과 석탄 등을 제련하여서 철판을 만드는 곳인데, 한국은 원자재를 풍부하게 가진 국가가 아닙니다. 헥셔-올린의 무역이론[각주:12]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relative abundant resource)을 가진 국가가 그 자원이 집약된 산업(resource-intensive)에 비교우위를 가지는데, 한국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찌어지 철판을 생산한다고 해도 과연 일본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겠냐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일본은 70년전부터 제철소를 운영하며 획득한 기술수준으로 낮은 생산비를 유지하는데, 이를 한국이 수년내에 따라잡기 힘들거라는 전망이죠.


둘째, 제철소를 건설하고 철광석 등 자원을 수입하기 위한 외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때 당시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은 국내자본 동원을 강조하였는데, 종합제철소와 같은 큰 규모의 기반시설을 짓기 위해서는 국내자본만으로는 턱도 없었습니다. 당시 군사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2차산업 공업화를 위해 필요한 외자비중을 43.4%로 전산업 평균 25%에 비해 높게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수출주도체제가 아닌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기 어려웠으며, 미국마저 차관지원을 거부한 상황에서 필요한 외자를 마련하기가 불가능 했습니다. 어찌어찌 제철소를 건설한다고 해도 차후에 철광석 등 원자재를 수입할 외화도 없었습니다.


결국 종합제철공장 건설 계획의 좌절은 내포적 공업화 전략이 실패하고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군사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 · 보완 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의 전환

- 1964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 → 공산품 수출 계획을 늘리다

- 1963년 면방직산업 수출증대가 경제관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산업정책 · 경제발전 관점에서 수출진흥 정책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


결국 박정희정권은 1962년 1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작업에 착수합니다. 


집권세력은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내포적 공업화 보다는 수출증대를 통해 외화를 획득할 필요성을 이전에 비해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자립경제를 주장했던 박희범 등이 물러나고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주장한 경제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2월 이른바 '보완 계획'을 확정발표합니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원계확과 보완계획에 담긴 수출 계획 비교

  • 원료별 제품, 이른바 공산품 수출계획이 대폭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출처 :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원계획과 보완계획의 차이는 '수출 계획'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원계획에서는 식량으로 대표되는 1차 산품이 수출 계획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지만, 보완계획에서는 원료별 제품, 이른바 공산품의 수출 계획이 대폭 상향되었습니다. 


원계획에서는 1966년 공산품 수출액수 계획이 1천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보완계획에서는 4천3백만으로 수정되었죠. 해당년도의 수출비중을 살펴보아도, 공산품의 수출비중은 1964년 30%, 1966년 38%로 원계획보다 10-20% 포인트 상향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실제 공산품 수출 실적은 계획을 초과달성 하였고, 1970년에는 84%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경제관료들이 자신만만하게 공산품 수출 계획을 상향조정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63년에 공산품 수출 실적이 예상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경영·경제학자 서문석[각주:13] · 최상오[각주:14] · 김두얼[각주:15] 등은 1963년 공산품 수출 증가의 요인으로 면방직산업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서문석의 2009년 논문 <해방 이후 한국 면방직산업의 수출체제 형성>에 따르면, 당시 면방업계가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국내 면제품시장 수요감소로 과잉공급 상황이 초래되자 상품판로 확보를 위해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외국산 원면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로 면제품을 수출한 이후 그 대금으로 수입을 해오기 위해서 입니다.


면방업계가 수출증대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 결과, 1962년까지 전체 면포생산량 중 수출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에 불과했으나, 1963년에 20.6%로 대폭 증대되었고 1964년부터는 전체 면포생산량의 약 50% 가량이 수출용으로 생산될 정도로 수출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 한국의 GDP 대비 수출비중 추이. 1953~2017넌

  • 수출비중은 1953년 1.7%, 1964년 5.0%에 불과했으나, 이후 급속히 증가하였다

  • 출처 : 국가통계포털 KOSIS

 

이렇게 1963년 면방직 산업의 수출증대를 목격한 경제관료들은 영감을 얻게 되었고, 1964년에 내놓은 '보완계획'에서 공산품 수출 계획을 대폭 상향하였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단순히 수출계획만 높게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재정 · 금융지원 및 낙후된 생산시설 교체 · 사회기반시설 건설 등 산업정책적 관점에서 포괄적인 수출지원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수출지향 정책은 단순한 무역정책이 아닌 산업정책 및 경제발전 전략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0-50%를 오가며 높은 생활수준을 달성하는 제1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64년 중반에 제시된 수출진흥 종합시책과 1965년 확대 개편된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살펴보면서, 1960-70년대 박정희정권의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을 세세하게 알아봅시다.  




※ 각종 수출 지원 정책과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통한 규율 부과


1964년 6월 24일, 상공부는 간접적인 지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수출진흥을 촉진하기 위하여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만들어 발표하였습니다. 종합시책에는 ① 1964년도 수출 목표를 종전 1억 500만 달러에서 1억 2천만 달러로 상향 ② 수출진흥위원회 및 해외 주재 공관에 수출 책임 영업부과 ③ 수출 진흥 세제 우대조치 및 2억원 규모의 수출보조금 부활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수출진흥을 위해 재정·금융 지원이라는 당근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수출진흥위원회를 통해 수출 책임 영업이라는 규율(discipline)과 채찍도 구사한 점입니다. 


만약 정부지원 이라는 당근만 제시했다면 이것만 쏙 받아놓고 경영은 게을리하는 비효율적 기업이 양산될 수 있었을텐데, 정부는 수출 목표액 달성에 미달하는 기업은 차후 지원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엄격한 규율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규율 정책은 정부주도 정책이 초래할 수 있는 단점을 해소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번 파트에서 산업화를 위해 정부가 제시한 당근과 채찍을 살펴봅시다.



1960년대 초기의 수출지원 정책은 1950년대 후반보다 양적으로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위의 첨부된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부터 시행되어온 정책에 더하여 수출용 자본재 수입에 대한 관세 감면제도(1964년) 및 수출용 원자재 수입금융(1963년), 수출산업 육성자금(1964년) 등 재정 · 금융지원 정책이 추가되었습니다.



수출활동을 직접적으로 독려하는 수출보조금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 중반 수출불 당 보조금은 1원을 넘지 못했지만, 1961년과 1965년을 기점으로 큰 폭의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지원 정책에 그치지 않고 규율을 부과하는 역할을 한 것이 수출진흥확대회의 입니다. 수출 진흥 정책 심의기구로서 1962년 12월에 설치된 수출진흥위원회는 1965년 1월 대통령 직접 참석하고 결정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로 확대개편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1979년 동안 개최된 회의 총 152회 중 147회나 참석하면서 수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할 때 설정한 수출계획 이외에 매년 수출목표를 새롭게 책정함으로써 수출을 독려하였습니다. 매년 수출목표 성장률은 시기마다 24.1%~45.2%를 가졌고, 1975년과 197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과달성 하였습니다. 


수출진흥확대회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수출책임제' 입니다. 1964년 해외공관별로 수출목표를 할당하면서 시작된 수출책임제도는 1965년 품목별 · 해외무역관별 · 단체별(수출좝, 협동조합별) · 도별, 1966년 부처별, 1967년 수출공단별 · 은행별, 1970년 수출산업 시설재 수입업체 · 차관도입업체 · 외화다액 소비업체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연초에 제시된 수출할당액을 채워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부과된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매월 개최된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점검하였습니다. 상공부는 총량별 · 상품구조별 · 품목별 · 지역별 · 국가별 실적이 수출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지 보고하였습니다. 


이행에 소홀하거나 미달하는 기업에게는 재정 · 금융지원을 중단하고 심한 경우 경영권을 박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과 함께 주어진 성과책임 부여는 정부주도 정책이 초래할 수 있는 방만과 나태를 방지하고 수출진흥 정책의 효과를 최대한 극대화 하였습니다. 




※ 산업정책적 관점에서 실시된 무역자유화


한국이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 수출진흥 정책을 펼쳤다고 해서, 외화가 반출되는 수입은 장벽을 쌓고 꽁꽁 잠가둔 것은 아닙니다. 1967년 7월 상공부는 수입허가 품목을 규정해온 포지티브 리스트에서 이제 수입금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입을 자동승인 하겠다는 네거티브 리스트로 전환하는 등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독과점 품목 관세율이 높은 품목, 그리고 국내산업에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는 품목을 제외하고 64개를 금지 품목으로, 321개를 제한 품목으로 하는 네거티브 리스트를 책정했습니다[각주:16]. 전반적인 수입관세율도 점차 낮춰가며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커 온 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상공부는 이후 발간한 『상공정책 10년사』(1969)를 통해 무역자유화 필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개방경제 체제를 지향함으로써 그동안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온 국내산업의 체질 개선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해 수출 증진에 기여케 하는 것, 둘째 수입자유화 확대로 물가가 등귀하는 상품의 수입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국내 물가 안정을 기해 국내 소비자를 보호, 셋째 IMF 및 GATT 가맹국으로서 국제 교역 확대에 기여하려는 것[각주:17] 입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가 정말 개방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바라고 무역자유화에 찬성한 것만은 아닙니다. 정부가 의도한 것은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 입니다. 


1967년 11월 한국정부는 수입자유화 조치에 이어 탄력관세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탄력관세란 국내외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관세율을 탄력적으로 운용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입 증대로 국내산업이 어렵거나 국제수지가 악화될 때 임시적으로 관세율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보호하기 위한 산업과 관련된 품목은 높은 관세를 유지하거나 더 높이고, 수출품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 수입은 관세를 인하하였습니다. 또한, 국제경쟁력이 있는 국내산업의 체질 개선을 위해, 경쟁력을 갖춘 제품에 한해서 관세율을 인하하면서 체질 개선을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정부는 발전단계에 있는 산업은 보호하기 위해 외국상품을 수입금지 리스트에 올리거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외국상품 수입을 허가하고 관세율을 인하시켜 경쟁에 더욱 노출시키는 산업정책적 관점에서의 무역정책을 구사했습니다.




※ 산업정책의 정점 -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1973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 여러분들에게 경제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 시대에 들어갔읍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세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을 해야 되겠읍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늘어날 수 있읍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선진 국가가 될 수 없읍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등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범국민적인 과학 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읍니다. 이것은 국민 학교 아동에서부터 대학생,사회 성인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우리가 전부 기술을 배워야 되겠읍니다.


그래야만 국력이 빨리 신장하는 것입니다. 80년대 초에 추이가 100억 달러의 수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 상품 중에서 중화학 제품이 50%를 훨씬 더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조선,기계,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의 제품 수출을 목적으로 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읍니다.


- 출처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대통령 박정희, 1973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강조표시는 블로그 글쓴이 본인이 한 것)


한국정부 산업정책의 정점은 1973년부터 중점적으로 시행된 중화학공업화 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 "80년대 100억 달러 수출"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1972년 수출달성액이 18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꿈 같은 목표를 제시한 겁니다.


1973년 이전 중화학공업 육성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부터 추구했던 종합제철소 건설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재차 시도하였고(오늘날 포스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기간 중 석유화학단지를 울산에 조성하였습니다. 1960년대의 철강공업 · 석유화학공업 육성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밑거름이 됩니다.


박정희정권이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화를 더욱 중점적으로 추진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경제발전 도약을 위한 경제적이유. 둘째, 북한 무력도발 대응을 위한 군사안보적 이유 입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은 장기 수출계획으로 1981년 53억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1972년 수출달성액 18억 달러와 그동안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나름 합리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박정희는 1980년에 100억 달러 수출과 GNP 1,000 달러를 달성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공업 위주인 현재의 공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여기에 더하여,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미중 데탕트가 형성되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했습니다. 이에 한국정부는 자립 · 자주 국력 배양을 위해 방위산업을 포함한 중화학 공업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1971년 말 대통령 경제2비서실은 <공업구조개편론> 마스터플랜 수립에 착수하였고 1973년 1월 30일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을 최종적으로 내놓았습니다. 


공업구조개편론 (마스터플랜)

(...)

제1장 계획작성

1. 수출 100억불 1인당 GNP 1,000불을 목표로 한 국가 산업 기본 모델을 작성한다. (...)


제2장 이념의 도출


1. 주도업종의 선점


. 본 계획 기간에는 중화학공업을 주도 육성 업종으로 한다. 특히 기계공업을 집중 육성한다.

1)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구조를 구축했다. 중공업 유성을 위한 기초가 만들어졌다.

2) 종합제철 건설은 철강 관련 산업과 비철금속 등의 육성이 필요하다.


나. 일본에서는 57년부터 중화학공업 정책을 명백히 한 신장기 경제계획을 수립하여 오늘의 경제 대국으로 유도했다.

1) 일본의 중화학공업 정책의 배경은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수요의 탄력성이 높고 기술 진보가 빠른 산업이라는 데 있었다.

2)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 후 10년 만에 수출 100억불의 고지를 점령했다.


다. 중화학공업 정책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시기를 놓친다.

라. 주도업종으로서의 중화학공업과 병행하여 수출 특화산업은 계속 강화 육성한다,


2. 중화학공업

가. 중화학공업의 확대는 세계경제 및 무역확대의 기본 방향이다.

나. 중화학공업 중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할 업종은 ① 기계류 ② 조선 및 수송기계 ③ 철강 ④ 화학 ⑤ 전자공업이다. 이것은 화학 플랜트, 발전소, 조선 및 자동차 공업과의 유기적 결합이 필요하다.


(...)


- 김광모, 2015, 『중화학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에서 재인용


<공업구조개편론>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당시 박정희정권은 1950-6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화 성공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일본은 1956년 수출액은 24억 달러에 불과하였지만 신 일본연도 개조론이란 정책하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여 196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정부는 집중육성 업종으로 선정한 ① 기계류 ② 조선 및 수송기계 ③ 철강 ④ 화학 ⑤ 전자공업 등을 실제로 키우기 위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미 건설해놓은 포항 제철소는 확장하여 북한보다 4.2배의 압연능력을 갖추고, 조선소는 울산 이외에 거제에도 추가 건설하여 세계 5위권내 조선강국으로 발돋움 하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여천(여수)에는 제3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여 세계 10위권의 생산능력을 1980년대 상반기까지 갖추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창원에 대단위 종합기게공장을 건설하여 기계류 및 대형플랜트의 완전 국산화와 원자력 발전설비 및 건설 중장비의 국산화를 추구했습니다. 구미에는 대규모 집적회로 등 최첨단기술의 전자부품 국산화와 가정용 정밀전자 기기 생산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대성공으로 돌아왔습니다. 1980년 목표 수출액은 100억 달러였는데 이를 3년이나 앞당겨서 달성하였고, 목표 1인당 GNP 1,000달러는 1979년에 성취하였습니다. 


1979년 수출상품 중 90% 이상이 공산품이었으며, 공산품 중 42.6%는 중공업 제품이었습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 시행 이전, 한국경제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8.9%에 불과하였으나 1979년에는 54.7%로 급등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중화학공업은 한국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포항 제철소, 울산 조선 · 자동차 · 화학, 광양 및 여수 제철소와 화학단지, 구미 전자단지 등 중화학산업은 지역경제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요근래 조선 · 자동차 업황부진으로 인한 영남지역 고용쇼크는 이들 업종이 지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한민국


이렇게 대한민국은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추진하였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1980년대 초반 발생했던 외채위기 속으로 중남미[각주:18]와 함께 빨려 들어갔을텐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되었습니다.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간단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글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2가지 물음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첫째, 중남미와 달리 당시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를 선택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 


한국이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외화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종합제철소 건설 등 공업 ·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계·생산설비 등 자본재(capital goods)를 수입해와야 했는데 국내자본으로는 턱도 없었습니다. 1962년, 내포적 공업화론자들이 시도했던 '통화개혁을 통한 내자 동원'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런 상황에서 1963년 면방직산업의 획기적인 수출량 달성은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제 경제관료들은 '공산품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 가능성에 자신감을 품게 되었고, 수출진흥 산업화로 방향을 선회한 보완 계획이 1964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외화 부족에 직면한 한국이 대내지향 정책 대신 대외지향적 수출진흥형 산업화를 선택했다"는 논리는 무언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경제발전 초기 중남미 또한 외화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남미는 오히려 '외화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각주:19] 했습니다. 


이들은 "1차 상품 생산국인 우리는 수출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했고, 외환 소득이 언젠가는 부족해질 것이기 때문에 자본재를 다른 나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중남미의 선택은 '자본재를 국내에서 생산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요인이 충분조건으로서 수출진흥형 산업화를 유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정책 선회는 단순한 외화 부족 이외에 여러 요인과 상황들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학자 기미야 다다시[각주:20]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이 좌절된 상황에서 남아있는 것을 고른 '잔여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반면, 박태균[각주:21]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수출진흥체제가 시작"되었다고 바라봅니다. 


이완범[각주:22]은 "미국은 수출을 통해 국제수지 균형을 회복한다는 축소 균형적 생각을 했을 뿐, 수출지상주의는 수출을 통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확대균형적 발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출드라이브는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독창적 현실인식이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하며, 박정희의 공로를 강조합니다. 


반면, 최상오[각주:23] · 김두얼[각주:24] 등은 "(박정희정권 수립 이후 수출이 촉진되었다는 설명은) 1960년대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세력이 제시한 역사관"이며 "민간과 정부는 이미 1950년대부터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고, 정확히 어떤 요인이 충분조건으로서 기능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충분조건으로 작용하는 요인은 애시당초 없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수록 "한 국가에게 성공으로 작용한 요인이 다른 국가에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대외지향 수출진흥 산업화를 통한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나,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나?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정부는 4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81)을 수립하면서 목표달성을 위해 민간부문을 독려하였고, 대통령은 매월마다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직접 참석하며 수출현황을 파악했습니다. 


수입금지와 높은 관세를 이용한 보호무역도 중점 산업을 육성하는데 성공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정부는 아직 경쟁력이 부족하여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산업은 수입장벽조치를 세워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시키지 않았고, 수출보조금을 통해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임이 분명한데, 왜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00% 보호무역체제나 100% 자유무역체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성공에는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불러오는 이점들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는 특정 기업을 선정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시장이 아닌 해외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만약 보호와 동시에 국내에 안주하게끔 하였다면, 기업의 생산성 정도가 아닌 정권과의 결탁여부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했을겁니다. 


또한, 자동차 · 조선 · 제철 · 전자 등 대형 산업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육성하였지만, 대외지향적인 정책이 아니었다면 좁은 국내시장 안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이들 산업은 초기 육성에 많은 고정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생산을 계속 증가시켜야만 비용이 감소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지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업이 경쟁을 뚫고 해외에서 판로를 개척할 수 있느냐가 성공더욱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는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도했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경쟁'과 '해외진출을 통한 시장크기 확대' 등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살려야 합니다

(주 : '무역이 가져다주는 보이지 않는 이익'을 수입대체와 수출진흥이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지난글 '● 무역이 가져다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implicit gain)' 참고


따라서 우리는 사고방식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야 합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vs.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는 국가의 산업정책 및 보호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이 둘은 별반 다른 게 없어 보이지만 현실 속 논의과정에서 큰 차이를 불러옵니다. 


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국가주도의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주장합니다. 과거 개도국이었던 한국과 오늘날 선진국인 한국의 차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 필요한 개도국과 경제강대국인 미국의 차이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산업 · 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를 우선 진단합니다. 과도한 국가개입은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나라가 국가주도 정책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도 똑같은 성공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남미와 한국의 사례에서 처럼 말이죠. 


두 관점의 차이는 이후에 살펴볼 [유치산업보호론]과 [1980년대 미국의 보호무역] 그리고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 내 무역논쟁]을 통해 더 극명하게 드러날 겁니다.




※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살펴보며 생각 넓히기 

- ① 수출로 외화를 많이 획득하는 것이 경제발전인가?


노파심에 한번 더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을 바로 잡겠습니다. 


이번글을 읽어나가면 "한국은 수출로 외화를 많이 획득해서 경제발전에 성공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람은 '외화 획득 = 돈의 축적 = 경제발전 성공'이라고 생각할테고, 탈피한 사람은 '외화 획득 = 외국으로부터 자본재 수입 가능 = 경제발전 성공'으로 이해하실 겁니다.


한국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동차 · 조선 · 제철 · 전자 등의 산업을 육성하고 싶어했습니다. 처음에 시도했던 건 국내자본(=내자)을 동원한 자본축적 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하여 선택한 방식은 외국으로부터 기계 · 생산설비 등 자본재(capital goods)를 수입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각주:25]했습니다.    


즉, 한국이 수출진흥형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고, 수출액 100억 달러 달성을 위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이유는 '수출로 획득한 외화를 이용하여 자본재를 수입해오기 위해서' 입니다. 단순 수출 증가를 통한 외화 축적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GDP 대비 수출액 - 수입액의 비중 변화 (1957~2017)

  • 한국은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하였다

  • 출처 : 한국은행 ECOS


만약 중상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박정희정권기 수출진흥 산업화 정책을 바라본다면, 과거 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수출을 촉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했기 때문입니다.


  • 총자본형성, 이른바 투자 증가율 (1957~2017)

  • 경제발전 초기, 한국은 막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자본축적에 매진하였다

  • 출처 : 한국은행 ECOS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해 중요한 건 경상수지 흑자 달성이 아니라 투자를 통한 자본축적 입니다. 한국은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와 해외로부터의 차입(=대외부채)을 활용하여 외국의 자본재를 수입하였고, 이는 곧 막대한 투자로 이어졌습니다. 1960-70년대 경제발전기 한국의 연간 투자 증가율은 20%를 넘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또한, '외국으로부터 자본유입 = 경상수지 적자'[각주:26]라는 경제학 공식을 이해한다면, 경제개발기에 '막대한 투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동시에 일어난 연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살펴보며 생각 넓히기  

- ② 비교우위론을 따랐으면 한국에 제철소는 없었다?


자, 이제 이번글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최종목적지에 왔습니다. 지금부터 다루는 이야기는 앞으로 소개할 [유치산업보호론] · [1980년대 미국 보호무역] · [전략적 무역정책 논쟁] 등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데이비드 리카도가 1817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을 통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의 이점'을 주장한 이래로 오늘날까지 비교우위론은 국제무역논쟁의 주요 쟁점이 되어왔습니다. 


특히나 비교우위론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이유는 "현재의 비교우위 부문에 영원히 특화해야 하느냐?"와 "그렇다면 현재 비교열위인 제조업을 육성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에 있습니다.  


1817년 당시 영국인 리카도가 "비교우위에 입각하여 제조업에 특화하고 곡물을 수입해야한다" 주장[각주:27]한 이유는 '토지의 수확체감에서 벗어나서 높은 이윤율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영국은 수확체감 특성을 지닌 농업이 아니라 수확체증 특성인 제조업에 이미 비교우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주장입니다. 

  

따라서 "영국과는 달리 제조업이 아닌 농업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는 무역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고, 이는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논쟁[각주:28] 1950-70년대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한 중남미[각주:29]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농업 · 원자재 등 1차산업이나 단순한 공산품 생산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는 영원히 이것에만 특화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조업 발달을 통한 산업화는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1950-60년대 한국 또한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부 초기 경제정책을 고안했던 박희범이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추진한 배경에도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을 발달시킨 선진 산업국가에만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1964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정 이후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한 이후에도, 한국은 비교우위론을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1970년대 시행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오늘날 전자 · 자동차 · 조선 · 제철 등등 모든 산업은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육성되었습니다. 즉, 한국은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을 따라서 경제발전 경로를 밟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한국이 비교우위론을 철저히 따라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지 않고 1차산업이나 단순 공산품 생산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봅시다. 


1962년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포기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종합제철공장 건설 좌절' 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1962년에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통해 제철소 건립을 내놓았는데,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상황을 보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기자 문구를 다시 살펴봅시다.


<AID가 본 한국공업건설 (上 제철소의 경우)>


▶ AID는 대체로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


▶ 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 탄 6천 칼로리 이상나는 역청회 등 제철에 필요한 자연자원이 극히 빈곤 (...) 빈약한 자원을 상대로해서 연간 25만톤의 제철소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


▶ 철광석을 100만톤, 석탄을 150만톤을 사오자면 적어도 3,500만불의 외화를 매년 지출하여야만 할 것이니 4,200만불의 수출실적 밖에는 못 가지 한국의 외화사정 아래서는 이 역시 불가능


▶ 설령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준다고 해도 철의 시장경쟁은 지금도 치열하지만 장차 더욱 더 백열전을 전개할 것이니 과연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경쟁에서나마 견딜 수 있겠느냐


▶ 일본 (...) 경영기술에 있어서나 작업기술에 있어서나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


- 이동욱, 1962년 10월 20일, 동아일보 칼럼/논단

- 네이버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미국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이유에는 "한국의 제철소 건설 시도가 비교우위 원리에 벗어난다" 라는 논리가 뒷받침 되어 있었습니다. 비교우위가 아닌 산업에 특화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당시 비교우위를 가진 산업에 특화한 뒤 비교열위인 철을 수입하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날 한국은 세계 1위 제철소로 평가받는 POSCO(구 포항제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60년대 초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종합제철소 건립을 시도하였고, 한일수교 이후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포항제철을 설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한국의 제철소 건립 과정은 '비교우위론'과 '유치산업보호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후자의 정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타난 이유에는 '비교우위론이 정태적 우위(static advantage)만 고려하여 특화를 결정'케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이 제철소를 건립한다면 향후 철강업종에 비교우위를 띄며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데(dynamic advantage), 비교우위론은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 현재의 상황만 따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당시 일본이 한국에 비해서 철강산업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 연유는 선천적으로 제철기술이 뛰어나거나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일본이 한국보다 70년 일찍 철강업을 시작한 역사적 배경 덕분(historical accident) 입니다. 반대로 한국이 일본보다 일찍 제철소를 건립했더라면 1960년대 당시의 비교우위는 한국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철강산업을 보호하면서 육성하면서 70년이라는 시간을 따라잡으면, 장기적으로는 일본보다 경쟁력 있는 제철소를 보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을 따라잡는 동안에 한국 제철소는 큰 손실을 보겠지만, 정부보조를 받아서 버틴다면 언젠가는 우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지금 제철산업에 비교우위가 있느냐"를 따지기 보다는 "향후 제철산업에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느냐"라는 물음을 던져야 마땅합니다. 한국정부는 후자의 물음을 던진 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어느 경우에나 비교우위론을 탈피한 이후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경제발전 달성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1960년대 비교우위론을 따르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결국 세계 제1위 제철소를 보유하는데 성공한 한국의 특수한 사례를 기억하십시오. 


앞으로 다음글 [유치산업보호론]을 통해, 어떤 경우에 유치산업보호론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국정부의 시도가 다행히도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겁니다.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1.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http://joohyeon.com/171 [본문으로]
  2.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3.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4.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5.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①]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 수입관세를 부과하여 수확체감과 교역조건 악화에서 벗어나자http://joohyeon.com/268 [본문으로]
  6.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7. 수출확대를 통해 대외로 뻗어나가는 '외연적 산업화 전략'(extensive)과 대비되는 의미 [본문으로]
  8. 박희범, 1968, 한국경제성장론 71쪽.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정부의 선택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9. 박희범, 1968, 한국경제성장론 81쪽.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정부의 선택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0.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4장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1. 통화개혁을 둘러싼 정치과정 [본문으로]
  11.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4장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1. 통화개혁을 둘러싼 정치과정 [본문으로]
  12. [국제무역이론 ②] 1세대 국제무역이론 - 헥셔&올린의 보유자원에 따른 무역http://joohyeon.com/217 [본문으로]
  13. 서문석, 2009, 해방 이후 한국 면방직산업의 수출체제 형성 [본문으로]
  14. 최상오, 2010, 한국에서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의 형성과정 - 1960년대 초 이후 급속한 수출 성장 원인에 대한 일 고찰 [본문으로]
  15. 김두얼, 2016,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경제성장의 기원, 1953-1965 [본문으로]
  16. 기미야 다다시, 2008, 한국정부의 선택에서 인용 [본문으로]
  17. 기미야 다다시, 2008, 한국정부의 선택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8.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19.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20.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본문으로]
  21. 박태균, 2013, 원형과 변용 [본문으로]
  22. 이완범, 2006, 박정희와 한강의 기적 [본문으로]
  23. 최상오, 2010, 한국에서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의 형성과정 -1960년대 초 이후 급속한 수출 성장 원인에 대한 일 고찰- [본문으로]
  24. 김두얼, 2016,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경제성장의 기원, 1953-1965 [본문으로]
  25. [경제학원론 거시편 ⑥] 외국의 저축을 이용하여 국내투자 증가시키기 - 경상수지 흑자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http://joohyeon.com/237 [본문으로]
  26. [경제학원론 거시편 ⑥] 외국의 저축을 이용하여 국내투자 증가시키기 - 경상수지 흑자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http://joohyeon.com/237 [본문으로]
  27.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http://joohyeon.com/265 [본문으로]
  28.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①]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 수입관세를 부과하여 수확체감과 교역조건 악화에서 벗어나자 http://joohyeon.com/268 [본문으로]
  29.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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