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④]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외환위기 ④]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Posted at 2013. 11. 11. 02:48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1997년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의 회고록 중 일부.
● 97년 7월 8일 : 태국, 금융위기에 몰리다
- 모든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이던 7월 초, 난데없이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을 거듭하고 (...) 신문 지면은 우리나라도 당장 그 금융태풍에 휘말릴 것처럼 온통 우려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나-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태국과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97년 7월 27일 : 태국 위기 남의 일 아니다
-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대외신인도를 예의 주시하면서 대책 강구가 필요했다. 특히 신용도가 괜찮은 은행들이 해외로 나가 달러를 많이 빌려 외환보유고를 많이 쌓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 97년 9월 8일 : 태국과 한국은 다르다
- 나-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태국과 한국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선 경제의 기초여건이 달랐다. (...) 무엇보다 태국은 역외 금융시장을 육성한다는 명분 하에 금융시장이 완전개방되어 있어 헤지 펀드 등 단기 투기성 자금의 유입이 용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증권시장 일부만 개방되었을 뿐,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견해는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이었다.
● 97년 9월 20일 :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의 대문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뒤에 있는 쪽문으로 나가서 저지른 일이 집안 전체를 뒤흔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 97년 10월 17일
- 동남아 통화위기가 10월 중순에 들면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 97년 10월 23일
- 홍콩 증시 폭락 사태로 또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계 증시가 모두 출렁이는 것이어서 우리도 그런 충격파 속에 함께 놓여진 것으로 생각했지,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치닫는 길에 들어섰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79-287
1997년 7월~10월 사이 강경식은 '무관심 → 당혹 → 자신감 → 당혹 → 위기감 → 패닉' 의 심경변화를 보여준다. 7월 태국 외환위기가 발생했을때 우리나라와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다가 '은행 해외지점들의 외환차입금' 통계를 알고난 뒤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9월 들어 다시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 자신감을 가지게되고 '금융시장의 낮은 개방도' 를 이유로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이 심각한 문제임을 9월 20일에 인지하게 되고, 10월 중순 들어서 대만 · 홍콩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우리나라 통화가치 하락이 가속화되자 패닉에 빠져든다.
1997년 동아시아경제와 한국경제에 구체적으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은행 해외지점들의 외환차입금'과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은 또 무엇일까? '금융시장의 낮은 개방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이번 포스팅을 통해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자.
※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으로 인한 단기외채 유입증가
- 기업 : 무역신용성 외환거래 → 단기외채 비중 증가
- 은행 : 해외지점을 통한 단기외화 차입
- 종금사 : 단기로 조달해온 외화를 장기로 운용 → 만기구조 불일치 발생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에서 살펴봤다시피, 1990년대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 · 금리자유화 등의 금융자유화 정책 financial liberalization 을 시행했다. 금융자유화 정책의 또다른 내용은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정부는 금융기관 및 기업의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에서도 다루었던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대칭적 규제'가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에서도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경제는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단기자본의 도입보다 장기자본에 대한 도입에 더 많은 규제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와 '비대칭적 규제'는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차입금리가 낮은 단기외화를 위주로 차입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두열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1998) 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 단기외채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96년 58%에 이르렀다 1. 만기구조가 짧은 단기외채는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웠다.
종금사의 부실문제와 더불어 경제에 있어 ‘약한 고리’를 형성한 것으로서 대외부채의 단기화이다. 이는 1990년대에 있어 세계화 추진 및 OECD 가입을 위한 조급한 자본자유화의 과정에서 미숙한 정책으로 인하여 제도적으로 단기자본의 도입보다 장기자본에 대한 도입에 더 많은 규제가 남아 있게 된 데서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외국환관리규정에 단기외화차입에 대해서는 규제가 없는 반면 장기외화차입에 있어서는 재경부 장관에 대한 신고 및 사전보고 의무가 존재함에 따라 금융기관들이 규제가 없고 차입금리가 낮은 단기외화를 위주로 차입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표 5-38>에서 우리 나라의 외채구조 변화를 보게 되면 1992년까지 우리 나라 전체외채 428억 달러 중 단기외채는 185억 달러로서 전체의 43% 수준에 머무르던 것이 1994년을 계기로 53%, 57%,58%로 계속 상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9-210
구체적으로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단기외채를 늘렸을까? 기업부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환거래 자유화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의 <90년대 환율정책과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분석: 외환위기의 정책적 원인과 교훈>(1998) 에 따르면, 당시 기업들은 무역신용을 경로로 하여 단기외채를 조달해왔다.
외환정책당국은 기업의 외환거래의 경우 우선적으로 실물거래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무역신용성 외환거래를 자유화한다는 방침에 따라 1990년대중 지속적으로 세부정책조치를 단행하였다. (...) 외환정책당국은 1990년대중 매년 계속하여 기업의 연지급수입기간 및 수출선수금의 영수한도를 증가시키며 무역관련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왔다.
<표 10>은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채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 10>을 보면 우선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채는 1992년의 61억달러에서 1996년에는 220억달러로 급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환거래규제상 기업은 무역신용성 외채 이외에는 단기외채를 보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무역신용성 외채의 증가는 그대로 기업의 전체 단기외채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표 10>이 보여주는 무역신용성 외채의 급증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무역신용성 외채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또는 바꿔 말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따른 무역신용규모의 증가를 반영한 것이었는가? 만일 이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이 외채의 증가는 외환유동성 위험의 상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문제시할 현상이 못된다.
그러나 곧 밝혀지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무역신용성 외채가 급증한데에는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따른 무역신용규모의 확대를 반영한 것도 있겠으나 일정 부분은 기업이 무역신용을 경로로 하여 기타 용도의 자금조달원으로 이용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신인석. 1998. '90년대 환율정책과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분석: 외환위기의 정책적 원인과 교훈'. 『한국개발연구원』. 44-46
1990년대에 들어서 은행들의 단기외채 the short-term external borrowing 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속 Wang Yunjong의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2001)의 Table 3를 보면, 1990년대 한국으로의 자본유입 Capital Inflows 중 상당수가 은행을 통해 발생 Foreign Credits to Bank 했다. Table 4를 보면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1996년 중 대외부채 External Debt 의 66.7%가 금융부문 Financial Sector 의 부담이었고, 단기외채의 비중은 61.0%에 달했다.
< 출처 :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6-17 >
은행들은 주로 해외지점 overseas branches 을 통해 단기외채를 들여왔는데, 그 비중이 국내지점에 맞먹었다. 금융자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은행들은 해외지점을 늘렸는데, 금융시장 개방과 자율화에 상응하는 준비태세와 대응전략이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채 무분별한 영업확대 및 해외진출 확대를 한 것이다.
< 출처 : 재정경제원. 1998.01.30. '1997 경제위기의 원인 · 대응 · 결과'. -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부록 571쪽에서 재인용 >
< 출처 :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7 >
As also found in Table 3, the major portion of the increase in foreign capital inflows was the short-term external borrowing by the banking sector. Consequently, the short-term external debt grew much faster than long-term debt throughout the years, and the financial sector became the major holder of external debts. Out of the total increase in external debt during the three years (1994-96), the banking sector explains about 70 percent. The remaining 30 percent reflect growth of the corporate sector's external debt, mainly related with trade credits.
In fact, short-term foreign currency liabilities of the Korean banks were much larger than reflected in capital inflows. As part of the liberalization measures, banks were allowed to open and expand operations of overseas branches. By exploiting the foreign capital channeled through overseas branches, banks actively operated foreign currency denominated business through domestic branches. This resulted in large foreign currency liabilities of overseas branches comparable to those of domestic branches as vividly shown in Table 5.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6-17
기업 · 은행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종금사의 외화차입증가 이다.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은 단지 금리가 싸다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단기외화를 들여와서 장기로 운용하였다. 1997년 10월 기준 종금사들의 총외화차입금은 약 200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 중 1년 미만 단기차입이 64.4%인 13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종금사들은 단기로 조달해온 외화차입금 대다수를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로 운용했는데, 1년 이상 장기대출 비율은 83.7%인 168억 달러에 달해 엄청난 자금만기구조의 불일치 maturity mismatch 가 발생했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표 5-41>을 보면 1997년 10월 말 현재 종금사들은 단기로 129억 달러, 장기로 71억 달러를 조달하였는데 이 중 단기로 운용한 것은 32억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 167억 달러는 장기로 운용하여 심각한 차입대출의 기간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종금사들의 자산과 부채간 기간 불일치는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15
1982년 금융자율화 조치의 일환으로 32개까지 늘어난 단기금융회사는 1992년에 선발 8개 단자회사가 은행과 증권회사로 전환했고, 1994년 9개 지방 단자회사와 1995년 나머지 15개 단자회사가 무더기로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하여 우리나라는 30개나 되는 종합금융회사 천지가 되었다.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24개 전환 종합금융회사들은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차입하여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을 하였다. (...)
1997년 10월에는 종합금융회사의 총외화 차입금이 200억 달러까지 되었는데 그 중 1년 미만 단기차입이 64.4%인 120억 달러나 되었다. 위험한 단기차입금으로 1년 이상 장기대출을 83.7%인 168억 달러나 했으니 엄청난 자금만기구조의 불일치(maturity mismatch)가 생겼다. 한보철강 부도로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신규차입이 중단되자 7일 이내의 초단기 차입으로 하루하루를 넘기다가 기아자동차 사태가 터지고는 일일자금(over-night)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홍콩의 금융시장에서 종합금융회사들은 "금리, 금액, 기간을 불구하고 돈을 빌리려고 홍콩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떼거지" 라는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
종합금융회사는 Merchant Bank 이지만 bank라는 이름을 달고 다닌 종합금융회사의 행태와 자금난은 우리나라 모든 금융기관의 대외신인도를 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은행의 단기차입마저 끊기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결국에 가서는 IMF사태를 몰고 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종합금융회사가 도화선이 되어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11월에 우리나라에도 상륙하게 되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428-431
※ 19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 발생과 기아자동차 부도유예 처리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97년 한국경제는 금융자유화 이후 기업 · 은행 · 종금사의 단기 외화차입금을 증가하여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도 살펴봤듯이, 1994년-1996년 간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와 고평가된 원화가치, 대기업들의 과도한 부채와 한보철강 등의 부도로 인해 1997년 당시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기초여건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와중에 1997년 7월 태국을 시작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해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말레이시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확산을 본 외국투자자들은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도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나 7월에 발생한 기아자동차가 사실상 부도처리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월에 한보그룹(10위) 2 · 4월에 삼미그룹(26위), 진로그룹(19위) · 5월에 대농그룹(44위), 한신공영그룹(58위)에 이어 7월 기아그룹(8위)마저 무너지면서, 곧바로 신용평가기관들은 기아자동차에 대한 대출규모가 큰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하였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평가절하를 계기로 동남아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투자자들의 주의가 환기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7월 15일 기아자동차가 사실상 부도나 다름이 없는 부도방지협약을 신청하였다. 곧바로 신용평가기관들은 기아자동차에 대한 대출규모가 큰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하였으며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치러야 할 재정비용이 국내총생산의 20%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전망으로 인해 7월 30일 Moody's는 정부출자기관인 한국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을 하락시켰으며, 같은 이유로 8월 6일 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부터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국가신용등급 전망의 하향조정으로 말미암아 민간기업과 금융기관의 해외자금조달은 점차 어려워졌으며 차입조건도 악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7-8월중 산업은행 채권의 스프레드와 선물환율이 급등한 점에서도 볼 수 있다.
- 그래프 출처 :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4-35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23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외환위기를 수습했던 이규성의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2006) 을 통해서도, 동남아 외환위기 발생하고 기아그룹이 부도유예 처리된 1997년 7월 이후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국내금융시장 동향을 살펴보면, 금리에 있어서는 7월 15일 기아그룹의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된 후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이 상승하였으며 7월 중 평균으로 각각 11.41%와 11.86%를 나타냈다. 8월에는 동남아 위기의 영향과 우리 금융기관의 부실 우려 등에 따른 해외 차입여건의 악화로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은 각각 12.39%와 12.11%로 큰 폭 상승하였다. 9월에도 종합금융회사의 자금사정 악화와 기아의 화의신청 등에 영향을 받아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은 각각 13.17%와 12.36%로 상승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
금융기관의 해외차입 여건 역시 금융기관들의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인하여 장단기 자금차입 모두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은행들의 단기외채에 대한 만기연장 비율이 하락하는 동시에 가산금리는 대폭 상승하였다. 8월 12일에 일부 은행은 외화결제자금 부족으로 한국은행으로부터 7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또한 은행들의 장기차입여건도 악화되었다. (...)
종금사들도 급속한 대외신인도 하락에 따라 자체신용에 의한 외화차입이 어려워지면서 1997년 6월 이후 부족한 외화유동성은 주로 국내은행으로부터 조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7월부터는 국내은행의 외화자금 사정도 악화되자 초단기 차입에 주로 의존하였다. 특히 지방소재 종금사의 경우 외화조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중에는 원화자금으로 외화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25-26
1997년 7월 이후 경제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8월에 한국정부는 금융기관 부채의 지급보증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지급보증 선언은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켰다. 한국정부는 외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해왔는데, 과거에는 통했던 방식이 1997년에는 통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 한국경제 성장과정 - 정부의 지급보증을 통한 해외자본 도입
한 국가가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면 물적자본 physical capital 이 필요하고, 물적자본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 3하다. 박정희정권은 1962년 『외자도입촉진법』(the Foreign Capital Inducement Act) 을 제정함으로써 '정부의 지급보증 하에 외국자본 도입' 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돈이 없던 한국이 정부의 지급 보증하에 해외자본을 들여와 생산활동에 투입 4하였고 경제성장 달성에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윤제, 김준경의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1997) 에 따르면, 1962년-1966년 사이 한국경제 총투자의 53 퍼센트가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은 외국자본에 의해 동원되었다. 그리고 1975년 당시 국내은행 상업대출의 88 퍼센트가 정부의 지급보증 하에 동원된 외국자본 이었다.
The Allocation of Foreign Loans
Foreign Capital - especially foreign loans - played a large role in Korea's financial sector policy. As with domestic credit, the government also tightly controlled allocation of foreign credit. From 1962 to 1991, the ratio of total investment to GNP was 27.4 percent annually. Six percent was financed by foreign capital, primarily loans. Hence, approximately 22 percent of total investment during this period was financed by foreign capital. Between 1962 and 1966 (when the Korean economy began to surge), 53 percent of the total investment was financed with foreign capital. (Table 11).
Korean firms that wished to borrow abroad were required to obtain the approval of the EPB. The Board also determined the total amount of required loans according to investment priorities for projects and enterprises specified by the five-year economic plans. MOF closely monitored all approved foreign borrowings and their repayment. In addition, the government guaranteed virtually all foreign loans. In 1966 the government revised the Foreign Capital Inducement Act to allow banks to provide guarantees without approval from the National Assembly.
KEB (one of the specialized banks in Korea) and commercial banks could issue repayment guarantees for private foreign loans without authorization from the National Assembly. Since the government held the majority of shares in commercial banks, the KDB and the KEB, the government in effect provided their repayment guarantees. As such, the government could use the allocation of foreign loans as a policy tool for industrial financing, without political intervention. As of 1975, for example, domestic banks provided repayment guarantees for 88 percent of the total commercial loans (Table 12).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85-86
외화부채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은 1990년대에 들어서도 관행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에서도 살펴봤듯이, 한국 은행권은 외화부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출에 있어서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 상황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1997년이 되자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왔던 방식이 이제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 금융기관 부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선언한 한국정부
- 민간금융기관의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
1997년 8월 25일, 한국정부는 민간부문의 해외차입이 어려워지자 '금융기관 부채의 지급보증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종금사들이 자력으로 외화결제를 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8월 18일 한국은행이 보유고에서 5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게 된다 5.
97년 8월 25일(2) 대외신인도 대책
8월 25일 발표한 대책은 특융 등 부실금융기관에 대한 대책보다는 대외신인도 제고 쪽에 더 역점을 두었었다. 여기에는 대외신인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부가 금융기관의 대외 채무에 대해 '정부 신용으로 보장'하고, 특정 금융기관의 대외 지급 불능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필요시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다. (...)
핵심은 정부의 지급 보증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했다. (...) 7월 기아사태 이후 해외 금융시장에서는 우리 정부의 '구조적 문제 해결 의지'와 정책의 실천력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차입금리도 올라가는 추세였고 외화 확보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는 국내 은행의 신용 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필요하고, 정부 보증 정도의 강력한 의지표명이 있어야 금융시장 안정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나의 생각을 고집할 수 없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64
그리고 10월 22일, 정부는 부도상태에 처한 기아그룹을 산업은행 출자를 통해 구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킨다. 기아자동차에 대한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debt equity swap'로 번역해야 마땅한데, 일부 외신에서는 이를 'nationalization(국유화)'로 보도한 것이다. 기아의 부담을 국가가 떠맡는 것으로 해외에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한국경제 자체의 대외신인도가 하락한 것이다. 이때가 바로 민간금융기관의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6.
97년 10월 22일 기아 처리, 국내에선 대환영 해외에선 비판적
11시에 기아에 대한 법정관리 방침을 발표하자, 주가지수는 34.5포인트, 6.08%나 폭등했고 일거에 지수 600선을 회복했다. 이제 기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금융개혁법안 통과 7에만 힘을 기울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아문제를 처리한 날이 공교롭게도 홍콩 증시가 요동치기 시작한 바로 그 날이었다. 연속 폭락장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증시가 모처럼 상승세로 돌아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그 기대는 간단히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다음날인 23일에는 33.2포인트나 빠지는 폭락장세로 반전했다. 좀더 빨랐거나 오히려 며칠 더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홍콩 증시가 폭락하는 날과 겹친 것은 '최악의 택일(?)'이었다.
게다가 기아 처리에 대한 해외 논평은 매우 냉담했고 비판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경제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23일자 신문에서 "변화와 개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던 강경식은 기아 처리에 있어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기아를 '국유화'한 것은 한국이 미래에 번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혁과정에 있어서 엄청난 후퇴이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이러한 비판 중에는 사실도 있었지만, 내용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다. 그 하나는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debt equity swap'으로 번역해야 마땅한데, 일부 외신에서는 이를 'nationalization(국유화)'으로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취임 초부터 발표문은 항상 영문과 함께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있다. 해외에 대한 서비스 차원뿐 아니라, 이번처럼 발표 내용이 잘못 전달되는 불상사에 대비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발표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보니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만 것이다.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대주주가 없는 상황에서 기아문제를 처리해갈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러나 기아의 부담을 국가가 떠맡는 것으로 해외에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낭패를 보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기아를 '공기업 형태로 운영'한다는 발표문에도 문제가 있었다. 협력업체에 대한 원활한 자금 공급과, 불필요하게 '제3자 인수설'에 휘말리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국내용'이었는데, 해외에서는 기아를 '공기업화해서 살린다'라는 뜻, 즉 '국유화'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3자 인수 방침은 추후에 밝혀도 된다고 생각하고, 발표 당시에 이를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책이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91-293
19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에 이어 10월 기아그룹 부도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국제금융계는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지만,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국제 금융계에서 '신용'을 잃어버린 데 있다. 한보사태 이후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내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의 어느 금융기관이 선뜻 한국 기업이나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겠는가. 더욱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국을 시작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들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
우리가 '태국과 다르다'는 것을 강변하면 할수록 국제 금융가에서 자라나고 있는 한국 경제에 대한 의혹의 싹은 커져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특히 한국정부가 한보나 기아사태와 같은 당면현안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기초체력'만 강조하자 해외에서는 "한국 정부의 통제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지적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31-33
금융기관 부실을 지켜본 외국채권자들이 "한국의 금융기관이 부실처리 되면 지급보증을 했던 한국정부가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정부는 변제능력이 있는가?"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서 채무국 자체의 변제능력을 의심하게 된 외국 채권자들이 일순간 투자자금을 회수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부족한 투자재원을 전략산업에 집중투자하기 위해 정부가 금융기관의 운영을 시장기능에 맡기지 않고 직접 주도하여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민간금융기관들도 공기업처럼 인식되어 왔고,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금융기관의 부채는 관행적으로 정부가 보증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관행은 한편으로는 안정된 금융시장을 형성해 전례 없이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효율적인 과잉투자를 조장하는 문제점을 낳게 된다 8. (...)
이러한 과잉투자문제는 경제발전과 자본자유화가 진척되면서 더욱 심각해지는데,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정부의 금융기관 대출을 일일이 감시할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들은 자본자유화에 따라 저리의 해외자금을 차입하여 마구 기업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관행적인 정부보증을 믿었기에 외국 채권자들도 사업평가 한 번 하지 않고 선뜻 국내 금융기관에 자금을 빌려 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가 실패로 끝나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서 채무국 자체의 변제능력을 의심하게 된 외국 채권자들이 일순간 투자자금을 회수해감으로써 외환위기가 야기되었다는 것이 아시아 외환위기에 관한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9-10
※ 1997년 10월 23일, 동남아 외환위기가 동북아로 북상하다
정부의 지급보증선언 · 기아자동차 공기업화 논란과 더불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남아 외환위기의 북상이다. 공교롭게도 기아자동차 공기업화 논란 다음날인 10월 23일, 홍콩증시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외환위기가 동북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1997년 10월 17일, 대만이 외환시장방어 포기를 선언했고 ,10월 23일 홍콩증시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커지고 말았다.
10월 22일, 3개월 간의 실랑이 끝에 정부는 부도상태에 처한 기아그룹을 산업은행 출자를 통해 구제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가 바로 민간금융기관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인 10월 23일 홍콩의 주가가 폭락하였고, 이에 따라 외국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경제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10월 24일 S&P는 한국의 국가신용을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AA-로부터 A+로 하향조정하였고, 장기신용전망도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S&P는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에 대해 "이번 구제조치가 단기적인 압력을 완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임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라고 혹독히 비난하였다. 산업은행의 국채가격은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투자자들은 세계 11위 규모의 한국 경제가 멕시코와 같은 경제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걱정하였다.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 발표전에 128bp 였던 산업은행 채권 스프레드는 불과 열흘만에 269bp로 넓어졌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24
1997년 10월 23일을 기점으로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자금 회수로 인해 한국 외환시장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1997년 들어서 원화가치가 조금씩 하락하고 있긴 하였으나, 10월 23일을 기점으로 원화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2일 1달러당 915.10원이었던 환율은 23일 921.00원 · 24일 929.50원 · 27일 939.90원 · 28일 957.60원 · 29일 964.00원 · 11월 6일 975.00원 · 11월 10일 999.00원 · 11월 17일 1,008.60원 · 11월 25일 1,122.00원 · 12월 23일 1,962원까지 대미달러 환율이 치솟는다.
< 출처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는 1997년 10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래에 첨부한 외환보유액 그래프에 따르면 1997년 10월 말,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약 300억 달러로 나온다. 그렇지만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의 실제 외환보유고가 150억 달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50억 달러는 약 5주일분의 수입액 도는 단기외채의 5분의 1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 출처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 1997 한국의 외환위기의 원인
- 원화가치하락을 노린 투기적공격이 아니라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
앞서 논의됐던 내용을 종합하자면, 199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은 막대한 양의 단기 외화차입금을 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기아자동차는 부도유예처리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인한 논란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서 외국투자자들의 급격한 자금회수를 불러왔고 이는 원화가치 하락과 외환보유고 고갈로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전 포스팅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원화가치 하락을 노린 헤지펀드 · 핫머니의 투기적공격이 1997 외환위기의 원인일까?'를 통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발발한 "1997년 11월달 외환보유고 감소의 주된 요인은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이 아니라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 이었다." 라고 밝힌바 있다. '<표 7> 외환보유고 수요요인(1997)'를 보면 11월 중 외환보유고 수요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7>에서 환율요인에 따른 외환수요의 증가분을 가장 넓은 기준의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표에는 경상수지적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과 포함된 것의 두 가지 투기적 공격지표를 계산하여 놓았다. 두 지표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11월중 투기적 공격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의 14~20%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경상수지적자까지 감안한 광의의 투기적 공격 지표에 의거하면 9~11월중의 환율에 따른 외환수요요인은 1~3월에도 미달하는 규모였다.
두 기간의 차이와 11월 외환위기를 낳은 것은 환위험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고 따라서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볼 수 없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의 존재여부 9 였음은 <표 7>에서 명백하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26-27
그리고 1997년 11월달 외환보유고 감소의 주된 요인이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인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인지 여부는 외환시장에서 외환에 대한 수요 및 공급요인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표 6> 외환시장 수급요인 월별추이(1997)'을 살펴보면, 1997년 11월 들어 '외채감소액'이 증가 10하고'해외지점 예치금 증가액'이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났음을 뜻한다. 해외지점에 대한 국제채권은행의 채무상환요구가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에 의해 충족된 것이다.
< 출처 :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25 >
그렇다면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또한,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는 어떤 경로를 통해 발생했을까?
※ 국내금융기관 해외지점의 단기 대외지불부담액
-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 고갈의 주요원인
앞서 "해외지점 overseas branches 을 통해 단기외채를 조달한 은행들" · "종금사의 외화차입증가" 를 이야기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난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대로 199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은행들과 종금사는 해외지점을 통해 단기외채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외채통계에는 한국의 막대한 해외 현지금융이 제외되기 때문에 외채규모가 과소평가 된다.
박대근, 이창용은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1998) 을 통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그리고 이들의 현지법인이 차입한 역외금융차입까지를 포함시킬 경우 한국의 단기외채 지불부담은 1,000억 달러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단기외채 수치의 두 배에 달한다"(26) 라고 지적한다.
이규성 또한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2006) 를 통해 "1994~1996년간의 총대외지불부담금 및 순외채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미달러화 표시 경상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라고 지적한다.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의 외채통계는 세계은행(IBRD) 기준에 의거하여 작성되었으며, 세계은행 기준 외채는 공공부문, 민간부문 및 금융부문 등 우리나라 경제주체들이 국내로 도입한 외채총액 중에서 아직 상환되지 않은 잔액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해외채권자들로부터 우리의 외채통계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즉, 한국의 막대한 해외 현지금융도 외채통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IMF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금융 가운데서 금융기관의 해외점포가 차입한 금액과 국내금융기관의 역외계정차입금을 외채통계에 포함시키기로 하였으며, 이와 같이 정의된 광의의 외채를 총대외지불부담으로 명칭을 붙였다. 이러한 외채통계 작성 기준에 입각하여 추산된 우리나라 외채규모의 변화추이는 [표 2-4]에 제시되어 있다.
추산된 외채규모를 전제로 우리나라의 외채상환 능력을 분석해 보면, [표 2-5]에 제시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세계은행에 적용하고 있는 외채상환능력 평가기준의 어느항목에 비추어 보더라도 경채무국 또는 외채상환능력에 문제가 없는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를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1994~96년간의 총대외지불부담 및 순외채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미달러화 표시 경상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또한 1996년의 경우에는 경상 GDP 성장률이 해외차입 금리수준을 하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외환위기 직전의 우리 경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외채상환능력이 저하되는 시기에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59-60
다르게 말하면, 해외지점의 대외지불부담액을 포함할 경우 한국경제의 외환유동성 부족이 심각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인석의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1998)에 나오는 '<표 8> 외환유동성 추이'를 보면, 막대한 양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1996년 들어서부터, '국내금융기관 해외지점 단기대외지불부담'이 포함된 지표B가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경제는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 상태였다" 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 경제에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 문제가 존재하였는가? 또한 존재하였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는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표 8>을 작성하였다. <표 8>은 한국경제의 외환유동성 추이를 두 가지 지표로 제시한 것이다. 하나는 세계은행기준 단기외채(유동부채)에서 유동성이 높은 대외자산을 제한 '지표 A'이고, 둘째는 IMF기준 대외지불부담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여 계산한 '지표 B'이다.
<표 8>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과연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6년말 현재 지표 A,B 모두 양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 이 시점부터 잠재적으로 외환유동성이 부족할 수 있는 영역에 진힙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야기되기까지는 거시충격과 이에 대한 정책대응상의 오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표가 보이듯이 단기외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로의 자본유입이 증가한 것은 94년부터였으며 같은 시기 외환유동성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급격한 악화가 진행된 것은 지표 A에 의거할 때 명백히 96년이었고, 이는 물론 96년에 기록한 대폭의 경상수지 적자 11에 기인한 변화였다. 그리고 96년의 경상수지적자는 교역조건 충격으로 요구되었던 환율절하를 정책당국이 지연시킨 결과 12였다고 평가되므로, 그만큼의 외환유동성 악화는 거시정책대응 미숙에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셋째, 그러나 한국경제가 지니고 있던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의 크기는 해외지점의 대외지불부담 증가를 고려하지 않는 한 과소평가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96년 말에 있어서도 지표A에 의거하는 한 문제의 심각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1-32
당시 은행들과 종금사들은 대기업부실 13 · 7월 동남아 외환위기 · 정부의 지급보증 논란 등으로 외국투자자들이 급격한 자금회수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외화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7대 시중은행의 차환율 14은 10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다.
< 출처 :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7 >
은행들의 외환유동성 사정이 어렵게 되자 그 동안 은행에 의존해 오던 종금사들의 외환유동성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제 금융기관들은 해외지점이 보유한 단기대외지불부담금 결제를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1월 중 한국은행이 국내 금융기관에 당일 결제자금으로 외환을 지원한 현황은 아래 첨부한 [표 1-18]과 같다. 해외지점의 부족한 결제용 외환을 충당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은 11월 상반월에는 8.4억 달러, 하반월에는 80.9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해외에 예치하여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고에서 국내 은행의 해외지점에 예치한 금액이 11월 말에는 169.4억 달러로 대폭 증가하였다 15.
그 결과 한국은행의 가용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 50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금융기관의 해외지점에 예금한 외화인 해외예치금은 평상시라면 회수하여 외환보유고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외환위기가 시작되어 해외지점이 외환부족상황에 처함에 따라 사실상 사용불가능한 외환보유고가 되어버렸다.
< 출처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2 >
< 출처 :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9 >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은 "국내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의존하게 되는 시점을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표 11>과 [그림 5]에 의하면 인출사태는 11월 17일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한다.
<인출사태의 발생시점>
11월 국내금융기관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한국은행은 이들 금융기관에 외환을 공급하였고, 그 결과 (가용)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발적 자금공급자가 없어져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는 것을 인출사태로 정의할 때, 따라서 국내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의존하게 되는 시점을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이 사용한 구체적인 지원방법은 피지원은행에 대한 한국은행의 외화예금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 외화예금은 국내본점에 대한 수탁금은 '외화예탁금'으로, 국외지점에 대한 수탁금은 '해외지점 예치금' 으로 한국은행 계정상 분류되었는데, 따라서 외화예탁금과 해외지점 예치금의 합계치(이하 '예치금 합계치'로 약칭)는 11월 중 한국계 은행에 요구된 채권상환액에 대한 추정치를 제공해준다. 또한 그러므로 예치금 합계치의 일별추이를 관찰하면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을 가늠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같은 추론에 근거하여 예치금 합계치의 10~11월중 추이를 보인 것이 <표 11>과 [그림 5]이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인출사태는 11월 17일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14일까지 큰 변동이 없던 예치금 합계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었던 15, 16일을 지낸 뒤 뚜렷한 상승세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8-39
※ 정부당국의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정책? or 외환시장 미발전의 구조적문제?
앞서 살펴본대로, 1997년 11월 국내금융기관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한국은행은 이들 금융기관에 외환을 공급하였고 그 결과 (가용)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다. 게다가 원화가치하락을 막기위한 정부당국의 개입은 외환보유고 고갈을 가속화시켰다. 박대근, 이창용은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1998) 을 통해 "정부당국의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정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라고 비판한다.
1997년 당시의 외환보유고의 동향과 외환시장 개입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 '<표 8> 한국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을 살펴보면 1997년 4월~6월 들어 한보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외화유입이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7월 동남아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고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하고 11월부터는 감소폭이 커진다.
박대근, 이창용은 "10월 말 이후의 외환보유고 감소는 환율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외환시장 개입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외환시장이 외환수급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빠지자 통화당국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달러를 공급"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환율의 평가절하를 시장기능에 맡겼으면 외환보유고 감소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환보유고의 증감은 통화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표 8>은 1997년 한 해 동안 한국은행의 현물 및 선물시장 개입규모와 외환보유고 및 외화예탁금 증감액의 월별 변화를 보여준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97년 1사분기에 정부는 원화의 절하를 막기 위해 달러를 매도하였다. (...)
통화당국의 달러화 매도개입은 4월에 들어서면서 매수개입으로 바뀌고 이에따라 6월까지는 외환보유고가 증가한다. 4-6월은 한보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외화유입이 다시 재개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달러를 매수함으로써 원화의 절상을 막아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면서 1사분기에 감소한 외환보유고를 재충전하였다. 그러나 7월 이후 동남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본유출이 시작되자 환율의 급등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달러화 매도개입을 재개하였고 그 규모는 9월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0월 말 이후의 외환보유고 감소는 환율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외환시장 개입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도 하락으로 해외신규차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외채 원리금 상환에 필요한 외화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 외환시장에서 외환을 구매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원화절하에 대한 기대로 달러의 공급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에 따라 외환시장 개장과 함께 환율은 일일변동제한폭의 상한까지 상승하고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외환시장이 외환수급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빠지자 통화당국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달러를 공급하였다.
이와 같은 외환시장 개입은 외환보유고를 감소시켰고, 그 결과 대외신인도가 추락하여 자본유출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명확해진 시점에서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시장평균환율제도를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귀중한 외환보유고를 낭비한 셈이다. 사후적으로 볼 때 환율방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진 시점이었기에 당연히 환율의 평가절하를 시장기능에 맡겨 놓았어야만 했다. 1996년과 1997년 상반기까지의 외환시장 개입은 옳든 그르든 그 나름대로의 정책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10월 이후 이루어진 외환시장 개입은 상황을 오판한 정책실패로서 외환위기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은 "IMF 이후 환율변동제한을 없앤 다음에도 외채상환을 위한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대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보유고가 그렇게 급감하게 되었던 것" 이라고 항변한다. 일반적인 외환시장은 가격(환율)이 변화할 때 외화 공급과 수요가 늘거나 줄어들면서 균형을 맞추지만, 당시 한국의 외환시장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시장 기능이 작동하는 '외환시장'이 아직 없다는 것이 재경원 실무자들의 생각이었다. 시장이 되려면 가격(환율)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탄력적으로 늘기도 줄기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외환시장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IMF 이후 채권시장, 부동산시장 등이 많이 개방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환율이 올라간다고 해서 달러를 들여와 원화로 바꾸어도 주식투자 이외에는 운용할 데가 없고, 환율이 아무리 올라가도 외채 상환을 위해서는 달러를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IMF 이후 환율변동제한을 없앤 다음에도 외채상환을 위한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대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보유고가 그렇게 급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환율만'으로 외환 수급의 균형을 이룰 수는 없었다. 환율상승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없앤 97년 12월에도 환율안정을 위해 보유 외환을 시장에 공급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
우리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데 시장에만 맡겨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97년 11월 당시, 상승압력은 흡수하면서 정부의 환율안정에 대한 정책의지에 대한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래서 상승압력을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한국은행에, 안정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재경원이 시장 관리를 주도하도록 하면서 환율제한폭을 없애는 방향의 정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2.25%의 제한폭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너무 변동폭이 작았던 것이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314-315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 국장을 맡았던 정덕구는 "(서울 외환시장 특성상, 정부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없다면) 기업들은 수출입 결제자금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의 규모가 너무 작다 보니 16 17 달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와도 문제가 생기고, 반대로 일정 규모 이상으로 빠져나가도 문제가 생겼던 것" 이라고 덧붙인다.
서울 외환시장은 원래 기업의 수출입 결제자금, 즉 순수한 실수요 자금만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국내 은행과 종금사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국내 외환시장에 달려들어 무조건 달러를 사들였다. 그 바람에 기업들은 수출입 결제자금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한국은행은 11월 18일에도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이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길은 이제 완전히 막혀버렸다. (45) (...)
시장의 실패이다. 시장감시 시스템이 붕괴됐더라도 시장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시장의 자생력이 살아 있다면 감독이 다소 느슨해지더라도 위기국면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 외환시장은 그 규모가 너무 작았다. 시장이 자생력을 가지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거래가 있어야 하는데 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의 규모가 너무 작다 보니 달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와도 문제가 생기고, 반대로 일정 규모 이상으로 빠져나가도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어느 정도 자본 유출입은 시장이 스스로 감내해내야 하는데 서울 외환시장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외국인투자자들의 시장지배력이 커진 것도 문제였다. (111)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45, 111
※ 대한민국 정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 급격한 자본유입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1997년 11월 21일,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낸 한국정부는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에서 다루었던 국내은행위기(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18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19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 20로 발전 21하게 된 결과, IMF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 살펴봤듯이, 1997년 당시 대기업부실 22과 이로 인한 금융권부실 23이 국내은행위기로 끝나지 않고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하게 된 원인은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의 과도한 단기외채 조달 때문이었다. 국내경제위기는 대외신인도 하락을 가져왔고 이는 외국투자자들의 자금회수로 이어졌다. 단기로 조달한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정부당국은 외화결제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 그 결과, 한국의 외환보유고 소진을 본 외국투자자들은 자본회수를 서두르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과 아시아국가들은 1990년대 자본자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급격한 자본유입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 24였다.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 증가가 초래할 문제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연쇄적으로 발생한 외환위기에 대해, 이규성은 "아시아의 위기는 경상수지의 중요성이 도외시된채 진행된 자본자유화 과정에서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 라고 말한다.
자본거래가 자유화되면 한편으로는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져 자본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간 자금흐름이 갑작스럽게 반전되기도 하고 환율의 투기 등이 발생함으로써 국제금융시장의 가변성이 증폭되고 때로는 외환위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대폭 확대하는 경우에는 그 위험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25. 이하에서는 자본자유화 과정에 있어서 경상수지의 중요성, 위험성을 고려한 외채관리의 중요성과 환율정책의 중요성을 외환위기측면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
자본자유화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해외자본 도입 및 해외진출이 매우 용이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은 환율은 크게 변동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금리가 높은 국내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는 금리가 낮은 해외차입을 선호 26하였다. (...)
이러한 상황의 변화 속에서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의 의미가 달라진다며 국제수지를 걱정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비웃는 당국자도 있었다. (...) 그런데 앞의 제 Ⅱ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상수지 적자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되더라도 국제금융시장의 심리가 변하여 자본수지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유지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
오늘날과 같이 환율과 금리의 변동성이 매우 큰 금융환경 속에서 조그만 충격에도 급격히 자산구성을 변경하는 투자가들의 행동양식을 생각할 때 지속적이로 안정적인 자본수지의 흑자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수지의 흑자가 발생하더라도 유입된 해외자본을 과잉투자하거나 부동산과 같은 비생산적 투자 27에 활용하거나 지나친 소비를 보전하는 데 사용한다면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확대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1993년 이후 자본자유화에 따른 해외자본 조달의 용이성에 안주하면서 고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우리는 변동성이 심한 국제금융환경 속에서 국제투자가들은 언제든지 쉽게 표변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외면하였다. 이번 위기를 통하여 비록 자본거래가 자유화된 상황에서 해외자본의 조달이 용이해졌다 하더라도 경상수지 적자가 갖는 의미를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 하겠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위기 당사국들은 자본자유화 확대 → 대규모 자본수지 흑자 → 환율의 고평가 속에 고성장 추구 →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과정 28을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 과거 많은 나라들이 재정적자 확대 → 경상수지 적자 확대 → 자본수지 흑자 확대라는 경로를 걷다가 외환위기에 직면한 양상과는 현저히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의 위기는 경상수지의 중요성이 도외시된 채 진행된 자본자유화 과정에서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86-89
< 4편 참고자료 >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 1997년에는 단기외채비율이 42%로 하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국제금융기관의 자금회수로 인하여 생긴 결과이다. 1997 한국 거시경제에 의문을 품은 국제금융기관은 차입금회수에 서두르게 되는데, 급격한 자금회수 과정에서 다수의 한국 기업들과 은행들이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고만다. [본문으로]
- 대기업 군의 서열은 1996년도 금융, 보험업을 제외한 기업집단의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출처는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88 [본문으로]
- 경제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단순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물적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함을 뜻한다. 한 국가의 부wealth를 단순한 '돈의 총량'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면 그만이다.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법정통화 fiat money 일 뿐이다. [본문으로]
- 이것의 경제학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26-27 [본문으로]
- 서울대학교 이제민은 '한국의 외환위기: 원인, 해결과정과 결과'(2007)을 통해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많은 문헌이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한국 정부가 1997년 8월 민간부문의 외채에 대한 지급 보증을 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갖는 의미다. 국내 구조가 외환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보다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한 후로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 여부가 아니라, 정부가 민간의 외채를 대신 갚아 줄 능력이 있는지 여부가 외환위기가 일어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물론 한국정부가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문제는 재정의 불건전성이 아니라 지급보증을 한 민간의 단기외채에 비해 정부(한국은행)가 가진 외화준비금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 한국 정부의 문제는 결제능력부족(insolvency)이 아니라 유동성부족(illiquidity)이었다" 라고 주장한다. 1997 외환위기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냐, 아니면 단순한 유동성위기냐'의 논쟁은 추후에 다룰 계획이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의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http://joohyeon.com/173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이 보고서의 논평을 맡은 이영섭은 "<표7>의 해석에 대해서 논평자도 기본적으로 저자의 입장을 같이하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저자가 제시한 1997년 11월중의 대규모의 인출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투기적 공격 때문에 발생된 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제채권단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표7>을 보면 투기적 공격은 그 이전부터 발생하지만 채권인출은 11월에만 발생하고 있으므로, 이는 10월말 및 11월 초에 발생하기 시작한 위기에 대한 대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표7>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외환위기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만일 외환위기의 시작을 11월 중하순(예를 들어, IMF 구제금융 신청일인 11월 21일)으로 잡으면 저자의 해석에 대해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작을 10월 하순(예를 들어, 기아사태처리 발표 및 홍콩증시 폭락이 발생한 10월 22~23일)으로 잡으면 이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저자와 대립되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고 지적한다. 본인도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점을 10월 하순으로 잡더라도, 이는 헤지펀드 등의 투기적공격이 아니라 1997년 동안 높았던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본문으로]
- 다시말해 외채가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의 '※ 원화가치 고평가와 1994-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를 막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본문으로]
- = 만기연장비율 [본문으로]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1-42 [본문으로]
- (포스팅 서두에 나오듯) 1997년 9월 당시 강경식은 "우리나라는 증권시장 일부만 개방되었을 뿐,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 라며 "한국 자본시장의 낮은 개방도"를 장점으로 생각햇지만 오히려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본문으로]
- 당시 IMF 또한 "한국의 시장개방 정도가 작아서 문제" 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더 큰 폭의 자본시장 개방'을 제시한다. 당시 IMF의 이러한 처방이 옳았는지의 여부는 추후에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 특정국이 공공부문 혹은 민간부문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상태 [본문으로]
- 특정 통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해당국 정부가 대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사용하거나 금리 인상 등을 통해 환율을 방어하는 상태 [본문으로]
- 외환위기 · 은행위기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인데 "금융시장이 심각한 붕괴에 있는 상태 · 위기의 확산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적인 중개기능이 손상되어 실물경제에 대규모 부정적 효과 파급"하는 상태 [본문으로]
- 은행위기 · 외채위기 · 외환위기 · 체계적 금융위기의 정의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본문으로]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http://joohyeon.com/173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의 '※ 원화가치 고평가와 1994-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를 막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http://joohyeon.com/170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 1997년 당시 한국경제는 '자본거래의 자유화'가 가져오는 위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7년의 교훈을 배운 2013년 한국은 현재 '자본거래의 급격한 변동이 가져오는 위험'을 가장 잘 대비하고 있는 국가로 꼽힌다. │ 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 http://joohyeon.com/164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의 '※ 국내은행 대출고객 비중에서 5~30대 재벌 & 비재벌기업 비중 증가 →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 상승' http://joohyeon.com/173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의 '※ 신흥국 금융시장의 거품을 초래하는 미국 Fed의 통화정책' http://joohyeon.com/164 참조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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