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성장 - 미국의 지원 + 박정희정권의 규율정책한국의 경제성장 - 미국의 지원 + 박정희정권의 규율정책

Posted at 2013. 8. 23. 22:06 | Posted in 경제학/경제성장, 생산성, 혁신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이라는 포스팅을 통해, "개발시대 관료와 기업의 유착관계가 경제성장 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라는 주장을 소개했다. 이런 주장은 색다른 시각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한국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전세계에 관료-기업인 사이의 부패가 심한 나라는 많지만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는 드물다. 특히나 한국처럼 짧은시간에 경제성장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나라는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이 경제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무엇이 있을까?


외부요인을 찾자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건 "미국의 존재" 이다. 류상영은 <박정희정권의 산업화전략 선택과 국제 정치경제적 맥락>(1996) 이라는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과 박정희정권의 국가전략과의 이익수렴, 한일국교 정상화이후 형성된 한일 간 정책이념 공유와 경제협력이 박정희정권에게는 기회조건으로 작용"했다 라고 말한다.


냉전시대 미국은 "아시아 지역통합전략(10)" 이라는 맥락 속에 한국을 위치시킨다. 미국은 "더 장기적인 정치경제적 문제로서 경제성장과 정치안정을 추구하는 국가의 민족건설 지원(11)"을 목표로 동아시아 원조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대해 박정희정권은 "냉전구조 속에 위치해 있는 한국의 군사적 현실(14)"을 무기로 미국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낸다. 


그리고 베트남전 파병을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확대시키는 하나의 계기(14)"로 인식했던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고, 미국에게는 그간의 전반적인 대한원조 및 차관삭감 방향을 일시적으로 유보시키는 효과(14)"를 가져왔다. 박정희정권은 미국에게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해줄 것과, 한국의 외채상황을 감안하여 미국의 군사원조를 경제부분에 전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 그리고 미국이 한국의 계속적인 무역시장으로 역할해 줄 것(14)"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구상의 최종적인 외교적 완결(17)"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였다. 한일국교정상화는 "한국의 산업화와 함께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구상이 실질적 내용면에서 구체화되는 정치경제적 출발점(17)" 으로서의 의미도 가졌는데, 미국은 일찍부터, "한국정부는 회담타결과 함게, 아마도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게 될 경제적 원조를,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17)" 이라는 기본입장을 밝혀왔다. 따라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식민지배 배상금은 "보상이나 청구권 등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위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회담 타결 댓가를 지불(17-18)" 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구상에 따라 "박정희정권은 일본을 중심으로한 동아시아의 국제분업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21)" 될 수 있었다. 미국이 추진한 아시아지역통합전략 + 한일국교정상화는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내포적 공업화전략을 포기하고 수출지향형 산업화전략으로 전환하도록 하였고, 중범위의 산업정책적 차원에서는 개발국가론에 입각한 일본의 경제협력이 정부개입에 의한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대외적 맥락으로 작용(21)" 하게 되었다. 




"관료-정치인의 유착관계가 만들어낸 의도하지 않은 결과", "아시아 지역통합전략 이라는 미국의 구상과 지원"을 살펴봤지만, 한국이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의도하지 않았던 변수+한국이 통제할 수 없었던 대외변수 등을 제외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내적요인은 없을까? 


김일영은 <1960년대 한국 발전국가의 형성과정: 수출지향형 지배연합과 발전국가의 물적 기초의 형성을 중심으로>(1999) 라는 논문에서 "발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장악한 자원을 자신이 설정한 개발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동원배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상대적 자율성이 큰 국가는 발전국가라기 보다는 약탈국가(the predatory state)의 성격을 띠기 쉬웠다(13)" 라고 지적한다. 


즉, 일반적인 정경유착과 박정희정권 하에서 벌어졌던 정경유착의 차이는 "유착이 발생하는 경제적 영역과 특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으며, 그 결과도 소비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으로 상반되게 나타났다.(15)" 라는 말이다. 박정희정권은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을 통해 낮은 금리로 대기업에게 대출지원을 했는데, "박정희 정부 하에서 저리의 융자와 외자는 주로 수출을 통해 성과를 내는 기업에게 주어지거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회기반시설이나 기간산업 분야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똑같이 융자를 둘러싼 특혜의 추구라 할지라도 1950년대의 그것은 소비적이었다면, 1960년대의 것은 성과에 따른 보상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보다 생산적(15)" 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박정희정권은 어떤 정책을 취하였기에, 정경유착이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 양재진은 <산업화 시기 박정희 정부의 수출 진흥 전략: 수출 진흥과 규율의 정치경제학>(2012)을 통해, 수출지향산업화 과정속에서 발생한 박정희정권의 "규율행사 discipline"에 주목한다. "수출 진흥은 그 자체가 항상 모럴해저드와 자원배분의 왜곡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 기본적으로 수출진흥정책 그 자체가 제대로 입안되고 효과적으로 집행되어야 하겠지만, 진흥(promotion)의 이면에는 국가의 규율(discipline) 행사가 필요조건으로 부가되어야 한다(2)" 라는 것이다.  "성공적인 산업화 배경에는, 기업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성과목표 부과와 업적에 따른 보상과 처벌(2)"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박정희정권은 1964년 수출지향 산업화(Export-Oriented Industrialization, EOI) 전략으로 돌아선 이후,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을 통해 기업에 자금을 지원 · 원화가치를 1달러당 130원에서 255으로 평가절하 · 저축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자율을 16.8%에서 30%로 상승 등등 수출진흥지원을 펼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지원이 생산적인 결과물로 도출되도록 하기 위해 구사한 규율정책 discipline 이다. 박정희정권의 수출진흥지원에는 "강력한 책임과 의무가 강하게 부과되었으며, 수출기업이 향유하는 초과이윤은 사유물로 인정되기 보다는 공적 자산으로 이해되어 산업화에 재투자(12)" 되어야 했다. 


박정희정권은 "정책금융의 배분과 상업차관의 도입 승인 과정에서 해당 제품의 공급이 국내수요를 얼마나 충족시켜 줄 수 있으며,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액이 얼마일 것인가 그리고 국내산업과의 연관성, 기술이전 가능성, 그리고 고용창출 등이 얼마나 이루어질 것인가(12)"를 주요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기업별로 수출목표액을 부과하고 이를 달성하도록 행정지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규율행사 discipline 은 "기업들로 하여금 출혈수출과 이윤압박 등을 감내하면서까지 생산과 수출을 늘리게 만들(13)"었다. 또한, 부실기업들에 대하여는 "기업주에게 책임을 물어 경영권을 박탈하는 등 과감한 조치(14)"를 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시기는 수출기업들이 시장진입과 기업활동 전 과정에서 국가의 규율을 받아들여야 했고, 극단적으로 국가에 의한 구조조정이 신속하게 강제되었다.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가해진 성과책임의 부여는, 수출진흥정책의 효과성을 최대한 극대화 시킨(14)" 것이었다.


또한, 물가가 치솟자 박정희정권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주요 공산품과 유류 가격을 조정하는 가격사전승인제를 시행하는 등 행정력을 동원해 독과점기업의 초과이윤을 억제(16)" 했다. 물론, 수출지향 산업화를 과정에서 소수 기업들에게 자원을 몰아주고 수입을 제한해 경쟁을 막은 결과, 국내시장에서 독과점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각주:1] 그렇지만 "수출지향산업화의 맥락에서 수출단가를 낮추기 위해, 국내 독과점 구조에서 초과이윤을 수취하는 것이 허용(16)" 되었을 뿐이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준에서 머물러야(16)" 했다. 그리고 "급증하는 신흥 자본가들의 해외재산도피도 엄격히 규제(17)"하여 "남미나 동남아시아의 경우에 비할 때 한국의 외화도피는 매우 성공적으로 제어(17)" 되었다. 


즉, 박정희정권은 "법과 제도를 통하기 보다는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한국의 신흥 자본가들에 대한 규율(17)"에 나섰고, 그 결과 정경유착이 경제성장이라는 생산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 박병영은 <1980년대 한국 개발국가의 변화와 지속: 산업정책 전략과 조직을 중심으로>(2003) 논문을 통해 "정부는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설비투자 등에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내수시장의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이들 산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을 지원해온 것이다. (...) 1970년대 들어서는 전략산업에 참여한 기업들을 보호 육성하는 경쟁제한적인 행정규제가 주된 정책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경쟁제한 뿐만 아니라, 정부는 수입규제 및 정부구매 등을 통해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히였다(11)" 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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