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

Posted at 2018. 12. 5. 01:21 | Posted in 경제학/국제무역, 경제지리학, 고용


※ 한국 경제발전은 자유무역 덕분? 보호무역 덕분?


지난글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은 대외지향적 무역체제(outward-trade regime)를 선택한 덕분에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1961년 쿠데타 이후 대내지향적 자립경제를 추구했던 박정희정권은 1964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보완하여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965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는 영국 처칠 수상의 『수출 아니면 죽음』 발언을 인용하였고, 각종 수출 지원 정책이라는 당근과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통한 수출책임제 점검 이라는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973년 연두 기자회견에서는 '1980년 수출액 100억 달러 달성을 위한 중화학 공업화'를 목표로 내걸었고, 수출액 100억 달러를 3년이나 앞당긴 1977년에 이루었습니다.


만약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내포적 공업화 전략(수입대체 산업화)을 계속 고수했더라면, 중남미 국가들처럼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룰 뻔[각주:1] 했는데, 참으로 다행스런 방향전환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경제발전을 통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외지향적 무역체제를 지향해왔다'는 사실 뿐입니다.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를 통한 한국 경제발전 성공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인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인지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논쟁사항 입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 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바로 기계 · 조선 · 철강 · 화학 · 전자 등의 중화학 업종 육성 입니다. 이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는 수입장벽을 세워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시키지 않았고, 보조금을 통해 지원하였습니다.



즉, 한국은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에 따라서 경제발전 경로를 밟아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유치산업보호론이란 말그대로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인 유치산업(Infant Industry)을 외국산업과 경쟁할 수 있을때까지 일시적으로 보호하여(temporary protection) 육성시키자'라는 논리 입니다.

만약 당시 한국이 비교우위론을 철저히 따라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지 않고 1차산업이나 단순 공산품 생산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성공은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과 '유치산업보호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후자의 정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한국의 경제발전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논리로 말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유치산업보호론이 100% 보호무역체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입니다. 유치산업보호론은 말그대로 어린아이 수준인 산업(infant industry)을 외국산업과 경쟁할 수 있을때까지 일시적으로 보호하자(temporary protection)는 논리 입니다. 평생토록 무역장벽을 높여서 살자는 이론이 아닙니다.


성숙한(mature) 산업을 보유한 오늘날 한국은 개방적인 무역체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경제발전 당시에도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부는 특정 기업을 선정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시장이 아닌 해외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만약 보호와 동시에 국내에 안주하게끔 하였다면, 기업의 생산성 정도가 아닌 정권과의 결탁여부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했을겁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는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도했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경쟁'과 '해외진출을 통한 시장크기 확대' 등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살려야 합니다. 


제가 전달하고 싶은 생각은 "애시당초 100% 보호무역체제나 100% 자유무역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방식을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vs.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는 국가의 산업정책 및 보호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이 둘은 별반 다른 게 없어 보이지만 현실 속 논의과정에서 큰 차를 불러옵니다. 


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국가주도의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우선적으로 주장합니다. 과거 개도국이었던 한국과 오늘날 선진국인 한국의 차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 필요한 개도국과 경제강대국인 미국의 차이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산업 · 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를 우선 진단합니다. 과도한 국가개입은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나라가 국가주도 정책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도 똑같은 성공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남미와 한국의 사례에서 처럼 말이죠. 


어떠한 사고방식을 가지느냐는 결국 사상과 철학의 문제입니다. 경제사상 변천은, 정치사상이 그러하듯이, 위대한 학자들의 논의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앞으로 2편의 글을 통해 위대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며, 주류 경제학계 내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과 '유치산업보호론' 그리고 '보호무역론'을 둘러싼 대립과 논쟁이 어떻게 변화 · 발전 되어왔는지를 알아봅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보다 정교화 할 수 있을겁니다.




※ '자유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 자유무역의 이점'을 설파한 애덤 스미스


  •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1790


지난글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①] 애덤 스미스, 중상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무역 사상을 내놓다'에서 살펴본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 사상을 되돌아 봅시다. 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을 우선 파악해야 합니다. 『국부론』이 출판된 1776년은 아직 중상주의(mercantilism)가 영향력을 가졌던 시대였고, 애덤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유무역의 이점을 설파했습니다.  


국가가 무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금은보화 등 재화를 축적하려고 했던 중상주의 시기. 애덤 스미스는 '개인이 자연적자유(natural liberty)에 따라 행동한다면 개인과 공공의 이익은 일치'한다고 생각했으며, 국가보다 개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better knowledge)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무역을 규제하기 보다는 무역을 할 자유(freedom to trade)를 상인들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부론』의 상당부분에 이러한 주장을 할애하였고,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 제4편 정치경제학의 학설체계 - 제2장 국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재화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에 대한 제한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재화의 수입을 높은 관세나 절대적 금지에 의해 제한함으로써 이 재화를 생산하는 국내산업은 국내시장에서 다소간 독점권을 보장받는다. (...) 국내시장의 이와 같은 독점권은 그런 권리를 누리는 특정 산업을 종종 크게 장려할 뿐만 아니라, 독점이 없었을 경우 그것으로 향했을 것보다 더 큰 노동·자본을 그 산업으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런 독점권이 사회의 총노동을 증가시키거나 그것을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는가는 결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각 개인은 그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이 가장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사실, 그가 고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또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그로 하여금 사회에 가장 유익한 사용방법을 채택하도록 한다. (...)


사실 그는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security)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gain)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허풍을 떨지 않게 하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 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 각 개인은 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하여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


국내의 특정한 수공업·제조업 제품에 대해 국내시장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각 개인에게 그들의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것으로, 거의 모든 경우, 쓸모 없거나 유해한 규제임에 틀림없다. 


- 애덤 스미스, 김수행 역, 1776,  『국부론(상)』, 비봉출판사, 548~553쪽


애덤 스미스는 '제조업'(manufacturing)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비판적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자본과 노동을 자연적 흐름에 거슬러 인위적으로 특정 부문에 배치하는 것은 효율적 생산을 가로막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시기에 제조업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더 가난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 시기 사회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자본과 노동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현재 제조업이 없다는 건, 지금 현재 사회에 도움을 주는 산업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 제4편 정치경제학의 학설체계 - 제2장 국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재화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에 대한 제한


사실 이러한 규제에 의해 특정제조업이 그런 규제가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 빨리 확립될 수도 있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외국과 같이 싸거나 더 싸게 국내에서 생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노동이, 비록 이처럼 그런 규제가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욱 빨리 특정분야에 유리하게 전환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노동이나 사회의 수입 총액이 이와 같은 규제에 의해 증대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사회의 노동은 자본이 증가하는 비율에 따라 증가할 수 있을 뿐인데, 자본은 수입 중에서 점차 절약되어 저축되는 것에 비례해서만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규제의 직접적인 효과는 그 사회의 수입을 감소시키는 것이고, 그리고 수입을 감소시키는 것이, 자본과 노동이 자연적인 용도를 찾도록 방임되었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증가하는 것보다 더 빨리, 사회자본을 증가시킬 수는 분명히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규제가 없음으로써 사회가 문제의 제조업을 가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는 그 때문에 어느 한 기간 내에 필연적으로 더 가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발전의 어느 한 시기에 사회의 모든 자본과 노동은, 비록 다른 대상에 대해서이긴 하지만, 당시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각 시기마다 그 사회의 수입은 그 사회의 자본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수입이며, 자본과 소득은 모두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증가했을 것이다. 


- 애덤 스미스, 김수행 역, 1776,  『국부론(상)』, 비봉출판사, 555쪽


이처럼 (절대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론을 세상에 내놓았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사고방식은 개인의 이익추구가 공공의 이익과 일치하며, 개인의 행위가 올바른 결과를 낳는다는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자혜로운 신의 설계와 간섭 덕분"(design and intervention of a benevolent God)이라고 믿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조화처럼 느껴지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결국 자연은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기 때문에,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세간의 선입견과는 달리) 교조적인 자유방임주의(lassez-faire)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적이익과 공공이익 간의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 경우 정부개입이 후생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정부의 기능을 국방 · 사법 · 공공기구 등 3가지에만 국한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민간부문에 개입하여 공공의 후생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더 나은 지식'(better knowledge)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가 살던 18세기 후반 영국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었기 때문에 정부개입을 꺼려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사상과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덤 스미스는 자유무역의 이점을 설파하였습니다.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뒤이어, 비교우위론을 소개한 1817년 데이비드 리카도의 『원리』가 출판되며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은 이론적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동시기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반박하는 주장들도 제기되었습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모두 영국인 입니다. 18세기 말~19세기 초반 영국은 이미 제조업에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세상에 내놓은 배경은 '경제성장을 위해서 수확체감 성질을 가진 산업을 포기하고(=외국으로부터의 수입으로 대신하고) 제조업 같은 수확체증산업(increasing return)에 특화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제조업 육성 및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주장한 이들과는 달리, 리카도는 오히려 제조업을 위해서 자유무역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19세기 당시 영국이 제조업 부문에 비교우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자유무역 및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에만 유리한 이론 아니냐"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습니다. 

(참고 :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비판의 선봉자가 바로 미국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과 독일인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입니다.


초대 워싱턴정부 재무장관을 역임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1791년 <제조업에 관한 보고>(<Report on Manufactures>)을 통해 제조업 육성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독일인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27년 <미국정치경제론>(<Outlines of American Political System>) 및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The National System of Political Economy>)를 통해 스미스와 리카도가 제시한 자유무역사상을 비판하며 '유치산업보호'의 필요성을 설파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제조업 육성'(manufacturing)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미리 발전한 외국(특히 영국)과의 자유경쟁이 벌어지는 상황 하에서는 제조업을 키우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해밀턴과 리스트가 스미스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근원을 탐구하는 건, 자유무역론 · 유치산업보호론 · 보호무역론을 둘러싼 논쟁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번글에서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저서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적 근원을 스미스의 것과 비교해 봅시다.




※ 애덤 스미스를 비판한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번 파트에서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애덤 스미스를 비판한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국내의 특정 산업을 외국 산업과 경쟁할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보호하자'는 유치산업보호론의 논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더군다나 국내 산업을 '일시적으로 보호'(temporary protection)하는 것이니, 문을 닫고 폐쇄적으로 살자는 논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유무역론과 대비되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리스트의 유치산업보호론이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를 대표하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과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 사상이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구성되어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vs 민족주의(nationalism)


▶ 애덤 스미스 : 세계시민주의 사상 (사해동포주의 사상)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은 "개별 국가들이 비교우위를 가진 상품에 특화한 뒤 서로 교환을 하면 세계적 차원에서 효율적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설명 1[각주:2]2[각주:3])


이는 사실상 '국제적 차원의 노동분업론'(international divison of labor)과 마찬가지이며, 개별 국가들이 비교우위 특화 및 분업을 통해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지 여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은 전인류(mankind)의 후생을 평가하는 세계시민주의(혹은 사해동포주의, cosmopolitanism)의 관점을 가지고 세계경제를 바라봅니다(doctrine of universal economy). 


▶ 프리드리히 리스트 : 민족주의 사상


유치산업보호론은, 이에 반하여, "모든 국가와 민족은 각자 처한 발전정도와 상황이 다르며, 진정한 무역자유가 이루어지려면 후진적인 민족과 앞선 민족이 대등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를 믿는 사람들은 민족경제적 관점(national economy)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은 민족경제를 다루어야 하며, 어떤 국가가 각자의 특성한 상황에 맞추어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고 완벽한 국가가 되기 위해 어떻게 권력과 부를 증대시켜야 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론은 모든 민족이 '동등한 상태'에 있을 때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지, '훨씬 뒤처진 민족'에게 자유경쟁은 경제발전에 해만 끼칩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주장을 직접 읽어봅시다.


● 서론


필자가 영국인이었다면, 애덤 스미스 이론의 근본 원리를 의문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필자가 이때 이후로 여러 익명의 기사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실명으로 쓴 더 긴 논문으로 그 이론에 반대되는 견해들을 전개할 수 있게 한 것은 조국의 사정이었다. 오늘도 이 글을 가지고 나설 용기를 준 것은 주로 독일의 이익이다. (...) 


단 한 민족의 압도적인 정치력이나 압도적인 부에서 나오는, 그래서 다른 민족들의 예속과 종속에 기초를 둔 만국연맹은 모든 민족적 고유성과 민족들의 일체의 경쟁심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제11장 정치경제학과 사해동포주의 경제학


민족 정체성의 개념과 본성에 출발하여 어느 한 민족이 현재의 세계 정세와 특수한 민족 상황에서 자신의 경제적 상태를 어떻게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정치경제학 및 민족경제학(national economy)과,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단 하나의 영원한 평화 위에서 살아가는 사회를 이룬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사해동포주의 경제학 혹은 세계 경제학(cosmopolitical economy)을 구분해야 한다. 


그 학파(prevailing school[각주:4])가 소망하듯이 모든 민족의 보편적 연맹 혹은 연합을 영원한 평화의 보장책으로 전제한다면, 국제적 무역 자유의 원칙은 완전히 정당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목표의 추구에서 제한을 덜 받을수록, 그와 자유 교류 관계에 있는 자들의 수와 부가 클수록, 그의 개인적 활동이 뻗어 갈 수 있는 공간이 클수록, 그에게 본성상 주어진 특성들, 획득된 지식과 숙련 그리고 그에게 제공되는 행복을 증진할 자연적 역량을 활용하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다. (...)


그 학파는 민족 정체성의 본성과 그 특수한 이익과 상태를 고려하여 이를 보편적 연맹과 영원한 평화의 관념과 조화시키기를 게을리했다. 그 학파는 이루어져야 할 상태를 현실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 학파는 보편적 연맹과 영원한 평화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로부터 무역 자유의 큰 이익을 도출한다. 이런 식으로 그 학파는 효과와 원인을 혼동한다. (...)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예들은 모두가 정치 통합이 선행하고 무역 통합이 뒤따른 예들이다. 역사는 무역 통합이 선행하고 정치 통합이 그로부터 자라난 예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 (...)  


무역 자유가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려면 후진적인 민족들은 인위적 조치에 의해 영국 민족이 인위적으로 올려진 것과 같은 단계의 성숙에 올려져야 했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머리말-192쪽


그렇다면 올바른 자유무역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후진적인 민족을 동등한 수준으로 발전케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경제발전 혹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요인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관점 차이가 드러납니다.


둘째, 국부의 원천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 노동 분업(division of labour) vs. 생산 역량(powers of production)


▶ 애덤 스미스 : 노동 분업을 통한 생산성 증대의 중요성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한 나라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들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전부를 공급하는 원천"이며, "노동생산력(productive powers of labour)을 최대로 개선 · 증진시키는 것은 분업(division of labour)의 결과"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국부는 재화의 축적(accumulation)"으로 바라봤던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분업을 통한 생산'(production)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 물질적 상황 뿐 아니라 정신적 역량도 중요


프리드리히 리스트도 노동을 통한 생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리스트는 좀 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노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리스트는 "인간의 머리와 팔, 손이 생산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들에게 생기를 주는 정신, 그들의 활동에 결실을 맺어주는 사회질서, 그들에게 제공되는 자연력" 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통해 물질적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리스트는 노동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주는 정신 · 사회질서 · 법률 등의 생산 역량(powers of production)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원문을 길더라도 읽어봅시다.


● 제12장 생산 역량의 이론과 가치 이론 

(The Theory of the Powers of Production and the Theory of Values)


부의 원인은 부 자체와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개인은 부, 즉 교환가치를 소유할 수 있더라도 그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 힘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가난해진다. 한 개인은 가난할 수 있더라도 그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큰 액수의 가치 있는 물건들을 만들 힘을 소유한다면 부유하게 된다. 


부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은 이에 따라 부 자체보다 무한히 더 중대하다. 그것은 획득물의 소유와 증대를 보장해 줄 뿐 아니라 상실한 것의 보상도 보장해 준다. 이는 사인들보다 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민족 전체에게 훨씬 더 해당된다. (...)


명백히 스미스는 중농주의자들의 사해동포주의 관념인 '무역의 보편적 자유'(universal freedom of trade)의 관념에, 그리고 그 자신의 위대한 발견인 '노동 분업'(the division of labour)에 너무 많이 지배를 받아서 '생산 역량'(powers of production)의 관념을 추구할 수가 없었다. (...)


노동이 부의 원인이고 무위도식이 빈곤의 원인이라는 판단에 대해 언제나 다음과 같이 더 많은 질문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원인은 무엇이며, 무위도식의 원인은 무엇인가? (...)


이 모든 관계에서 가장 많은 것이 그 개인이 성장하고 움직이는 사회의 상태에, 과학과 예술이 융성하느냐에, 공공 제도와 법률이 종교성 · 도덕성 · 지력 · 인신과 재산의 안전 · 자유와 권리를 낳느냐에, 민족 안에 물적 복지의 모든 요인들, 농업 ·제조업 · 상업이 고르고 조화롭게 성숙했느냐에, 민족의 세력이 개인들에게 복지 상태와 교양에서의 진보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 가며 보장해 주고 국내적 자연력을 그 전체 범위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대외 무역과 식민지 보유를 통해 외국들의 자연력도 가져다 쓸 수 있게 할 만큼 충분히 크냐에 달려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런 힘들의 본성을 전체적으로 별로 인정하지 않아서, 권리와 질서를 관리하며 수업과 종교성, 과학과 예술 등을 돌보는 이들의 정신 노동의 생산성(productive character to the mental labours)을 한번도 시인하지 않았다. 그의 탐구는 물적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 활동에 국한된다. (...)


곧바로 그의 학설은 물질주의, 분권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점 더 깊이 침몰한다. 그가 '가치', '교환가치'의 관념에 지배를 받는 일 없이 '생산 역량'(productive power) 관념을 추구했더라면, 경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치 이론 옆에 독립적인 생산 역량 이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통찰에 도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 상황(material circumstances)을 가지고 정신적 역량(mental forces)을 설명하는 잘못된 길로 빠졌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201-209


그럼 리스트가 강조하는 정신 · 사회질서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바로 여기에서 스미스와 달리, 리스트가 '제조업 육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는 제조업이 발달할수록 노력 · 경쟁심 · 자유의 정신이 고양된다고 믿었습니다.


셋째, 제조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 제조업은 특별한 산업이 아니다 vs. 제조업은 정신적 역량을 키워준다


▶ 애덤 스미스 : 제조업은 특별한 산업이 아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애덤 스미스는 그 시기에 제조업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더 가난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그 시기 사회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자본과 노동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 제조업은 정신적 역량을 키워준다


이에 반해, 리스트는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7장-제26장에 걸쳐 제조업의 이점을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농사에서는 신체적 둔함, 옛 관습, 교양과 자유의 부족이 지배"하나, 제조업 국가에서는 '노력, 경쟁심, 자유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비교합니다.


제조업이 이러한 역량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이유는 '제조업자들은 본질적으로 사회 안에서 활발히 교류를 하며 사업을 영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는 농업과는 달리 제조업은 다양한 능력과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제조업 국가에서 정신적 자질이 더 높게 평가됩니다.


리스트는 제조업의 중요성을 간과한 애덤 스미스를 향해 "미활용된 자연력이 오직 제조업에 의해서만 소생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라고 비판합니다.


아래의 원문을 읽어보도록 하죠.


● 제17장 제조업 역량과 인적 · 사회적 · 정치적 · 민족적 생산 역량


투박한 농사에서는 정신적 활력 · 신체적 둔함, 옛 개념 ·관습, ·습관 · 행위 방식에 대한 고수, 교양 · 복지 · 그리고 자유의 부족이 지배한다. 반면에 정신적, 물질적 재화의 끊임없는 증식을 향한 노력, 경쟁심, 자유의 정신은 제조업 국가 및 상업 국가의 특징이 된다. (...)


농사를 영위하는 인구는 그 나라 전체에 흩어져 살며, 정신적 ∙ 물질적 교류에 관련해서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 그의 일이 그를 인간과의 교류에서 멀리 떼어 놓듯이,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관습적인 운영에서도 조금의 정신 집중, 조금의 신체적 숙련만 요구한다. (..) 재산과 빈곤은 소박한 농업에서는 대대로 상속되며, 거의 모든 경쟁심에서 생겨나는 분발의 힘은 죽어 있다. (...)


제조업자의 본성은 농업인의 본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제조업자들은 사업 운영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려서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만, 교류 안에서, 그리고 교류를 통해서만 살아간다. (...) 그의 생존과 번영은 촌사람에게처럼 자연의 호의와 관습적 활동이 보장해 주지 않으며, 이 둘은 완전히 그의 통찰력과 활동에 달려 있다. (...) 그는 언제나 사고팔고 교환하고 거래해야 한다. 어디서나 그는 인간들, 변동 가능한 상황, 법령과 제조들과 관계해야 한다.


제조업의 노동은 그 전체로 본다면, 첫눈에 밝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농업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다채롭고 더 수준 높은 정신적 특성과 숙련을 성숙시키고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


명백히 농업에 의해서는 같은 종류의 인성들만이, 오직 투박한 수작업의 실행에 신체적 힘과 끈기를 약간의 질서를 위한 감각과 결합하는 그런 인성들만이 소용되는 반면에, 제조업은 천 가지의 다양한 정신적 능력, 숙련 그리고 연습을 요한다. (...) 제조업 국가에서 정신적 자질은 농업국에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이 평가되는데, 농업국에서는 보통 인간들의 능력을 단지 그의 신체적 힘에 따라서만 측정한다. (...)


사업 운영의 분업과 생산 역량의 연합 법칙은 반대로 저항할 수 없는힘을 가지고 다양한 제조업자들을 서로 모이게 한다. 마찰이 자연의 불꽃처럼 정신의 불꽃을 일으킨다. 그러나 정신적 마찰은 밀접한 공생이 있고, 빈번한 사업적, 과학적,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접촉이 있고 물자와 관념의 교류가 많은 곳에서만 있다. 


인간이 동일한 장소에 더 많이 모여 살수록, 이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사업에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협력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사업이 이 개인들 각 사람의 지식, 안목, 교양을 많이 요구할수록, 자의성, 무법성, 억압과 불법적 월권행위가 이 모든 개인의 활동 및 행복의 목적과 덜 조화될수록 시민적 제도들은 더욱 완전하고, 자유의 정도는 더욱 높고, 스스로 교양을 쌓거나 타인의 교양에 협력할 기회는 더욱 많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시대나 자유와 문명을 도시들에서 출발한다, (...)


그런 시대에는 제조업의 가치는 어느때보다도 더 정치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애덤 스미스는 민족 전체의, 그 민족의 물적 자본 총액을 늘리는 능력이 주로 미활용된 자연력들을 물적 자본으로, 가치 있는 도구이자 소득을 가져다주는 도구로 전환시킬 능력에 있다는 것, 그리고 농업 민족에게서 다량의 자연력이 놀면서 아니면 죽어서 누워 있어서, 오직 제조업에 의해서만 소생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그는 제조업이 국내외 무역에, 그 민족의 문명과 세력에, 그리고 자주와 독립의 유지에, 그로부터 솟아나는 물적 재화를 취득할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282-320




※ 유치산업보호의 필요성을 설파한 프리드리히 리스트


그렇다면 이제 (애덤 스미스와 대비되는)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생각하는 '제조업을 육성하는 방법'을 살펴봅시다. 


넷째, 무역보호로 제조업을 육성해야 하느냐(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관점의 차이 

- 자유주의(liberalism) vs 국가개입주의(government intervention)


▶ 애덤 스미스 : 자유주의 사상


앞서 말했듯이, 애덤 스미스는 제조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가난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며 당시 사회의 총자본이 효율적인 다른 곳에 쓰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스미스는 "외국상품의 수입 자유로 인해 국내 특정 제조업을 위협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나라로 수출되고 있는 국내 제조상품은 여전히 해외에서 팔릴 겁니다. 또한, 자유무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더라도 대다수 제조업은 성질이 비슷한 기타의 제조업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쉽게 옮길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각주:5].


이처럼 애덤 스미스는 철저한 자유주의자 · 자유무역론자 였습니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 국가개입주의 사상


프레드리히 리스트는, 애덤 스미스와는 달리, "정부는 개인 산업을 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국부와 권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는 의무 또한 가지고 있다.[각주:6]"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유방임의 원칙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데, 현실 속에서 그럴리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그 자체로 무해한 교역을 민족의 최선이 되게 제한하고 규제하는 것은 정당화될 뿐 아니라 그럴 의무를 진다.[각주:7]"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보호관세(protective duty)를 통해 외국산 제조상품의 수입을 막고 국내 제조업을 육성할 필요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관세부과로 수입상품의 가격이 올라 소비자(민족)의 부담이 커질 수 있으나, "미래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원문을 읽어보도록 하죠.


● 제12장 생산 역량의 이론과 가치 이론


민족은 정신적 혹은 사회적 역량을 취득하기 위해 물적재화를 희생하고 여의어야 하며, 미래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 (...)


보호관세가 초기에는 제조 상품을 등귀시킨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진실이고 아예 그 학파가 인정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온전한 제조업 역량의 향상을 이룰 능력을 부여받은 민족이 제조 상품을 외국에서 도입할 수 있는 것보다 국내에서 더 낮은 비용으로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호관세에 의해 가치의 희생이 초래된다면, 이는 그 민족에게 비단 미래를 위해 무한히 더 큰 물적 재화의 총액만이 아니라 전쟁의 경우에 대비한 산업적 독립성도 확보해 주는 생산 역량의 취득에 의해 보상된다. 산업적 독립성 그리고 이로부터 자라나는 내부적 번영을 통해 민족은 대외 무역, 해운업의 확장 수단을 손에 넣으며, 문명을 증진하고, 국내의 제도들을 완성하고, 세력을 대외적으로 강화된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216쪽


이때 "자유무역을 추진하면서 국내 제조업을 육성할 수는 없느냐?" 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리스트는 부정적 입니다. 그 이유는 "어린이나 소년이 힘이 센 사나이와의 결투에서 이기기 어렵거나 단지 저항만 할 수 있는데 대한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외국에게 자유경쟁으로 맞서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말그대로 '유치산업'(infant industry)을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제24장 제조업 역량과 항구성 및 작업 계속의 원리


(과거로부터 축적된 생산과 자본의 축적 등의) 뒷받침을 받는 이 민족들이 나머지 모든 나라의 제조업에 말살의 전쟁을 선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른 민족들에서는 농업 진보에 따라 애덤 스미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은 "자연스런 사물의 경과에서"(the natural course of things) 거대한 제조업과 공장들이 생겨난다거나, 혹은 전쟁에 의해 유발된 무역 중단에 따라" 자연스런 사물의 경과에서"(the natural course of things) 생겨난 그런 것들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린이나 소년이 힘이 센 사나이와의 결투에서 이기기 어렵거나 단지 저항만 할 수 있는데 대한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 


상공업 패권을 쥔 (영국의) 공장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생 혹은 반밖에 장성하지 못한 공장들보다 앞서는 천 가지 장점을 가진다. (…)


그러한 세력에 맞서 자유경쟁을 하면서 사물의 자연스런 흐름(the natural course of things)에 대해 희망을 품는 것이 어리석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한 민족들은, 영국의 제조업 패권 밑에 영원히 굴복하는 상태에 있기로 결심하고 영국이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거나 다른 어디에서 들여오지 못하는 것만을 영국에서 조달하는 데 만족하려고 해도 헛수고일 것이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412-413쪽




※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애덤 스미스 간 관점 · 사상 · 철학의 극명한 대비


  •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금까지 살펴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생각을 다시 되짚어 봅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전인류의 후생을 총체적으로 평가했던 애덤 스미스와 달리, 개별 민족 경제(national economy)의 번영을 우선시 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 각자 처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 부와 권력을 증대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했죠.


이때, 리스트가 보기에 국부의 원천은 단순한 분업을 통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게 만드는 원인'인 정신적 역량 · 사회질서 등 이었습니다. 과학과 예술, 공공제도와 법률, 개인의 교양 등의 생산 역량(powers of production)이 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 역량을 키우게끔 만드는 산업이 바로 '제조업'(manufacturing) 이었습니다. 스미스는 제조업은 특별한 산업이 아니며 사회의 총 자본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해만 불러온다고 여겼지만, 리스트는 제조업은 미활용된 자연력을 소생시키게 해주며 미래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는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따라서 리스트는 보호관세를 통해 유치산업을 보호(infant industry protection)해야 하며, 외국과의 자유경쟁 속에서 국내 제조업이 발전할 수 없는 이유는 어린이나 소년이 힘이 센 사나이와의 결투에서 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애덤 스미스와의 관점과 사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를 통해 스미스를 비판해온 리스트는 '그 학파의 세 가지 주된 결함'(the system of the school suffers from three main defects)라고 언급하며 다시 한번 차이를 부각시킵니다.


● 제15장 민족 정체성과 민족의 경제학


그 학파의 체계는 앞의 장들에서 보여 주었듯이 세 가지 주된 결함으로 시달린다.


첫째, 민족 정체성의 본성도 인정하지 않고 민족의 이익 충족도 고려하지 않는, 토대 없는 사해동포주의다.


둘째로는 어디서나 주로 물건들의 교환가치를 염두에 두고, 민족의 정신적 ∙ 정치적 이익, 현재 ∙ 미래의 이익과 생산 역량은 고려하지 않는 죽은 유물론이다.


셋째로는 조직 해체를 시키는 분파주의와 개인주의로서 이는 사회적 노동의 본성, 그리고 그 상위 결과들에서 역량들의 결합의 영향을 무시하여 근본적으로 오직 사적 산업만을, 그것이 특수한 민족 사회들로 분리되지 않았을 경우에 어떻게 사회와, 즉 전체 인류와 자유교역을 발달시키는지만을 묘사한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255쪽




※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자유무역론을 완전히 거부했을까?


, 이렇게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론'(Free Trade)과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유치산업보호론'(Temporary Protection for Infant Industry)는 극과 극의 사상적 대립으로 보여집니다. 지금 이렇게 보면 꼭 둘 중 옳은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번글의 서두에서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vs.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는 국가의 산업정책 및 보호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다"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을까요? 그냥 자유무역vs보호무역을 하면 될텐데 말이죠.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보호무역이 초래할 수 있는 폐해를 알고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대외 경쟁을 완전히 배제하는 너무 높은 수입 관세는 이를 통해 제조업자들과 외국과의 경쟁이 배제되고, 무감각이 조장되므로 이를 부과하는 민족 자체에 해롭다."[각주:8]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게다가 리스트는 궁극적 목표로서 자유무역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모국인 독일이 영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나면 자유무역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과거 그 시점에 리스트가 자유무역을 비판했던 이유는 독일의 경제력이 자유무역을 시행할 '단계'(stages)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론이 개별 민족국가들이 처한 산업발전 단계(stage of industrial development)를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유무역의 전제조건은 "후진적 민족들이 인위적 조치에 의해 영국 민족이 인위적으로 올려진 것과 같은 단계의 성숙에 올려"[각주:9]지는 것이며, 보호무역은 "다른 민족들보다 시간상으로 앞설 뿐인 민족과 대등하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인 한"[각주:10]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보호체제는 여러 민족을 최대한 동일한 단계(equally well developed)에 올려놓은 뒤 궁극적으로 달성할 "진정한 무역 자유의 가장 중대한 촉진수단"[각주:11]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 간의 관점 · 사상 · 철학의 차이가 초래된 근본 원인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무역론과 유치산업보호론은 두 학자 간의 사상과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상과 철학의 차이는 '이미 발달된 제조업을 보유한채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인이 중요시한 것''영국에 뒤처진 후발산업국가로서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독일인이 중요시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독일인 리스트'에게는 개별 국가와 민족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는 민족경제학이 필요했으며,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 역량을 키우기 위해 제조업을 육성해야 했고, 영국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 당시로서는 자유경쟁이 아닌 유치산업보호 정책이 타당했으며, 훗날 영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나면 다시 자유무역으로 돌아갈 구상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곳곳에 '산업발전 단계'(stage of industrial development)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경제적인 면에서 민족들이 5단계의 산업발전을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원초적 야만시대. 둘째, 목축 시대. 셋째, 농업시대. 넷째, 농업·제조업 시대. 다섯째, 농업·제조업·상업 시대.


그리고 산업발전 단계마다 필요한 무역정책은 다릅니다


Ⅰ. 아직 농업이 발달하지 않아 제조업 육성에 신경쓸 필요가 없을 때에는 자유무역을 통해 농산물을 수출하고 제조 상품을 수입해야 합니다. 


Ⅱ. 이제 농업이 많이 발달하여 제조업 육성 필요성이 부각된다면 자유무역을 통한 외국 제조 상품 수입의 이점은 줄어듭니다. 이 단계에서는 보호무역을 통해 국내 유치 제조업을 보호해야 합니다. 


Ⅲ. 그리고 제조업이 고도로 발달한다면 보호정책은 정당화 되지 않으며 자유무역으로 돌아가 무역의 이점을 살려야 합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유치산업보호 및 보호체제는 오직 두번째 단계에 있는 민족들에게만 정당화 된다는 의견을 명확히 밝힙니다. 


만약 제조업 발달 이후에도 보호체제를 지속한다면 "해외 경쟁을 완전히 그리고 일거에 배제하고 보호해야할 민족을 타 민족들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한다면, 사해동포주의 경제학의 원칙에 충동할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주의해야 할 이익에도 충돌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보호 체제는 오직 민족의 산업적 육성 목적(only for the purpose of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the nation)에서만 정당화 될 뿐입니다. 외국 경제학자들이 유치산업보호론을 소개할 때 영문명을 Temporary Protection for Infant Industry, 즉 '유치산업을 위한 일시적 보호'로 주로 작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직접 읽어봅시다.


● 제15장 민족 정체성과 민족의 경제학


경제적인 면에서 민족들은 다음의 발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원초적 야만 시대, 목축 시대, 농업시대, 농업 ∙ 제조업 시대, 농업 ∙ 제조업 ∙ 상업 시대. (...) 


농업이 덜 성숙했을수록, 그리고 대외 무역이 국내 농산물과 원재료를 타국의 제조 상품과 교환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수록, 거기서 그 민족이 아직 야만 상태에 빠져 있어 절대군주제 정부 형태와 입법을 더 많이 필요로 할수록, 자유무역은 즉 농산물 수출과 제조 상품 수입은 그 민족의 복지와 문명을 더욱더 촉진할 것이다. (...)


반대로 한 민족의 농업, 산업 및 사회적, 정치적, 시민적 상태가 전반적으로 많이 발달해 있을수록, 그 민족은 국내 농산물과 원재료를 외국의 제조 상품과 교환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사회적 상태 개선을 위해 이익을 그만큼 덜 볼 것이며, 그 민족보다 우월한 외국의 제조업 역량의 성공적 경쟁에 의해 더욱더 큰 손해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


오직 후자의 민족들, 즉 제조업 역량을 배양하고 이를 통해 최고도의 문명과 교양, 물질적 복지와 정치력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특성과 수단을 보유하는, 그러나 이미 더 선진화된 해외 제조업 역량의 경쟁에 의해 진보가 정체된 민족들에서만, 제조업 역량의 배양과 보호 목적을 위한 무역 규제는 정당화되며, 


또한 그런 민족들에서 제조업 역량이 해외 경쟁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강화될 때까지만 정당화되며 그때부터는 국내 제조업 역량의 뿌리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정당화된다. (...)


보호 체제는 해외 경쟁을 완전히 그리고 일거에 배제하고 보호해야할 민족을 타 민족들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한다면, 사해동포주의 경제학의 원칙에 충동할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주의해야 할 이익에도 충돌할 것이다. (...)


천연산물과 원재료에 대한 자유무역의 제한이 제한을 가하는 민족에게도 크나큰 폐해를 가져온다는 것, 그리고 보호 체제는 오직 민족의 산업적 육성 목적(only for the purpose of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the nation)에서만 정당화된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모든 민족, 온 인류의 복지와 진보에 펼쳐지는 거대한 유익을 일으킬 것이다.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259-271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리스트가 보기에 개별 국가들이 처한 단계(stages)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유무역의 이점만을 설파하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은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스트는 "그 학파는 고도의 경제적 성숙에 도달한 민족들과 낮은 단계에 있는 민족들을 구별할 줄 모른다.[각주:12]"(The school recognises no distinction between nations which have attained a higher degree of economical development, and those which occupy a lower stage.) 라고 반복해서 비판을 가합니다. 


이번 파트에서 계속 강조하지만, 리스트에 중요한 것은 '산업발전 단계'(stages of industrial development)입니다. 그는 교조적인 보호무역주의자 혹은 유치산업보호론자가 아니었습니다. 되려 궁극적으로 자유무역을 추구했던 자입니다[각주:13].


리스트는 역사로부터 배울 것(the Teachings of History)은 발전 단계에 따라 체제를 변경할 수 있고 또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may and must modify their systems according to the measure of their own progress) 이라고 재차 주장합니다. 


● 제 10장 역사의 가르침(the Teachings of History)

(주 : 한국어판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영어 원문[각주:14]을 본 후 제 방식대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끝으로, 역사는 최고도의 부와 생산 역량 달성에 필요한 자연적 자원을 갖춘 국가들이 그들의 발전단계에 따라 체제를 변경할 수 있고 또 변경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첫번째 단계에서,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고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더 앞선 민족과 자유무역을 채택해야 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상업제한을 통해 제조업자, 어업, 해운업, 대외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부와 생산 역량의 최고도에 도달한 이후, 자유무역과 자유경쟁의 원리로 점진적으로 회귀하여, 농부들 제조업자들 상인들을 게으름에 빠지지 않게하고 이들이 달성한 우위를 유지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각주:15]


- 프리드리히 리스트, 이승무 옮김, 1841년,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지만지, 179




※ 자유무역 vs. 보호무역 논쟁, 깊이있는 이해를 위한 물음


이번글을 통해 살펴본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사상 · 철학 논쟁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둘러싼 논쟁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자유무역이 옳다! vs. 보호무역이 옳다!"와 같은 1차원적 접근 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지게끔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언제' 자유무역 정책을 쓰고, '언제' 보호무역 정책을 써야하나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접근 방식은 무역정책을 집행할 '상황'(circumstances)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때에는 자유무역 정책이 옳으며, 또 다른 때에는 보호무역 정책이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리스트는 산업발전 단계를 상황의 구분으로 제시했고 이를 오늘날 개발도상국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거대한 단계의 구분보다는 좀 더 타당한 상황 구분이 필요합니다.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 무엇이 '중심'을 이루어야 하나


자유무역 및 보호무역 정책을 상황에 따라 달리 구사할 수 있다면, '평상시'(normal)에 어떠한 정책이 중심을 이루어야 하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리스트의 주장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보호무역 · 선진국은 자유무역을 중심으로 하면 될 것 같지만, 앞서 말했듯이 리스트의 구분은 너무 거대합니다. 그의 구분을 그대로 따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타당하다면,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내에서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 일이 없었을 겁니다.


▶ 새로운 학자와 새로운 주장의 등장 ...


새로운 물음에 논리적인 답을 말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생각을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좀 더 확장시켜주는 새로운 학자와 새로운 주장을 다음글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1.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2. [국제무역이론 ① 개정판] 1세대 국제무역이론 -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http://joohyeon.com/216 [본문으로]
  3.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③]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ttp://joohyeon.com/266 [본문으로]
  4. 애덤 스미스를 주축으로 한 고전파 혹은 cosmopolitical economy를 의미 [본문으로]
  5.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4편 2장 국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재화의 수입제한, 570쪽, 비봉출판사 [본문으로]
  6. 프레드리히 리스트. 미국정치경제론, 경상대학교출판부, 33-34쪽, [본문으로]
  7.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4장 사경제학과 민족경제학(Private Economy and National Economy), 지만지, 245쪽 [본문으로]
  8.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서론, 21쪽 [본문으로]
  9.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1장 정치경제학과 사해동포주의 경제학, 199쪽 [본문으로]
  10.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1장 정치경제학과 사해동포주의 경제학, 193쪽 [본문으로]
  11.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1장 정치경제학과 사해동포주의 경제학, 193쪽 [본문으로]
  12. 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4장 사경제학과 민족경제학, 251쪽 [본문으로]
  13. 이러한 평가는 Graham, 1923, Some Aspects of Protection Further Considered, QJE [본문으로]
  14. 진정한 원문은 독일어; [본문으로]
  15. Finally, history teaches us how nations which have been endowed by Nature with all resources which are requisite for the attainment of the highest grade of wealth and power, may and must—without on that account forfeiting the end in view—modify their systems according to the measure of their own progress: in the first stage, adopting free trade with more advanced nations as a means of raising themselves from a state of barbarism, and of making advances in agriculture; in the second stage, promoting the growth of manufactures, fisheries, navigation, and foreign trade by means of commercial restrictions; and in the last stage, after reaching the highest degree of wealth and power, by gradually reverting to the principle of free trade and of unrestricted competition in the home as well as in foreign markets, that so their agriculturists, manufacturers, and merchants may be preserved from indolence, and stimulated to retain the supremacy which they have acquire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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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③] 한국은 '어떤 무역체제'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나 -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애매모호함

Posted at 2018. 10. 15. 00:57 | Posted in 경제학/국제무역, 경제지리학, 고용


※ 한국은 어떻게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나



35년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뒤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남았던 대한민국은 2018년 오늘날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섰습니다. 한국은 경제성장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과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GDP 추이를 그래프로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전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학부 경제성장론 교과서 표지가 한국이라는 점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모두가 이견없이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어떻게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나?"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혹자는 북한과 비교하여 자유시장체제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다른 누군가는 국가가 수출 및 금융지원 제도를 통해 기업을 통제하면서 발전[각주:1]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지향하면서 무역개방도를 높여온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보호무역을 통해 특정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냉전 시기 미국의 외교정책 아래에서 일본과 국제분업체제를 구축한 덕분에 급속한 성장을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반박하며 미국이 독재정권을 용인하고 한일수교를 독촉한 결과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고착화 되었고 민주화 달성이 지연되었다고 말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1961-79년까지 약 19년간 집권한 박정희정권의 공로를 치켜세우는 쪽도 있고, 반대로 박정희정권기에 수립된 경제정책이 오늘날까지 한국경제에 해를 끼치고 있다[각주:2]고 말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사항은 "한국은 대외지향적 무역체제를 추구한 덕분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였다(outward-looking trade regime)" 입니다. 대내지향적 수입대체 산업화를 선택한 중남미[각주:3]와는 달리, 한국은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진한 덕분에 오늘날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나타난 세부적인 행위가 시장주의적인지 국가주도적인지 · 자유무역인지 보호무역인지에 대해 이견들이 존재하고, 당시 미국과 박정희정권의 공과에 대해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어찌됐든 무역교류 확대를 통해 수출과 수입을 증가시켜온 대외지향적 무역체제가 경제발전에 핵심이었다는 건 다수가 동의합니다.


이 글의 주제는 한국경제 성장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게 아니라 [국제무역논쟁] 시리즈 속에서 한국경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역'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은 2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중남미와 달리 당시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를 선택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전글[각주:4]에서 살펴봤듯, 중남미가 수입대체를 선택한 배경은 '산업화를 위한 제조업 육성' · '1차상품에 치중된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함' ·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중남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35년간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겪고 경제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경제적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퍼져있었고 농업에 치중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은 자립경제와 산업화를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진흥 정책을 산업화 전략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입대체를 추구하다가 수출진흥에 더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부분적인 수입대체를 펼치는 동시에 항상 대외지향적 정책을 지향했습니다. 이때 부분적인 수입대체도 대내지향적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출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입대체 였습니다. 자동차 · 조선소 등 중화학공업 부문을 육성한 뒤 수출액을 늘린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중남미와 한국의 모습을 대조해보면, 처음에 선택하였던 대내지향적 수입대체를 계속 추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 아찔합니다. 따라서, 1950-60년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로 나아간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대외지향 수출진흥 산업화를 통한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나,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나? 


두번째 물음은 앞으로의 [국제무역논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질문입니다. 


분명 한국은 대외교역을 증가시켜온 수출진흥 정책 덕분에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외교역량은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보호무역' 덕분에도 증가할 수 있습니다. 


1920-30년대 호주의 보호무역[각주:5]은 1차 상품 특화로 인한 수확체감 및 소득분배 악화를 탈피하는 걸 목적으로 하였고, 1950-70년대 중남미의 수입대체[각주:6]는 아예 대내지향적 무역체제를 의미했습니다. 이 둘의 경우에서 교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을 구사하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1960~70년대 한국은 보호무역 정책을 하면서도 교역량 확대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박정희정권은 향후 수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특정 산업을 선택하여 집중 육성하고 수출보조금 등의 지원을 늘려나갔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의 이러한 모습은 '유치산업보호의 성공사례'(Infant-Industry Protection)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공요인을 온전히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라 하기에도 애매모호함이 있습니다. 1967년 7월 상공부는 수입허가 품목을 규정해온 포지티브 리스트에서 이제 수입금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입을 자동승인 하겠다는 네거티브 리스트로 전환하는 등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수입관세율도 점차 낮춰가며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커 온 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한국정부는 자유무역의 이점(gains from trade)을 살리는 방향을 꾸준히 추구했습니다. 


만약 온전히 국내산업 육성 및 보호에만 집중했다면 생산성 낮은 기업의 퇴출 등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아 비효율만 초래됐을 겁니다. 한국정부는 관료와의 결탁을 통해서 생존할 수 있는 국내시장이 아닌 가격과 품질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을 유도하고, 달성해야할 수출목표액을 완수해야 하는 수출책임제 등의 규율(discipline)도 강력히 부과함으로써 항상 경쟁체제를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형식은 국가가 주도했더라도 내용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의 이점을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의 경제발전 성공요인을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는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는지는 [국제무역논쟁]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결국 "유치산업보호론이 언제 유효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둘러싼 논점입니다.


우선 이번글에서는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로 나아간 배경과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이점을 모두 살릴 수 있었던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음글에서 [유치산업보호론]의 등장배경과 논리, 문제점 그리고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살펴봅시다.




※ 내포적 공업화와 자립경제 달성을 목표로 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통화개혁을 통해 내자를 동원하고 종합제철소 등을 건설하려 함


<1965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정부는 증산과 더불어 수출을 대지표로 삼았읍니다. 공업원료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수출은 경제의 생명입니다. 2차대전직후, 영국의 「처어칠」수상의 『수출 아니면 죽음』이란 호소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


앞으로 수년간만 국내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시책을 수출무역에 집중한다면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수출입면에서 자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경제시책의 방향이 무역진흥에 집결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무역에서 출발하여 무역에서 안정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 출처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대통령 박정희, 1965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강조표시는 블로그 글쓴이 본인이 한 것)


1965년 1월 16일, 대통령 박정희는 연두교서를 통해 "수출 아니면 죽음" 이라고 말하며 "경제시책의 방향이 무역진흥에 집결"할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1965년은 박정희정권이 수출제일주의를 본격적으로 내세운 첫 해 입니다.


그렇다면 1961~64년에 박정희가 내세웠던 경제정책은 수출중심이 아니었을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했고 1963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합법적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박정희정권이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통해 한국경제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출제일주의는 이들이 처음부터 내걸었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 박정희와 5·16 쿠데타 세력이 처음에 원했던 건 자립경제 달성

- 자립경제와 자주적 공업화를 추구한 박희범의 '내포적 공업화 전략'


1961년 박정희와 5·16 주도 세력들이 처음 가졌던 생각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난 자립경제 달성' 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963년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를 통해 "미국의 원조 정책을 기저로 하는 한국 경제의 이러한 경향은 기간산업, 중소기업 등 국내 생산 공업을 답보 상태로 낙후시킨 반면,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국민의 정신면에 회복할 수 없이 큰 멍을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1960년대의 한국은 확실히 외래상품이 한국 시장을 점령한 시기였다" 라고 말하며, 자립경제 달성에 못미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 경제학자 박희범 (1922~1981)

  • 주요 저서 : 『한국경제성장론』 (1968)


집권세력의 생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자문 위원으로서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에 관여한 인물이 박희범 입니다. 그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intensive industrialization)[각주:7]을 내세웠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 입니다. 


중남미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은 기초적 소비재를 우선 대체하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박희범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제철 등 금속공업, 기초화학공업, 조선, 공작기계 등 기초적 생산재를 우선 대체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어찌됐든 대외의존을 줄이는 자립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박희범이 이러한 이론을 주장했던 근간에는 냉전 이데올로기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해야 하며 따라서 대미 자주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서를 통해 "미국의 대한 정책은 한국에 대한 소비 시장화, 일본을 위한 예속화 작업이었다"[각주:8]라고 비판하며, 공업화를 가능케하는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배양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또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을 발달시킨 선진 산업국가에만 유리하다고 생각하며, 신고전파 자유주의경제는 선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적 비교 생산비의 원리처럼 국제분업의 원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 자립경제는 국제수지의 균형을 달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공업화, 즉 내포적 경제성장을 노리는 것"[각주:9]라고 주장하며, 현재의 비교우위에 고착화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166)

- 수입대체와 내자 동원의 강조 → 통화개혁과 산업개발공사 


  • 경제기획원,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56-59쪽

  • 당시 군사정부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 외자의존을 줄이고 내자동원을 강조했다


박희범과 군사정부가 공유했던 생각은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에서 구현되었습니다. 


이 안에서 군사정부는 수출산업 육성 보다는 종합제철소 건립 등 기초적 생산재의 수입대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에 수출증대는 6대 계획의 중점 중 5번째에 언급될 뿐이었습니다. 수출에 있어서도 2차 산품인 공산품이 아니라 1차 산품인 농업 생산물이 강조되었습니다. 


또 다른 주목할 특징은 '내자 동원의 강조' 입니다. 위의 표에서 나와있듯이 계획된 내자 비중이 약 75%에 달하는데, 박희범과 군사정부는 외자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 내자 동원에 힘을 쏟았습니다. 

 

계획 달성을 위해 군사정부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통화개혁' 이었습니다. 1962년 6월 9일 밤 10시 긴급통화조치법이 기습적으로 발표되며 예금동결이 이루어졌고, 동결된 예금은 6개월 내에 산업개발공사 주식으로 대체될 계획이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는 내포적 공업화론을 주장했던 박희범의 생각이 응집된 기관이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 운용 계획안은 투자 대상으로 약 40종류를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유공장 · 비료공장 · 종합제철공장 · 시멘트공장 · 종합기계공장에 우선순위"[각주:10]를 두고 있었습니다. 


산업개발공사는 기초적 생산재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고, 통화개혁과 예금동결 통해 획득한 국내 자본을 동원하여 산업화를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내포적 공업화 전략과 통화개혁 그리고 산업개발공사를 통한 종합제철소 건립은 하나로 연결된 묶음이었습니다.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자원의 동원 방법에 관해 상대적으로 대규모의 내자 동원에 관한 획기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희생해서라도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강제적 자원 동원이 있어야 당초의 계획대로 기간산업을 건설할 수 있고 그래야 빠른 시일 안에 자립적 국민경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내자 동원이 순조롭지 않은 가운데 통화개혁과 같은 혁명적 내자 동운 방법을 구상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이와 같이 모아진 자금을 산업개발공사라는 준 국유기업에 집중시키는 방법도 내포적 공업화론자들이 구상하는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자원 동원과 일치"[각주:11] 했습니다. 




※ 외화 부족으로 인한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통화개혁과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둘러싼 미국의 반대

- "비교우위론에 어긋나는 제철소를 왜 건설하려 하느냐"


자립경제와 내포적 공업화를 위해 제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시행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흔들리게 됩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의 입장이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제1차 계획이 목표로 한 경제성장률 7.1%가 너무 높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또한 통화개혁을 통한 예금동결이 경제를 국유화나 통제경제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시했습니다. 더 큰 쟁점은 종합제철공장 건설 계획이었습니다. 1962년 당시에 쓰여진 기사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AID가 본 한국공업건설 (上 제철소의 경우)>


경제5개년계획을 특징지으고 있는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그러기에 기자는 워싱턴에 닿자마자 AID가 제철소와 비료공장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타진해보기 위하여 AID의 문을 두드렸다. (...)


기자가 AID 당국자들과 만나서 얻은 결론은 제철소는 사무적으로는 절대로 무망한 것으로 느껴졌으나 정치적으로 배려를 한다고 하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비료공장은 AID가 주장하는 바 과인산질소 배합비료 공장을 세우는 데 한국측이 동의한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거부하교 요소 25만톤 용량을 만든다는 종래의 주장을 견지한다면 이 역시 AID에서 돈을 꾸지 못할 것이라 것이다.


AID는 대체로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① 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 탄 6천 칼로리 이상나는 역청회 등 제철에 필요한 자연자원이 극히 빈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50% 이상의 철분을 가지고 있는 철광석의 매장량은 지난번 탐광에 의해서도 겨우 5백만톤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이 나왔으니, 그처럼 빈약한 자원을 상대로해서 연간 25만톤의 제철소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는 것이다. (...)


② 그러니까 한국서 제철을 하자면 외국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사오지 않을 수 없는데 철광석을 100만톤, 석탄을 150만톤을 사오자면 적어도 3,500만불의 외화를 매년 지출하여야만 할 것이니 4,200만불의 수출실적 밖에는 못 가지 한국의 외화사정 아래서는 이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물론 철광석과 석탄도 연불 등 상업차관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기도 하나 AID 규정은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차관을 받는다는지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기로 되어있으므로 상업차관에 의한 원료 공급도 안된다는 것이다. (...)


③ 설령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준다고 해도 철의 시장경쟁은 지금도 치열하지만 장차 더욱 더 백열전을 전개할 것이니 과연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경쟁에서나마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데는 의문이 짙다는 것이다. 일본도 비록 철광석도 석탄도 사다가 쇠를 녹이고 있다고 하나 경영기술에 있어서나 작업기술에 있어서나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일본과 같은 생산비로서 제철을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


⑤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제철소를 만들려면 적어도 1억 5천만불을 들여야 할터이니 그 돈을 다른 산업들 한국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세우는데 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는 것 같다. 


- 이동욱, 1962년 10월 20일, 동아일보 칼럼/논단

- 네이버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지금 시점이 아닌 당시로 돌아가서 감정을 대입해서 보자면 상당히 비참한 상황 그 자체였습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제1차 계획이 담고 있던 내포적 공업화론 달성의 핵심인 종합제철소 건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격하게 표현하면 "주제 넘으려 하지 말고 수입해서 써라"나 다를 바 없습니다.


미국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이유는 크게 2가지 입니다.


첫째, 한국의 제철소 건설 시도가 비교우위 원리에 벗어난다 입니다. 


제철소는 원자재인 철광석과 석탄 등을 제련하여서 철판을 만드는 곳인데, 한국은 원자재를 풍부하게 가진 국가가 아닙니다. 헥셔-올린의 무역이론[각주:12]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relative abundant resource)을 가진 국가가 그 자원이 집약된 산업(resource-intensive)에 비교우위를 가지는데, 한국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찌어지 철판을 생산한다고 해도 과연 일본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겠냐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일본은 70년전부터 제철소를 운영하며 획득한 기술수준으로 낮은 생산비를 유지하는데, 이를 한국이 수년내에 따라잡기 힘들거라는 전망이죠.


둘째, 제철소를 건설하고 철광석 등 자원을 수입하기 위한 외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때 당시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은 국내자본 동원을 강조하였는데, 종합제철소와 같은 큰 규모의 기반시설을 짓기 위해서는 국내자본만으로는 턱도 없었습니다. 당시 군사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2차산업 공업화를 위해 필요한 외자비중을 43.4%로 전산업 평균 25%에 비해 높게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수출주도체제가 아닌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기 어려웠으며, 미국마저 차관지원을 거부한 상황에서 필요한 외자를 마련하기가 불가능 했습니다. 어찌어찌 제철소를 건설한다고 해도 차후에 철광석 등 원자재를 수입할 외화도 없었습니다.


결국 종합제철공장 건설 계획의 좌절은 내포적 공업화 전략이 실패하고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군사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 · 보완 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의 전환

- 1964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 → 공산품 수출 계획을 늘리다

- 1963년 면방직산업 수출증대가 경제관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산업정책 · 경제발전 관점에서 수출진흥 정책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


결국 박정희정권은 1962년 1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작업에 착수합니다. 


집권세력은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내포적 공업화 보다는 수출증대를 통해 외화를 획득할 필요성을 이전에 비해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자립경제를 주장했던 박희범 등이 물러나고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주장한 경제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2월 이른바 '보완 계획'을 확정발표합니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원계확과 보완계획에 담긴 수출 계획 비교

  • 원료별 제품, 이른바 공산품 수출계획이 대폭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출처 :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원계획과 보완계획의 차이는 '수출 계획'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원계획에서는 식량으로 대표되는 1차 산품이 수출 계획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지만, 보완계획에서는 원료별 제품, 이른바 공산품의 수출 계획이 대폭 상향되었습니다. 


원계획에서는 1966년 공산품 수출액수 계획이 1천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보완계획에서는 4천3백만으로 수정되었죠. 해당년도의 수출비중을 살펴보아도, 공산품의 수출비중은 1964년 30%, 1966년 38%로 원계획보다 10-20% 포인트 상향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실제 공산품 수출 실적은 계획을 초과달성 하였고, 1970년에는 84%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경제관료들이 자신만만하게 공산품 수출 계획을 상향조정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63년에 공산품 수출 실적이 예상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경영·경제학자 서문석[각주:13] · 최상오[각주:14] · 김두얼[각주:15] 등은 1963년 공산품 수출 증가의 요인으로 면방직산업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서문석의 2009년 논문 <해방 이후 한국 면방직산업의 수출체제 형성>에 따르면, 당시 면방업계가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국내 면제품시장 수요감소로 과잉공급 상황이 초래되자 상품판로 확보를 위해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외국산 원면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로 면제품을 수출한 이후 그 대금으로 수입을 해오기 위해서 입니다.


면방업계가 수출증대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 결과, 1962년까지 전체 면포생산량 중 수출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에 불과했으나, 1963년에 20.6%로 대폭 증대되었고 1964년부터는 전체 면포생산량의 약 50% 가량이 수출용으로 생산될 정도로 수출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 한국의 GDP 대비 수출비중 추이. 1953~2017넌

  • 수출비중은 1953년 1.7%, 1964년 5.0%에 불과했으나, 이후 급속히 증가하였다

  • 출처 : 국가통계포털 KOSIS

 

이렇게 1963년 면방직 산업의 수출증대를 목격한 경제관료들은 영감을 얻게 되었고, 1964년에 내놓은 '보완계획'에서 공산품 수출 계획을 대폭 상향하였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단순히 수출계획만 높게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재정 · 금융지원 및 낙후된 생산시설 교체 · 사회기반시설 건설 등 산업정책적 관점에서 포괄적인 수출지원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수출지향 정책은 단순한 무역정책이 아닌 산업정책 및 경제발전 전략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0-50%를 오가며 높은 생활수준을 달성하는 제1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64년 중반에 제시된 수출진흥 종합시책과 1965년 확대 개편된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살펴보면서, 1960-70년대 박정희정권의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을 세세하게 알아봅시다.  




※ 각종 수출 지원 정책과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통한 규율 부과


1964년 6월 24일, 상공부는 간접적인 지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수출진흥을 촉진하기 위하여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만들어 발표하였습니다. 종합시책에는 ① 1964년도 수출 목표를 종전 1억 500만 달러에서 1억 2천만 달러로 상향 ② 수출진흥위원회 및 해외 주재 공관에 수출 책임 영업부과 ③ 수출 진흥 세제 우대조치 및 2억원 규모의 수출보조금 부활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수출진흥을 위해 재정·금융 지원이라는 당근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수출진흥위원회를 통해 수출 책임 영업이라는 규율(discipline)과 채찍도 구사한 점입니다. 


만약 정부지원 이라는 당근만 제시했다면 이것만 쏙 받아놓고 경영은 게을리하는 비효율적 기업이 양산될 수 있었을텐데, 정부는 수출 목표액 달성에 미달하는 기업은 차후 지원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엄격한 규율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규율 정책은 정부주도 정책이 초래할 수 있는 단점을 해소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번 파트에서 산업화를 위해 정부가 제시한 당근과 채찍을 살펴봅시다.



1960년대 초기의 수출지원 정책은 1950년대 후반보다 양적으로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위의 첨부된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부터 시행되어온 정책에 더하여 수출용 자본재 수입에 대한 관세 감면제도(1964년) 및 수출용 원자재 수입금융(1963년), 수출산업 육성자금(1964년) 등 재정 · 금융지원 정책이 추가되었습니다.



수출활동을 직접적으로 독려하는 수출보조금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 중반 수출불 당 보조금은 1원을 넘지 못했지만, 1961년과 1965년을 기점으로 큰 폭의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지원 정책에 그치지 않고 규율을 부과하는 역할을 한 것이 수출진흥확대회의 입니다. 수출 진흥 정책 심의기구로서 1962년 12월에 설치된 수출진흥위원회는 1965년 1월 대통령 직접 참석하고 결정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로 확대개편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1979년 동안 개최된 회의 총 152회 중 147회나 참석하면서 수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할 때 설정한 수출계획 이외에 매년 수출목표를 새롭게 책정함으로써 수출을 독려하였습니다. 매년 수출목표 성장률은 시기마다 24.1%~45.2%를 가졌고, 1975년과 197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과달성 하였습니다. 


수출진흥확대회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수출책임제' 입니다. 1964년 해외공관별로 수출목표를 할당하면서 시작된 수출책임제도는 1965년 품목별 · 해외무역관별 · 단체별(수출좝, 협동조합별) · 도별, 1966년 부처별, 1967년 수출공단별 · 은행별, 1970년 수출산업 시설재 수입업체 · 차관도입업체 · 외화다액 소비업체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연초에 제시된 수출할당액을 채워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부과된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매월 개최된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점검하였습니다. 상공부는 총량별 · 상품구조별 · 품목별 · 지역별 · 국가별 실적이 수출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지 보고하였습니다. 


이행에 소홀하거나 미달하는 기업에게는 재정 · 금융지원을 중단하고 심한 경우 경영권을 박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과 함께 주어진 성과책임 부여는 정부주도 정책이 초래할 수 있는 방만과 나태를 방지하고 수출진흥 정책의 효과를 최대한 극대화 하였습니다. 




※ 산업정책적 관점에서 실시된 무역자유화


한국이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 수출진흥 정책을 펼쳤다고 해서, 외화가 반출되는 수입은 장벽을 쌓고 꽁꽁 잠가둔 것은 아닙니다. 1967년 7월 상공부는 수입허가 품목을 규정해온 포지티브 리스트에서 이제 수입금지 품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입을 자동승인 하겠다는 네거티브 리스트로 전환하는 등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독과점 품목 관세율이 높은 품목, 그리고 국내산업에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는 품목을 제외하고 64개를 금지 품목으로, 321개를 제한 품목으로 하는 네거티브 리스트를 책정했습니다[각주:16]. 전반적인 수입관세율도 점차 낮춰가며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커 온 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상공부는 이후 발간한 『상공정책 10년사』(1969)를 통해 무역자유화 필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개방경제 체제를 지향함으로써 그동안 보호무역의 그늘에서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온 국내산업의 체질 개선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해 수출 증진에 기여케 하는 것, 둘째 수입자유화 확대로 물가가 등귀하는 상품의 수입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국내 물가 안정을 기해 국내 소비자를 보호, 셋째 IMF 및 GATT 가맹국으로서 국제 교역 확대에 기여하려는 것[각주:17] 입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가 정말 개방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바라고 무역자유화에 찬성한 것만은 아닙니다. 정부가 의도한 것은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 입니다. 


1967년 11월 한국정부는 수입자유화 조치에 이어 탄력관세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탄력관세란 국내외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관세율을 탄력적으로 운용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입 증대로 국내산업이 어렵거나 국제수지가 악화될 때 임시적으로 관세율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보호하기 위한 산업과 관련된 품목은 높은 관세를 유지하거나 더 높이고, 수출품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 수입은 관세를 인하하였습니다. 또한, 국제경쟁력이 있는 국내산업의 체질 개선을 위해, 경쟁력을 갖춘 제품에 한해서 관세율을 인하하면서 체질 개선을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정부는 발전단계에 있는 산업은 보호하기 위해 외국상품을 수입금지 리스트에 올리거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외국상품 수입을 허가하고 관세율을 인하시켜 경쟁에 더욱 노출시키는 산업정책적 관점에서의 무역정책을 구사했습니다.




※ 산업정책의 정점 -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1973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 여러분들에게 경제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 시대에 들어갔읍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세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을 해야 되겠읍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늘어날 수 있읍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선진 국가가 될 수 없읍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등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범국민적인 과학 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읍니다. 이것은 국민 학교 아동에서부터 대학생,사회 성인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우리가 전부 기술을 배워야 되겠읍니다.


그래야만 국력이 빨리 신장하는 것입니다. 80년대 초에 추이가 100억 달러의 수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 상품 중에서 중화학 제품이 50%를 훨씬 더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조선,기계,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의 제품 수출을 목적으로 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읍니다.


- 출처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대통령 박정희, 1973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강조표시는 블로그 글쓴이 본인이 한 것)


한국정부 산업정책의 정점은 1973년부터 중점적으로 시행된 중화학공업화 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 "80년대 100억 달러 수출"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1972년 수출달성액이 18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꿈 같은 목표를 제시한 겁니다.


1973년 이전 중화학공업 육성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부터 추구했던 종합제철소 건설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재차 시도하였고(오늘날 포스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기간 중 석유화학단지를 울산에 조성하였습니다. 1960년대의 철강공업 · 석유화학공업 육성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밑거름이 됩니다.


박정희정권이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화를 더욱 중점적으로 추진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경제발전 도약을 위한 경제적이유. 둘째, 북한 무력도발 대응을 위한 군사안보적 이유 입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은 장기 수출계획으로 1981년 53억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1972년 수출달성액 18억 달러와 그동안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나름 합리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박정희는 1980년에 100억 달러 수출과 GNP 1,000 달러를 달성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공업 위주인 현재의 공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여기에 더하여,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미중 데탕트가 형성되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했습니다. 이에 한국정부는 자립 · 자주 국력 배양을 위해 방위산업을 포함한 중화학 공업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1971년 말 대통령 경제2비서실은 <공업구조개편론> 마스터플랜 수립에 착수하였고 1973년 1월 30일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을 최종적으로 내놓았습니다. 


공업구조개편론 (마스터플랜)

(...)

제1장 계획작성

1. 수출 100억불 1인당 GNP 1,000불을 목표로 한 국가 산업 기본 모델을 작성한다. (...)


제2장 이념의 도출


1. 주도업종의 선점


. 본 계획 기간에는 중화학공업을 주도 육성 업종으로 한다. 특히 기계공업을 집중 육성한다.

1)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구조를 구축했다. 중공업 유성을 위한 기초가 만들어졌다.

2) 종합제철 건설은 철강 관련 산업과 비철금속 등의 육성이 필요하다.


나. 일본에서는 57년부터 중화학공업 정책을 명백히 한 신장기 경제계획을 수립하여 오늘의 경제 대국으로 유도했다.

1) 일본의 중화학공업 정책의 배경은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수요의 탄력성이 높고 기술 진보가 빠른 산업이라는 데 있었다.

2)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 후 10년 만에 수출 100억불의 고지를 점령했다.


다. 중화학공업 정책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시기를 놓친다.

라. 주도업종으로서의 중화학공업과 병행하여 수출 특화산업은 계속 강화 육성한다,


2. 중화학공업

가. 중화학공업의 확대는 세계경제 및 무역확대의 기본 방향이다.

나. 중화학공업 중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할 업종은 ① 기계류 ② 조선 및 수송기계 ③ 철강 ④ 화학 ⑤ 전자공업이다. 이것은 화학 플랜트, 발전소, 조선 및 자동차 공업과의 유기적 결합이 필요하다.


(...)


- 김광모, 2015, 『중화학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에서 재인용


<공업구조개편론>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당시 박정희정권은 1950-6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화 성공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일본은 1956년 수출액은 24억 달러에 불과하였지만 신 일본연도 개조론이란 정책하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여 196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정부는 집중육성 업종으로 선정한 ① 기계류 ② 조선 및 수송기계 ③ 철강 ④ 화학 ⑤ 전자공업 등을 실제로 키우기 위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미 건설해놓은 포항 제철소는 확장하여 북한보다 4.2배의 압연능력을 갖추고, 조선소는 울산 이외에 거제에도 추가 건설하여 세계 5위권내 조선강국으로 발돋움 하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여천(여수)에는 제3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여 세계 10위권의 생산능력을 1980년대 상반기까지 갖추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창원에 대단위 종합기게공장을 건설하여 기계류 및 대형플랜트의 완전 국산화와 원자력 발전설비 및 건설 중장비의 국산화를 추구했습니다. 구미에는 대규모 집적회로 등 최첨단기술의 전자부품 국산화와 가정용 정밀전자 기기 생산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대성공으로 돌아왔습니다. 1980년 목표 수출액은 100억 달러였는데 이를 3년이나 앞당겨서 달성하였고, 목표 1인당 GNP 1,000달러는 1979년에 성취하였습니다. 


1979년 수출상품 중 90% 이상이 공산품이었으며, 공산품 중 42.6%는 중공업 제품이었습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 시행 이전, 한국경제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8.9%에 불과하였으나 1979년에는 54.7%로 급등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중화학공업은 한국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포항 제철소, 울산 조선 · 자동차 · 화학, 광양 및 여수 제철소와 화학단지, 구미 전자단지 등 중화학산업은 지역경제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요근래 조선 · 자동차 업황부진으로 인한 영남지역 고용쇼크는 이들 업종이 지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한민국


이렇게 대한민국은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추진하였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1980년대 초반 발생했던 외채위기 속으로 중남미[각주:18]와 함께 빨려 들어갔을텐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되었습니다.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간단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글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2가지 물음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첫째, 중남미와 달리 당시 한국이 대외지향적 수출진흥 산업화를 선택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 


한국이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외화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종합제철소 건설 등 공업 ·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계·생산설비 등 자본재(capital goods)를 수입해와야 했는데 국내자본으로는 턱도 없었습니다. 1962년, 내포적 공업화론자들이 시도했던 '통화개혁을 통한 내자 동원'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런 상황에서 1963년 면방직산업의 획기적인 수출량 달성은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제 경제관료들은 '공산품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 가능성에 자신감을 품게 되었고, 수출진흥 산업화로 방향을 선회한 보완 계획이 1964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외화 부족에 직면한 한국이 대내지향 정책 대신 대외지향적 수출진흥형 산업화를 선택했다"는 논리는 무언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경제발전 초기 중남미 또한 외화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남미는 오히려 '외화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각주:19] 했습니다. 


이들은 "1차 상품 생산국인 우리는 수출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했고, 외환 소득이 언젠가는 부족해질 것이기 때문에 자본재를 다른 나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중남미의 선택은 '자본재를 국내에서 생산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요인이 충분조건으로서 수출진흥형 산업화를 유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정책 선회는 단순한 외화 부족 이외에 여러 요인과 상황들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학자 기미야 다다시[각주:20]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이 좌절된 상황에서 남아있는 것을 고른 '잔여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반면, 박태균[각주:21]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수출진흥체제가 시작"되었다고 바라봅니다. 


이완범[각주:22]은 "미국은 수출을 통해 국제수지 균형을 회복한다는 축소 균형적 생각을 했을 뿐, 수출지상주의는 수출을 통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확대균형적 발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출드라이브는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독창적 현실인식이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하며, 박정희의 공로를 강조합니다. 


반면, 최상오[각주:23] · 김두얼[각주:24] 등은 "(박정희정권 수립 이후 수출이 촉진되었다는 설명은) 1960년대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세력이 제시한 역사관"이며 "민간과 정부는 이미 1950년대부터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고, 정확히 어떤 요인이 충분조건으로서 기능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충분조건으로 작용하는 요인은 애시당초 없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수록 "한 국가에게 성공으로 작용한 요인이 다른 국가에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대외지향 수출진흥 산업화를 통한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 덕분으로 봐야하나,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으로 평가해야 하나?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정부는 4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81)을 수립하면서 목표달성을 위해 민간부문을 독려하였고, 대통령은 매월마다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직접 참석하며 수출현황을 파악했습니다. 


수입금지와 높은 관세를 이용한 보호무역도 중점 산업을 육성하는데 성공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정부는 아직 경쟁력이 부족하여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산업은 수입장벽조치를 세워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시키지 않았고, 수출보조금을 통해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한국 경제발전 성공은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 덕분임이 분명한데, 왜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00% 보호무역체제나 100% 자유무역체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성공에는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불러오는 이점들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는 특정 기업을 선정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시장이 아닌 해외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만약 보호와 동시에 국내에 안주하게끔 하였다면, 기업의 생산성 정도가 아닌 정권과의 결탁여부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했을겁니다. 


또한, 자동차 · 조선 · 제철 · 전자 등 대형 산업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육성하였지만, 대외지향적인 정책이 아니었다면 좁은 국내시장 안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이들 산업은 초기 육성에 많은 고정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생산을 계속 증가시켜야만 비용이 감소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지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업이 경쟁을 뚫고 해외에서 판로를 개척할 수 있느냐가 성공더욱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는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도했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경쟁'과 '해외진출을 통한 시장크기 확대' 등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살려야 합니다

(주 : '무역이 가져다주는 보이지 않는 이익'을 수입대체와 수출진흥이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지난글 '● 무역이 가져다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implicit gain)' 참고


따라서 우리는 사고방식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야 합니다. 


"국가주도 보호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vs.

"시장중심 자유무역 체제가 중심인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는 국가의 산업정책 및 보호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이 둘은 별반 다른 게 없어 보이지만 현실 속 논의과정에서 큰 차이를 불러옵니다. 


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국가주도의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주장합니다. 과거 개도국이었던 한국과 오늘날 선진국인 한국의 차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 필요한 개도국과 경제강대국인 미국의 차이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후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산업 · 무역정책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를 우선 진단합니다. 과도한 국가개입은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나라가 국가주도 정책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도 똑같은 성공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남미와 한국의 사례에서 처럼 말이죠. 


두 관점의 차이는 이후에 살펴볼 [유치산업보호론]과 [1980년대 미국의 보호무역] 그리고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 내 무역논쟁]을 통해 더 극명하게 드러날 겁니다.




※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살펴보며 생각 넓히기 

- ① 수출로 외화를 많이 획득하는 것이 경제발전인가?


노파심에 한번 더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을 바로 잡겠습니다. 


이번글을 읽어나가면 "한국은 수출로 외화를 많이 획득해서 경제발전에 성공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을 아직 버리지 못한 사람은 '외화 획득 = 돈의 축적 = 경제발전 성공'이라고 생각할테고, 탈피한 사람은 '외화 획득 = 외국으로부터 자본재 수입 가능 = 경제발전 성공'으로 이해하실 겁니다.


한국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동차 · 조선 · 제철 · 전자 등의 산업을 육성하고 싶어했습니다. 처음에 시도했던 건 국내자본(=내자)을 동원한 자본축적 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하여 선택한 방식은 외국으로부터 기계 · 생산설비 등 자본재(capital goods)를 수입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각주:25]했습니다.    


즉, 한국이 수출진흥형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고, 수출액 100억 달러 달성을 위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이유는 '수출로 획득한 외화를 이용하여 자본재를 수입해오기 위해서' 입니다. 단순 수출 증가를 통한 외화 축적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GDP 대비 수출액 - 수입액의 비중 변화 (1957~2017)

  • 한국은 수출진흥 산업화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하였다

  • 출처 : 한국은행 ECOS


만약 중상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박정희정권기 수출진흥 산업화 정책을 바라본다면, 과거 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수출을 촉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했기 때문입니다.


  • 총자본형성, 이른바 투자 증가율 (1957~2017)

  • 경제발전 초기, 한국은 막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자본축적에 매진하였다

  • 출처 : 한국은행 ECOS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해 중요한 건 경상수지 흑자 달성이 아니라 투자를 통한 자본축적 입니다. 한국은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와 해외로부터의 차입(=대외부채)을 활용하여 외국의 자본재를 수입하였고, 이는 곧 막대한 투자로 이어졌습니다. 1960-70년대 경제발전기 한국의 연간 투자 증가율은 20%를 넘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또한, '외국으로부터 자본유입 = 경상수지 적자'[각주:26]라는 경제학 공식을 이해한다면, 경제개발기에 '막대한 투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동시에 일어난 연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살펴보며 생각 넓히기  

- ② 비교우위론을 따랐으면 한국에 제철소는 없었다?


자, 이제 이번글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최종목적지에 왔습니다. 지금부터 다루는 이야기는 앞으로 소개할 [유치산업보호론] · [1980년대 미국 보호무역] · [전략적 무역정책 논쟁] 등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데이비드 리카도가 1817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을 통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의 이점'을 주장한 이래로 오늘날까지 비교우위론은 국제무역논쟁의 주요 쟁점이 되어왔습니다. 


특히나 비교우위론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이유는 "현재의 비교우위 부문에 영원히 특화해야 하느냐?"와 "그렇다면 현재 비교열위인 제조업을 육성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에 있습니다.  


1817년 당시 영국인 리카도가 "비교우위에 입각하여 제조업에 특화하고 곡물을 수입해야한다" 주장[각주:27]한 이유는 '토지의 수확체감에서 벗어나서 높은 이윤율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영국은 수확체감 특성을 지닌 농업이 아니라 수확체증 특성인 제조업에 이미 비교우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주장입니다. 

  

따라서 "영국과는 달리 제조업이 아닌 농업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는 무역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고, 이는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논쟁[각주:28] 1950-70년대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한 중남미[각주:29]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농업 · 원자재 등 1차산업이나 단순한 공산품 생산에 비교우위를 가진 국가는 영원히 이것에만 특화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조업 발달을 통한 산업화는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1950-60년대 한국 또한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부 초기 경제정책을 고안했던 박희범이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추진한 배경에도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이미 제조업을 발달시킨 선진 산업국가에만 유리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1964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정 이후 수출진흥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한 이후에도, 한국은 비교우위론을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1970년대 시행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오늘날 전자 · 자동차 · 조선 · 제철 등등 모든 산업은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육성되었습니다. 즉, 한국은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을 따라서 경제발전 경로를 밟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한국이 비교우위론을 철저히 따라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지 않고 1차산업이나 단순 공산품 생산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봅시다. 


1962년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포기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종합제철공장 건설 좌절' 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1962년에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통해 제철소 건립을 내놓았는데,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상황을 보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기자 문구를 다시 살펴봅시다.


<AID가 본 한국공업건설 (上 제철소의 경우)>


▶ AID는 대체로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


▶ 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 탄 6천 칼로리 이상나는 역청회 등 제철에 필요한 자연자원이 극히 빈곤 (...) 빈약한 자원을 상대로해서 연간 25만톤의 제철소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


▶ 철광석을 100만톤, 석탄을 150만톤을 사오자면 적어도 3,500만불의 외화를 매년 지출하여야만 할 것이니 4,200만불의 수출실적 밖에는 못 가지 한국의 외화사정 아래서는 이 역시 불가능


▶ 설령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준다고 해도 철의 시장경쟁은 지금도 치열하지만 장차 더욱 더 백열전을 전개할 것이니 과연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경쟁에서나마 견딜 수 있겠느냐


▶ 일본 (...) 경영기술에 있어서나 작업기술에 있어서나 7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철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는 편이 더 이롭다


- 이동욱, 1962년 10월 20일, 동아일보 칼럼/논단

- 네이버 옛날신문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미국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이유에는 "한국의 제철소 건설 시도가 비교우위 원리에 벗어난다" 라는 논리가 뒷받침 되어 있었습니다. 비교우위가 아닌 산업에 특화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당시 비교우위를 가진 산업에 특화한 뒤 비교열위인 철을 수입하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날 한국은 세계 1위 제철소로 평가받는 POSCO(구 포항제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60년대 초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종합제철소 건립을 시도하였고, 한일수교 이후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포항제철을 설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한국의 제철소 건립 과정은 '비교우위론'과 '유치산업보호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후자의 정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타난 이유에는 '비교우위론이 정태적 우위(static advantage)만 고려하여 특화를 결정'케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이 제철소를 건립한다면 향후 철강업종에 비교우위를 띄며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데(dynamic advantage), 비교우위론은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 현재의 상황만 따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당시 일본이 한국에 비해서 철강산업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 연유는 선천적으로 제철기술이 뛰어나거나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일본이 한국보다 70년 일찍 철강업을 시작한 역사적 배경 덕분(historical accident) 입니다. 반대로 한국이 일본보다 일찍 제철소를 건립했더라면 1960년대 당시의 비교우위는 한국이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철강산업을 보호하면서 육성하면서 70년이라는 시간을 따라잡으면, 장기적으로는 일본보다 경쟁력 있는 제철소를 보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을 따라잡는 동안에 한국 제철소는 큰 손실을 보겠지만, 정부보조를 받아서 버틴다면 언젠가는 우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지금 제철산업에 비교우위가 있느냐"를 따지기 보다는 "향후 제철산업에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느냐"라는 물음을 던져야 마땅합니다. 한국정부는 후자의 물음을 던진 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어느 경우에나 비교우위론을 탈피한 이후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경제발전 달성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1960년대 비교우위론을 따르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결국 세계 제1위 제철소를 보유하는데 성공한 한국의 특수한 사례를 기억하십시오. 


앞으로 다음글 [유치산업보호론]을 통해, 어떤 경우에 유치산업보호론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국정부의 시도가 다행히도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겁니다.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④] 유치산업보호론 Ⅰ -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대립(?)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⑤] 유치산업보호론 Ⅱ - 존 스튜어트 밀 · 로버트 발드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효율적 생산을 위한 정부개입이 정당화 된다


  1.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http://joohyeon.com/171 [본문으로]
  2.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3.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4.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5.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①] 1920~30년대 호주 보호무역 - 수입관세를 부과하여 수확체감과 교역조건 악화에서 벗어나자http://joohyeon.com/268 [본문으로]
  6.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7. 수출확대를 통해 대외로 뻗어나가는 '외연적 산업화 전략'(extensive)과 대비되는 의미 [본문으로]
  8. 박희범, 1968, 한국경제성장론 71쪽.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정부의 선택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9. 박희범, 1968, 한국경제성장론 81쪽.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정부의 선택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0.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4장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1. 통화개혁을 둘러싼 정치과정 [본문으로]
  11.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4장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 - 1. 통화개혁을 둘러싼 정치과정 [본문으로]
  12. [국제무역이론 ②] 1세대 국제무역이론 - 헥셔&올린의 보유자원에 따른 무역http://joohyeon.com/217 [본문으로]
  13. 서문석, 2009, 해방 이후 한국 면방직산업의 수출체제 형성 [본문으로]
  14. 최상오, 2010, 한국에서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의 형성과정 - 1960년대 초 이후 급속한 수출 성장 원인에 대한 일 고찰 [본문으로]
  15. 김두얼, 2016,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경제성장의 기원, 1953-1965 [본문으로]
  16. 기미야 다다시, 2008, 한국정부의 선택에서 인용 [본문으로]
  17. 기미야 다다시, 2008, 한국정부의 선택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8.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19. [국제무역논쟁 개도국 ②] 1950~7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선택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 무역의 이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다 http://joohyeon.com/269 [본문으로]
  20.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본문으로]
  21. 박태균, 2013, 원형과 변용 [본문으로]
  22. 이완범, 2006, 박정희와 한강의 기적 [본문으로]
  23. 최상오, 2010, 한국에서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의 형성과정 -1960년대 초 이후 급속한 수출 성장 원인에 대한 일 고찰- [본문으로]
  24. 김두얼, 2016,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경제성장의 기원, 1953-1965 [본문으로]
  25. [경제학원론 거시편 ⑥] 외국의 저축을 이용하여 국내투자 증가시키기 - 경상수지 흑자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http://joohyeon.com/237 [본문으로]
  26. [경제학원론 거시편 ⑥] 외국의 저축을 이용하여 국내투자 증가시키기 - 경상수지 흑자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http://joohyeon.com/237 [본문으로]
  27. [국제무역이론 Revisited ②] 데이비드 리카도,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이점을 말하다 http://joohyeon.com/2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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