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재정에 대한 잘못된 강박관념균형재정에 대한 잘못된 강박관념
Posted at 2013. 1. 5. 01:36 | Posted in 경제학/일반제18대 대통령 선거 직후, 박근혜 당선인은 6조원 규모의 채권발행을 통해 복지공약 실현을 위한 재원조달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언이 전해진 후, 민주진영은 "국가부채를 늘리자는 것이냐" "대통령 당선되자마자 국민들 뒤통수 때리기냐" "후세에게 부담을 전해주자는 것이냐" 라며 채권발행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그런데 채권발행 반대를 위해 민주진영이 사용하는 논거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바로 미국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 경제학자들이 양적완화 정책 · 복지지출 증가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논거들이다. 정부지출이 증가하고, 공공부채가 증가하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논리. 왜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논거를 한국의 민주진영이 이용할까? 아니 그것보다, 채권발행을 통해 적자재정정책을 운용하면 국가경제에 해로울까?
국가경제는 가계경제와 다르다. 해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가계는 빚더미에 빠지고 신용등급이 하락하여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울 것이다. 국가도 그러할까? 국가는 화폐발행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정적자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국가가 돈을 찍어내면 적자는 메워진다. 그렇다고 무한정 돈을 찍어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국가는 채권발행을 통해 재원을 조달한다. 쉽게 말하면 돌려막기 개념이다. 재정적자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2가지이다. 첫째는 국가경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이다. 큰 폭의 재정적자를 지켜본 시장참여자들이 경제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어 자금회수를 서두르면 국가경제는 위기에 빠진다. 두번째는 외화로 표기된 부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 1이다. 외화표기 부채에 대해서는 국가의 화폐발행권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지급불능 상태에 처할 수 있다. 2
반대로 생각하면, 국가경제의 신뢰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의 재정적자 ·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외채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즉, 부채"규모" 혹은 재정적자 "액수"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3 6조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면 국가경제의 신뢰가 훼손될까? 한국의 GDP 규모는 1,200조이고 1년 예산 규모는 372조원 이다. 6조원은 GDP 대비 0.5%, 1년 예산 대비 1.6%에 불과하다. 2012년 한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19조원인데 거기에 6조원을 더한다면 GDP 대비 2.1%, 1년 예산 대비 6.7%에 불과하다. 채권발행을 통해 6조원 가량 조달한다고 해서 국가경제의 신뢰도가 떨어질 정도로 한국경제 규모가 작지 않다.
더 중요한 점은 지금 한국경제는 적자재정 정책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갖추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국가부채를 증가시키면 후세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일까? 후세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의미는 어린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2013년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 · 자영업자 가계부채 문제 · 부동산 담보대출로 인한 하우스푸어 · 과도한 육아양육비 사교육비 의료비 부담 등등 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복지제도 확충 등으로 경제의 수요측면Demand-Side을 개선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균형재정을 사수하기 위해 정부지출을 늘리지 않는 게 후세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2013년에는 생산가능인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2017년에는 생산가능인구의 절대숫자 자체가 감소한다. 한국경제가 많은 정부지출이 필요한 고령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에, 선제적으로 정부지출을 늘리고 복지제도를 확충해 경제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박근혜의 6조원 규모의 채권발행 발표는 진보세력 이라면 더더욱 반겨야했다. 큰 정부 · 정부지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보수정치세력이 먼저 채권발행 이야기를 꺼낸 것을 이용해야 했다. 역설적으로, 한국 보수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박근혜는 한국의 복지제도를 확충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명박정부의 실패는 박근혜가 이명박과는 다른 길을 걷도록 만들었고, 증세의 길을 걷는 미국은 박근혜가 유사한 길을 걷도록 할 것이다. 박근혜가 정부지출 증가를 통해 복지제도 확충에 나설 때, 누가 박근혜를 빨갱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한국 보수정치세력의 적통을 물려받은 박근혜에게? 박근혜의 문제는 경제민주화 · 복지제도 확충을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녀는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 쉽게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진보세력이 진정으로 한국경제를 걱정한다면 이러한 점을 이용해야 한다.
<같이 읽을거리>
"왜 환율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단일통화를 쓰면 안될까?" - '개발도상국이 지고 있는 원죄Original Sin'. 2012.10.19
"GDP 대비 부채비율에서 중요한 건 GDP!" - '부채규모가 큰 것이 문제일까?'. 2012.10.21
Paul Krugman. "Sam, Janet, and Fiscal Policy". 2010.10.25
Paul Krugman. "Nobody Understands Debt". 2012.01.01
Paul Krugman. "On The Non-burden of Debt". 2012.10.12
Paul Krugman. "Foreigners and the Burden of Debt". 2012.10.13
유종일. "지금은 '적자 재정'이 정답이다". 2012.12.27
주진형. "넌 누구냐? 재정 적자와 국가채무비율". 2013.01.03
주진형. "재정정책 실종 국가: 경제 불황기에 왠 균형재정?". 2013.01.07
- Barry Eichengreen은 외화로 표기된 부채로 인해 신흥국이 겪는 문제를 원죄Original Sin 라고 표현했다. http://joohyeon.com/113 참고. [본문으로]
- 이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 것이 1997년 외환위기 이다 (재정적자가 아니라 무역적자가 문제를 초래했지만). 계속되는 무역적자를 지켜본 시장참여자들은 한국 경제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 서둘러 자금회수에 나서게 되는데, 외환보유가 부족했던 한국은 달러로 표기된 단기부채를 상환하지 못하여 IMF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해서는 "GDP 대비 부채비율에서 중요한 건 GDP!"의 '부채규모가 큰 것이 문제일까?' 참고 http://joohyeon.com/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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