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정리]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과 함의[외환위기 정리]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과 함의

Posted at 2015. 12. 29. 18:44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왜 오늘날에 '1997년'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1997년은 오래된 과거입니다. 2016학년도에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분들이 1997년생이죠... 그런데 요즈음 '1997년'을 많이들 이야기하곤 합니다.


  

2015년 12월, 미국 Fed는 기준금리를 0.25%p 올림으로써 2008년 12월 이후 7년만에 제로금리정책에서 벗어났습니다. Fed가 마지막으로 기준금리를 올렸던 해는 2006년이니, 사람들은 무려 9년만에 '기준금리 인상'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연방기금목표금리(Federal Fund Target Rate)는 0.00%~0.25%에서 0.25%~0.50%가 되었죠.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하자 세계 투자자들은 신흥국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신흥국에서의 자본유출을 불러와서 '1997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를 우려하기 때문이죠. 1997년에 신흥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前 대통령이 서거하자 많은 사람들이 1997년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바친 김영삼을 회고하며 "'1997년 IMF 사태' 때문에 저평가 받는다." 라는 말을 합니다. 1997년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번글에서는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해서 다룹니다. 1997년의 사건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글로벌 거시경제를 파악할 수 있는 기본지식을 얻는 것이 글의 목적입니다. 

(본 블로그에서 2013년도에 [외환위기 시리즈]를 개제한바 있으나,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글을 읽어보니 난잡한거 같군요...


일반사람들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IMF 사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호칭일뿐더러 1997년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1997년의 사건이 세계경제사에 가지는 의미 · 2015년에 1997년을 말하는 이유' 등을 이해하려면,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라는 명칭에 우선 주목해야 합니다.   


자, 이제부터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과 함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

- 종금사와 기업의 '단기외채' 차입

- 태국발 금융위기 발생 → 충격의 여파가 한국으로 확산

- 통화가치 하락에 이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부담의 증가



▶ 금융자유화에 이은 기업과 종금사의 단기외채 차입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이해하려면 1990년대 초반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당시 한국은 '금융자유화'(Financial Liberalization) 정책의 일환으로 금융시장을 개방하였습니다. 국내 기업들과 종합금융회사(종금사)들은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빌렸습니다(자본유입, capital inflow).


이들이 빌린 자금은 '만기가 짧은(단기)',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외채) 였습니다. 기업들은 외국계은행에서 빌린 자금으로 투자를 증가시켰고, 종금사들은 외국에서 낮은 금리로 빌린 자금을 국내에서 높은 금리로 대출하여서 차익을 챙겼죠.


▶ 1997년 7월, 태국 금융위기 발생


그러던 와중에 1997년 7월, 태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습니다.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는 사건이 일어났죠. 


태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을 목격한 투자자들은 "다른 아시아국가들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위기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한국에게마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 갑작스런 상환요구가 불러온 유동성위기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의 '상환능력'을 의심하게된 외국계 은행들은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고 서둘러 자금회수에 나서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상환요구'(sudden stop)를 겪게된 일부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는 '유동성문제'를 겪게 되었고, 결국 파산하고 맙니다. 


그러자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어 나갔습니다. 이제 외국계 은행은 '재무상태가 비교적 건실한' 기업들의 상환능력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서둘러 자금회수에 나서게 됩니다. 결국 다른 기업들 또한 유동성위기를 겪게 되었죠.



▶ 급작스러운 자본유출이 초래한 원화가치 하락, 외채부담을 증가시키다


한국경제 전체적으로는 외국계 은행의 상환요구로 인해 '급작스러운 자본유출'(disruptive capital outflow)이 발생하였고, 원화가치는 크게 하락(환율상승) 하고 맙니다.


원화가치 하락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들이 빌렸던 자금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y) 였습니다. 따라서, 원화가치 하락은 대차대조표상 부채부담을 증가시켰던 것이죠. 


쉽게 예를 들어, 환율이 1달러당 1,000원일때 1달러를 빌렸다면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크기는 1,000원 입니다. 그런데 환율이 1달러당 2,000원으로 상승(원화가치 하락) 한다면 부채크기는 2,000원이 되어버리죠. 1997년 6월 당시 환율은 1달러당 1,000원 미만이었으나, 1997년 12월 환율은 1달러당 2,000원 수준으로 2배 가까이 상승(원화가치 하락)했었습니다.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상환 & 원화가치 하락 막기가 초래한 외환보유고 고갈


국내 기업들과 종금사들은 달러화로 그들의 부채를 상환하였죠. 그리고 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원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해서 달러화를 팔아야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제 외국계은행에서 빌린 외채를 갚을 수도 없었고,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수도 없었죠. 달러화가 필요한 한국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쳥하고 맙니다. 외국통화인 달러화가 부족하여 발생한 위기, 즉 '외환위기'(Currency Crisis)가 발생한 겁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특징

- '동아시아'의 위기

- 만기 불일치, 통화 불일치

- 급작스런 자본유출에 이은 유동성위기


앞서 스토리로 살펴본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 'IMF 사태'가 아니라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겪었던 경제위기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외환위기' 입니다IMF는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한국정부에 달러화를 빌려준 기관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구제금융 조건으로 내건 긴축정책을 두고 논란이 많지만, 이는 논외로 합시다.)


1997년 당시 한국이 겪었던 위기를 'IMF 사태'로 부른다면, 위기의 특징과 원인을 제대로 모르게 됩니다. (특징과 원인은 바로 밑에서 다룹니다.) 또한, 당시 위기가 마치 '한국만의 사건'이었던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 만기 불일치와 통화 불일치


당시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들은 '단기'(short-term) 자금을 외국계은행으로부터 빌린 다음에, '장기투자'에 나서거나 '장기'(long-term)로 다른 곳에 다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즉, 한국 기업과 종금사는 '단기부채'와 '장기자산'을 가지고 있던 셈이죠.


외국계은행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고 '단기부채' 상환을 요구했을때, 유동성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만기 불일치'(maturity mismatch)라 합니다.


또한, 당시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들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y), 쉽게 말해 '외채'를 빌렸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통화인 원화를 빌렸다면, 가지고있던 원화자금으로 부채를 상환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통해 부채를 대신 상환해 줄 수도 있었죠. 


그러나 '외채' 였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은 소용이 없었고 한국 기업과 종금사 또한 돈을 쉽게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원화가치 하락이 일어났을때 외채부담이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통화 불일치'(currency mismatch)라 합니다.



▶ 급작스러운 자본유출입


자, 만기 불일치든 통화 불일치든, 외국계은행이 '갑작스럽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기업들과 종금사들이 유동성위기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외국계은행들이 그냥 '만기연장'(roll-over)을 해주었더라면, 평온한 상태가 지속됐을 겁니다.


그러나 외국계은행들은 부채상환을 요구하고 외화자금이 빠져나가자, 유동성문제와 원화가치 하락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즉, 1997년 당시 한국이 겪었던 위기는 '급작스러운 자본유출입'(disruptive capital flows)이 불러온 유동성위기였습니다.




※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이유

-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없었을까요? 

- 한국경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 금융감독 기능의 부재


1997년 당시 한국은 '금융감독'(financial supervision) 기능이 부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금융감독원'이 금융시장을 감시하지만, 당시에는 은행감독, 보험감독, 증권감독 등 금융감독 기능이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금융시장 전체를 총괄하는 감독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었죠.


이런 이유로 인해, 기업들과 종금사들이 어디에서 얼마만큼의 돈을 빌리는지도 몰랐습니다. 외국계은행에서 빌린 돈을 국내 다른 기업들에게 얼마만큼 재대출 해주는지도 몰랐죠. 그리고 당시에는 재무제표 공개 등 기본적인 '공시기능'도 없었습니다. 기업들의 회계조작 등이 성횡하였죠.


▶ 정부의 지급보증 관행


1960년대 경제발전을 시작한 이래로 한국경제는 '정부의 지급보증'(government guarantee)을 통해 성장해왔습니다.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빌린 뒤 파산하여도 결국에는 정부가 막아준다는 생각을 하였고, 돈을 빌려주는 외국계은행 또한 "이렇게 많이 빌려줘도 한국정부가 갚아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였죠.


▶ 금융시장 자유화와 자본유출입이 가져오는 폐해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국정부와 관료, 그리고 세계 경제학자들은 '자유로운 자본이동'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1997년 이전 IMF는 개발도상국 등에게 '금융시장 개방'을 주문하였습니다. 금융시장이 개방되어서 선진국 자본이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한다면, 개발도상국은 선진국 자본을 바탕으로 투자를 증가시켜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였죠.


그러나 이렇게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흘러들어온 자본이 '갑작스럽게 유출'(disruptive outflows) 되었을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세계 경제학자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와 관료들 또한 이를 모르고 있었고, '단기외채'(short-term external debt)를 집계하는 통계조차도 없었습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교훈

- 경제학계의 변화와 발전

- 자본이동을 어느정도 규제하자


1997 외환위기가 발생한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2016년에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이 1997년생이죠. 한국정부와 세계 경제학자들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웠을까요?


▶ 3세대 금융위기 이론의 발전


1997년 당시 세계 경제학자들이 '자유로운 자본이동이 가져오는 폐해'를 몰랐던 이유는 그러한 방식의 금융위기를 겪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간 자본이동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작스러운 자본유출입'(disruptive capital flows)와 '단기 대외부채'(short-term external debt)가 어떤 문제를 초래할지 생각치 못했었죠.


이전의 금융위기는 크게 2가지 형태였습니다.


1세대 금융위기 모형은 해당국 정부의 방만한 거시경제 운용으로 인한 '거시경제 기초여건의 문제'(fundamental)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1970-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저성장, 재정적자와 하이퍼 인플레이션 등의 사례이죠.


2세대 금융위기 모형은 고정환율제도가 초래한 투기적공격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 등이 이를 보여주죠.


1세대, 2세대 모형을 생각한다면, 1997년 당시 한국경제 상황은 낙관적이었습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긴 했으나, 경제성장률, 재정적자 규모, 인플레이션율 등 거시경제 기초여건은 안정적이었죠. 그리고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긴 했으나, 투지적공격은 없었습니다. 


생각치도 못했던 '급작스러운 자본유출입'(disruptive capital flow)과 '단기 대외부채'(short-term external debt)가 문제를 일으킨 겁니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지나고 나서야, 경제학자들은 3세대 금융위기 모형을 내놓았고, 자유로운 자본이동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 자본이동의 규제와 금융감독 기능의 강화


1997년 이전, '금융시장 개방'과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주창했던 IMF는 오늘날에 "특정상황에서는 자본통제(capital control)도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로운 자본이동을 감독하기 위한 '거시건전성 정책'을 각국에 강조하고 있죠.


1997년에 위기를 겪었던 한국은 두번 다시 똑같은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대비를 철저히 해놓고 있습니다. '단기 대외부채'를 철저히 감독하고 있으며, 거시건전성 정책을 통해 자본이동을 어느정도 규제하고 있죠. 세계 경제학계내에서 거시건전성 정책 모범사례로 매번 한국이 등장할 정도입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함의

- 1997년의 사건이 세계경제사에서 가지는 의미


자,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 · 특징 · 원인 · 교훈' 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1997년의 사건을 'IMF사태'가 아니라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인식해야만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생각의 지평을 좀 더 넓혀서,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세계경제사에서 가지는 의미  ▶ 2015년에 1997년을 말하는 이유 등을 알아봅시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세계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10년 후인 2008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계속 반복하지만, 1997년의 사건을 단순히 'IMF 사태'로 인식한다면 '세계경제흐름 속에서 1997년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세계경제사에서 가지는 의미 ①

: 1998년 러시아 · 브라질 · 아르헨티나 에서도 위기 발생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인도네시아 · 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 홍콩 등을 거쳐서 11월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한국은 IMF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외환위기의 충격이 '동아시아' 내에서만 머무르고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외환위기는 러시아 · 브라질 · 아르헨티나 그리고 미국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시아경제는 석유 · 가스 등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로 인해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침체상태에 빠지자 원자재수요가 크게 감소하였고, 그 결과 러시아경제도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였고, 1998년 8월 결국 러시아 정부는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고 맙니다. 


동아시아 → 러시아로 퍼진 위기는 이제 중남미로 향합니다. 1997년 동아시아가 외환위기를 겪는 모습을 본 브라질은 자본유출을 막고 고정환율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고정환율제는 지속되지 못하였고, 결국 브라질 통화가치는 크게 하락하고 외환보유고는 바닥나게 됩니다. 1998년, 브라질도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8년 브라질에 이어서 아르헨티나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던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통화가치가 크게 하락하였고 외환보유고는 바닥납니다. 1998년-2002년 사이 아르헨티나 경제의 생산량은 무려 28%나 감소했습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세계경제사에서 가지는 의미 ②

: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위기를 본 미국, 1998년 10월 기준금리 인하

: 1999년 IT 버블 형성 → 붕괴 → 2001년 경기침체




세계 여러 국가들의 경제위기는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들의 위기 · 1998년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위기를 본 미국은 1998년 10월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합니다. 당시 미국경제 성장률은 비교적 견고하였으나, 다른 국가에서 벌어진 경제위기가 미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LTCM Management' 사태입니다. 헤지펀드 회사였던 LTCM은 러시아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큰 손실을 보게되었고, 미국 다른 금융기관들은 Fed의 감독아래 약 3조원 가량의 자금지원을 해줍니다. LTCM 사태를 본 Fed는 미국에서도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였고, 선제적인 기준금리 인하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1998년 10월의 기준금리 인하'가 향후 위기의 불씨가 되고 맙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인플레이션율도 낮았지만 기준금리를 인하했습니다. 국내거시경제가 안정적인 상황에서의 기준금리 인하는 당연히 과열을 부르게 됩니다.


외국에서의 위기로 인해 주춤하던 미국 주가지수는 1998년 10월 기준금리 인하 이후 다시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시 新산업이었던 IT기업을 중심으로 주식가격이 크게 올랐죠. 이제 막 사업을 시작했던 IT기업들은 별다른 수익을 거두지 못했었지만, '새로운 산업'이라는 환상은 무척 강력했습니다.


이러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은 결국 큰 충격을 초래합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이 다시 기준금리를 인상해나가자 미국 주가지수는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IT 버블이 꺼지게되자 그동안 잔치를 누려왔던 IT기업들은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미국은 2001년부터 경기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세계경제사에서 가지는 의미 ③

: 2001년 경기침체 이후, Fed의 초저금리 정책

: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외환보유고 축적에 집착하게된 신흥국

: 부동산시장 버블 형성 → 붕괴 → 2008 금융위기




2001년 경기침체를 빠진 미국. Fed는 불과 1년 사이에 기준금리를 6.50%에서 1.75%로 무려 4.75%p나 인하하면서 공격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인 인하를 통해 기준금리 1%라는 초저금리 정책을 2004년까지 유지하였죠.


그러나 IT 버블 붕괴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저금리정책은 또 다른 버블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부동산가격 급등' 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 미국 부동산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많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구매해 차익실현을 노렸습니다.   



미국 부동산가격을 상승시킨 또 다른 원인은 '신흥국에서 유입된 자본'이었습니다. 외환보유고 부족때문에 외환위기를 겪은 신흥국들은 1997년 이후 '외환보유고 축적'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신흥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외환을 벌어들였고, 미국 달러화채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외화보유고를 늘려나갔습니다. 미국으로 유입된 신흥국 자본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미국 부동산가격은 크게 상승합니다. 

(관련글 : 2000년대 초반 Fed의 저금리정책이 미국 부동산거품을 만들었는가?

글로벌 과잉저축 - 2000년대 미국 부동산가격을 상승시키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던 부동산가격은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해나가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은 기준금리를 정상수준으로 올려나갔고, 부동산가격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대출을 받은채 집을 구매했던 사람들은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큰 손실을 보게되었죠. 대출연체율이 증가하자 주택담보대출 전문업체와 은행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2008 금융위기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2가지 경로를 통해 '2008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1998 러시아 · 브라질 · 아르헨티나 위기 & LTCM 사태 → 1998년 미국 기준금리 인하 → IT 버블 형성 → IT 버블 붕괴 → 2001년 미국 경기침체 → 2001년부터 2004년까지 1%대의 초저금리 정책 → 미국 부동산버블 형성 → 2006년 이후 부동산버블 붕괴 → 대출연체율 증가 → 주택담보대출 전문업체와 은행 파산 → 2008 금융위기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신흥국들, 외환보유고 축적에 집착 →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뒤 미국 달러화채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외환을 모으려고 함 → 신흥국의 자본이 미국으로 유입 → 미국 부동산버블 형성 → 2006년 이후 부동산버블 붕괴 → 대출연체율 증가 → 주택담보대출 전문업체와 은행 파산 → 2008 금융위기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함의

- 2015년에 1997년을 말하는 이유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급격한 자본유출'(disruptive capital outflow)이 초래한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신흥국에서의 급격한 자본유출'이 오늘날에도 발생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 2015년 현재에 '1997년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이유

: 미국 기준금리 인상, 신흥국에서의 자본유출 초래 우려

: 제2의 외환위기 발생???


금융위기 발생한 직후인 2008년 12월, Fed는 기준금리 범위를 0.00%~0.25%로 내리는 제로금리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로금리 정책은 7년 뒤인 2015년 12월까지 유지됐었습니다.


전세계 투자자들은 미국의 낮아진 금리를 이용하여 금융상품 투자를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내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대출 받은 뒤, 비교적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신흥국에 투자하면 금리차이 만큼 수익을 기록할 수 있었죠(search for yield). 그 결과, 미국의 제로금리 정책 시행 이후, 수익을 쫓는 투자자로 인해 신흥국으로 많은 자본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미국 기준금리가 인상되면 투자자들은 신흥국에서 돈을 인출한 다음에 미국에 투자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될 경우, 신흥국에서 '급격한 자본유출'(disruptive capital outflow)이 발생하여 1997년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참고글>

[통화정책과 금융안정 ①] 금융발전이 전세계적으로 리스크를 키우지 않았을까?

[통화정책과 금융안정 ②] 2008년 이후의 통화정책, 리스크추구 행위를 유발하다

[통화정책과 금융안정 ③] Fed의 초저금리 정책은 자산시장 거품(boom)을 만들고 있을까?




※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1997년의 위기와 똑같은 현상을 초래할까?


미국 기준금리 인상 이후 신흥국에서 '급격한 자본유출'(disruptive capital outflow)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나, 정말로 1997년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교훈'에서 살펴봤듯이, 1997년 이후 경제학자들은 '자본유출입 규제'에 주목하였고 '거시건전성 정책'(macroprudential policy)를 통해 자본이동을 어느정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에 대해서는 다른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입니다.


다만, 이번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과 함의>를 통해서,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 · 특징 · 원인 · 교훈''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세계경제사적 의미 · 오늘날에 1997년을 말하는 이유' 등을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글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관한 본 블로그 글]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편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3편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4편 -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5편 -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논문]

Frederic Mishkin. 1997. The causes and propagation of financial instability : lessons for policy makers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경제학계의 논의]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

앞으로의 통화정책은 이전과는 다를것이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2008 금융위기에 미친 영향]

2000년대 초반 Fed의 저금리정책이 미국 부동산거품을 만들었는가?

글로벌 과잉저축 - 2000년대 미국 부동산가격을 상승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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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원인과 해결책에 관한 논점들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원인과 해결책에 관한 논점들

Posted at 2014. 11. 2. 18:52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김우중의 항변


지난 8월,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은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정부의 위기수습정책을 비판한다. 경제관료들에 의해 대우그룹이 억울하게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IMF가 자금지원 조건으로 내건 구조조정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관료들의 생각과 수출을 늘려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자는 본인의 주장이 충돌해 갈등이 깊어졌고, 그 결과 대우그룹이 김대중정부 경제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한다.


김 전 회장은 이 책에서 대우그룹이 경제관료들에 의해 억울하게 해체됐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결과는 한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로 돌아왔다고 진단했다. (...)


책에는 DJ가 김 전 회장의 의견을 듣고 보류하거나 기각하는 정책이 생겨나면서 관료들의 반감이 시작됐고, 특히 김 전 회장의 생각이 ‘IMF 식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생각과 달리 ‘수출을 늘려 IMF를 벗어나자’는 쪽이어서 갈등이 깊어졌다는 장면들이 묘사돼 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며 대우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고 김 전 회장은 말한다. 한 예로 김 전 회장은 대우자동차에 GM의 투자를 받아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관료들이 막았다고 했다. (...)


'김우중 15년만의 고백 "DJ 경제팀이 뒤통수쳤다"'. <조선비즈>. 2014.08.21 


그러나 김우중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건 무리가 있다.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에서 다루었다시피, 당시 국내 대기업들은 과도한 차입을 통해 외형을 불리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그 결과 1997년 당시 국내 30대 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518%에 달했다. 게다가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에서 다루었듯이, 당시에는 융감독체계가 미흡했고 회계공시제도 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우그룹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대우그룹은 회계부정을 통해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보이도록 조작하였고, 1997 외환위기 이후에도 부채규모는 줄어들지 않았다1998년 당시, 금융감독원장을 역임하면서 외환위기 수습을 담당했던 이헌재의 회고록 『위기를 쏘다』(2012)를 통해 그때 상황을 알 수가 있다. 


대우가 진 수십조 원의 빚 중 절반 이상은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이었다. (...) 김우중 회장의 출국(해외도피) 직후 삼일회계법인은 대우그룹 예비 실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우중 회장이 십수조 원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내용이다. (224-226) (...)


1998년 9월, 금융감독위원회가 파악한 대우의 채무는 47조 7,000억 원에 달했다. 1년 새 19조 원이나 늘었다. 그것도 주로 회사채와 기업어음(CP)으로 끌어당긴 돈이었다. (...)


1998년 11월 29일, DJ와 김우중 회장의 면담을 앞두고 강봉균 경제수석실이 만든 보고서였다. 대우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이자를 갚느라 번 돈을 다 쏟아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


대우가 해체된 건 시간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1999년 7월까지 대우는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자산 매각이든 외자 유치든 5대 그룹 중 꼴찌였다. 1998년 5월 제출한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 삼성 · 현대는 목표치의 100퍼센트 넘게, SK · LG는 90퍼센트 넘게 자구 노력을 달성했지만 대우는 고작 18.5퍼센트였다. (244-251)


삼성과의 빅딜마저 깨진 1996년 6월 말, 김 회장은 사면초가에 빠진다. 그때쯤 시장에 들려온 루머가 김 회장 음독설이었다. "7월 19일 전 재산을 내놓은 구조조정 계획도 시장에서 외면당하자 김 회장은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채권단과 정부는 김 회장에게 '그만 손 떼라'는 메시지를 줬다. 김 회장은 궁지에 몰린 채 영국으로 출국했다. 이를 종용한 건 이기호 경제수석 라인이었다." (...)


일각에선 이런 루머를 근거로 지금껏 "DJ 정부가 대우를 죽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허튼소리일 뿐이다. 대우그룹은 죽지 않았다. 워크아웃을 거친 대우 계열사들은 더 튼튼히 살아남았다. (...) 다만 대우라는 브랜드의 결속이 느슨해졌을 뿐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김 회장과 소액주주의 지분이 날아간 정도랄까. (...)


1999년 12월 실사 결과 대우의 총부채는 최대 89조 원, 자산은 59조 원으로 추산됐다. 당시 '인류 역사상 최대 파산'으로 기록됐다.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 설마 지금도 김 회장이 그 돈을 다 빼돌렸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중으로 사라진 건 아니다. 대우와 그 주변 많은 사람이 그 빚으로 산 꼴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그 후 수년간 이어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은 이런 빚잔치의 대가였을지 모른다. (252-254)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224-254


당시 대우그룹이 저질렀던 회계조작과 과도한 차입은 기억하지 않고, 그저 '내 회사를 정부에게 뺐겼다." 라고만 인식하는 이 사업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1997 외환위기 수습방법은 옳았는가?

- 일시적 유동성부족 vs 기초여건 부실

- 안정화정책 vs 청산주의


자신이 저질렀던 경제범죄를 부인하고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추징금도 내지 않고 있는 이 사업가는 잠시 머리에서 잊자. 우리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원장의 주장을 통해 한 가지 생각할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바로 '1997 외환위기 수습방법은 옳았는가?' 이다.


김우중과 회고록을 공동집필한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각주:1]는 당시 IMF가 자금지원조건으로 내건 혹독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비판한다. 그는 "김 전 회장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한국경제가 오히려 나빠진다고 봤다. 당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국제금융기관이 한국경제를 관리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우중은 "IMF식 구조조정이 아닌 수출주도형으로 위기를 극복했으면 지금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4만달러 돼 있을 것. 한국 경제의 설비 투자는 2005년이 되어서야 1996년 투자 수준에 복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외환위기 수습을 담당했던 경제관료[각주:2]들은 "당시 다급했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조원동 당시 청와대 행정관(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미국의 경우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우면 통화를 찍어내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시 돈을 풀었더라도 채권금융회사들이 돈을 빼가는 상황이어서 국가 디폴트(부도) 나는 상황으로 몰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구조조정을 철저히 한 덕분에 IMF를 극복[각주:3]할 수 있었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했어도 우리 경제가 탄탄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하고,  김영재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은 "(김 회장은) 당시 시장 상황을 직시(直視)하는 게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김우중과 당시 경제관료들의 이러한 견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한 차이는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일시적 유동성부족 문제'(illiquidity)로 보느냐, '당시 한국경제 기초여건의 부실과 지불능력부족 문제'(fundamental & insolvency)'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일시적 유동성문제'를 강조하는 쪽은 "당시 부족했던 외화를 IMF 등으로부터 빌리기만 하면 됐을 뿐, 가혹한 구조조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은 탄탄했다." 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부실한 기초여건'을 강조하는 쪽은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 그동안 한국의 낡은 경제적 모델이 문제를 일으킨 것[각주:4]이고, IMF가 내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언젠가는 이행했어야 했다." 라고 반박한다.


어느 주장이 옳을까? 한국 · 전세계 경제학자들의 의견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국경제 기초여건에 대한 구조조정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각주:5]" 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고, "구조조정 자체는 필요했지만 경제위기 와중에 급박하게 이행될 필요는 없었다." 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한국의 낡은 경제적 모델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재빨리 이행해야 했고, 덕분에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에서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1997 외환위기 원인에 대한 견해차이'에는 보다 근본적인 쟁점이 깔려있다. 바로, '균형에서 이탈한 시장이 얼마나 빨리 균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느냐' 여부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균형에서 이탈한 시장이 다시 균형으로 돌아가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경기침체로 인한 충격이 실업률 증가 등의 모습으로 경제주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부나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경기충격을 완화시키는 '안정화정책'(stabilization policy)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또다른 경제학자들은 ① 시장이 자동적으로 균형으로 돌아갈 수 있다 ② 균형으로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 ③ 인위적인 개입은 경기변동성을 키운다 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기적인 대책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경제위기를 계기로 구조적인 문제(structural problems)를 개선하여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청산주의'(liquidationism) 이라 한다.     


앞으로 몇차례의 글을 통해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원인 · 해결책에 관한 논점들을 자세히 다룰 것이다. (아마 내년 초에 글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1. "김우중法, 한국이 낳은 세계적 기업가를 3번 죽여". <조선비즈>. 2014.08.26 [본문으로]
  2. 김우중 측 "DJ정부 구조조정 옳았나 따져보자". <조선비즈>. 2014.08.27 [본문으로]
  3. 개인적으로는 'IMF 극복' 이라는 용어사용을 싫어한다. 1997년 당시 한국이 겪었던 경제위기는 '동아시아 외환위기'이다. IMF는 부족한 외환을 빌려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물론, 외환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IMF가 내건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한국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고, 이런 맥락에서 'IMF 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본문으로]
  4. '캉드쉬 "외환위기 IMF 조치는 DJ 정책과 일치". 머니투데이. 2013.11.18 [본문으로]
  5. 좀 더 극단적으로 "IMF와 초국적자본이 한국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무시하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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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⑤]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외환위기 ⑤]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Posted at 2013. 11. 26. 15:35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2편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2013.10.27

3편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2013.11.09

4편 -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2013.11.11


1997 외환위기에 대해 쓴 4편의 글을 통해, 당시 외환위기의 원인 · 발생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4편의 글은 주로 한국의 위기에 초점을 맞췄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홍콩, 싱가포르, 한국 등등-이 외환위기를 겪게된 원인에 대해서 다룬다. 또한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이 경제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 1997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자본계정의 위기' - 제3세대 모델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이규성의 주장이다. 이규성은 당시 아시아의 위기를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 라고 진단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위기 당사국들은 자본자유화 확대 → 대규모 자본수지 흑자 → 환율의 고평가 속에 고성장 추구 →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과정을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 과거 많은 나라들이 재정적자 확대 → 경상수지 적자 확대 → 자본수지 흑자 확대라는 경로를 걷다가 외환위기에 직면한 양상과는 현저히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의 위기는 경상수지의 중요성이 도외시된 채 진행된 자본자유화 과정에서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86-89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 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1997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융위기 발생의 이론적모델[각주:1]은 두 가지였다. 바로, 해당국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에 문제가 있어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1세대 모델[각주:2]과 경제의 기초여건에 상관없이 경제주체들 사이의 자기실현적예언 Self-Fulfilling Effect 로 인해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2세대 모델[각주:3]이었다. 


1세대 모델은 1970-80년대 중남미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중남미 국가들은 과도한 재정적자에 이은 높은 인플레이션율로 인해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이 손상된 상태였다.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높은 인플레이션율은 통화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를 부추겼다. 해당국가들 경제의 기초여건을 의심한 경제주체들은 통화가치 하락을 우려하여 자본을 급격히 회수하면서, 중남미 국가들의 통화가치는 더더욱 하락했고 이 과정에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만다. 


2세대 모델은 1990년대 초반에 발생한 유럽 외환위기(EMS Crisis)를 설명하는 모델이다. 당시 유럽 몇몇 국가들은 유럽통화시스템(EMS, European Monetary System)[각주:4]을 만들어 유럽공동체 통화의 안정을 추구했다. 이런 와중에, 경제력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통화가치 고평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경제사정 악화로 인해 기준금리를 내리는 확장적 통화정책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확장적 통화정책 시행가능성은 통화가치 하락에 대한 기대심리를 부추겼고, 투기세력들은 고평가된 유럽 각 통화들의 평가절하를 예상하고 투기적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해당국 경제의 기초여건에 상관없이, 통화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Effect 이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1세대 · 2세대 모델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높았고 인플레이션 또한 적정한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한국 또한 1997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8.8% · 8.9% · 7.2% 등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재정적자 또한 문제될 여지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고정환율제도 · 만기불일치 · 통화불일치'의 문제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발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융자유화 Financial Liberalization 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1990년대 들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본시장을 개방하면서 자본유입이 급격히 증가 Surges of Capital Inflows 했다.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에서 살펴봤듯이, 한국 또한 금융자유화 시행 이후 막대한 양의 자본유입이 발생하면서 원화가치가 고평가되고 은행과 기업의 해외차입이 증가했다.



그런데 문제는 금융자유화 시행 이후에도 상당수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 달러화에 연계된 peg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한국 또한 환율변동폭이 상하 2.25%로 제한된 시장평균환율제도 crawling peg 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융자유화 이후 발생한 자본유입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손쉽게 해외차입을 늘릴 수 있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해외차입금이 단기일 뿐더러 외국통화로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단기로 조달해온 자금을 장기로 운용하는 만기 불일치 Maturity Mismatch 와 자국통화 부채가 아닌 통화 불일치 Currency Mismatch 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자본유입이 갑자기 멈추고 Sudden Stops 자본흐름의 반전 Reversals of Capital Inflows 가 발생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급격한 자본유출 Disruptive Capital Outflows 이 일어나면서 통화가치는 하락하고 Currency Collapse, 외환보유고는 고갈되고 Reserve Depletion,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면서 Systemic Financial Crisis, 실물경제의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Output Losses.              


그렇다면 1997년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왜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왜 단기차입금을 들여왔으며, 왜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질 수 밖에 없었을까? 또한 자본유출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1997 외환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한계-고정환율제도의 문제점, 만기 불일치 · 통화불일치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 동아시아 국가들의 태생적 한계 - ① 고정환율제도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요소투입의 증가 increases in inputs 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국가가 금융자원을 통제하여 control over finance 특정산업에 자원을 몰아줌으로써 생산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뒤늦게 경제성장에 착수한 개발도상국들 또한 정책금융을 policy loans 통한 투입의 증가, 다르게 말해 투자 investment 를 통해 생산능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통화가 과도히 공급되어 만성적인 고인플레이션 high and variable inflation 이 발생하고 만다. 개발도상국들로서는 경제개발 단계에서 인플레이션 관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달성 그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관리에도 소홀히 하게 된다. 더군다나 중앙은행 등 통화기관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통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는 능력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손쉬운 해결책은 바로 고정환율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고정환율제도는 3가지 경로를 통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 


첫째로는 일종의 규율효과 discipline argument 이다. 인플레이션이 낮은 국가의 통화에 개발도상국의 통화가치를 연동peg 한다면, 정부의 재정적자 · 민간의 임금과 가격결정이 유발하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억제할 수 있다. 고정환율제도를 택한 상황에서 확장적 통화정책을 쓴다면, 인하된 금리가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초래하여 고정환율제도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고정환율제도는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을 쓰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고정환율제도가 일종의 지켜야 할 규약 commitment 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The second major rationale for fixed rates is a belief that pegging to a low-inflation currency will help to restrain domestic inflation pressures, whether these originate in excessive government budget deficits or in the wage- and price-setting decisions of the private sector. This "discipline" argument comes in many forms, but the basic idea is simple: an announced policy of pegging the exchange rate may serve as a commitment technology allowing the government to resist and even forestall subsequent temptations to follow excessively expansionary macroeconomic policies.


Maurice Obstfeld, Kenneth Rogoff. 1995.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4        

 

둘째로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하락이다. 고정환율제도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원래 인플레이션율이 낮았던) 기준국가 anchor country 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개발도상국에 이전됨으로써, 개발도상국 또한 낮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유지할 수 있다.


셋째로는 기준국가와의 통화정책 연동이다. 고정환율제도가 신뢰성 있게 유지되려면 기준국가와 개발도상국의 금리가 동등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개발도상국이 금리를 낮추기 위해 통화량을 증가시킨다면 (낮아진 금리로 인해) 자본유출이 발생하고 외환보유고는 감소한다. 이러한 과정은 국내통화공급의 연속적인 축소를 초래[각주:5]하고 금리와 통화공급량은 정상수준으로 돌아온다[각주:6].        


Fixing the value of an emerging-market's currency to that of a sounder currency, which is exactly what an exchange-rate peg involves, provides a nominal anchor for the economy that has several important benefits. 


First, the nominal anchor of an exchange-rate peg fixes the inflation rate for internationally traded goods, and thus directly contributes to keeping inflation under control. 


Second, if the exchange-rate peg is credible, it anchors inflation expectations in the emerging-market country to the inflation rate in the anchor country to whose currency it is pegged. The lower inflation expectations that then result bring the emerging-market country's inflation rate in line with that of the low-inflation, anchor country relatively quickly.


Another way to think of how the nominal anchor of an exchange- rate peg works to lower inflation expectations and actual inflation is to recognize that if there are no restrictions on capital movements, then a serious commitment to an exchange-rate peg means that the emerging-market country has in effect adopted the monetary policy of the anchor country. 


As long as the commitment to the peg is credible, the interest rate in the emerging-market country will be equal to that in the anchor country. Expansion of the money supply to obtain lower interest rates in the emerging-market country relative to that of the low-inflation country will only result in a capital outflow and loss of international reserves that will cause a subsequent contraction in the money supply, leaving both the money supply and interest rates at their original levels


Thus, another way of seeing why the nominal anchor of an exchange-rate peg lowers inflation expectations and thus keeps inflation under control in an emerging-market country is that the exchange-rate peg helps the emerging-market country inherit the credibility of the low-inflation, anchor country's monetary policy.


Frederic Mishkin. 1998. 'The Dangers of Exchange-Rate Pegging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4


거기에 더하여, 고정환율제도는 개발도상국에게 또 다른 이점을 가져다준다. 바로 환율변동의 불확실성 제거이다. 고정환율제도로 인해 개발도상국의 통화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됨으로써 자본유입을 이끌게되고, 이는 생산적인 투자로 이어져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   


Another potential advantage of an exchange-rate peg is that by providing a more stable value of the currency, it might lower risk for foreign investors and thus encourage capital inflows which could stimulate growth.


Frederic Mishkin. 1998. 'The Dangers of Exchange-Rate Pegging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5


(...)


The unpredictable volatility of a floating exchange rate, both from a short-term perspective and a long-term one, can inflict damage. Although the associated costs have not been quantified rigorously, many economists believe that exchange-rate uncertainty reduces international trade, discourages investment, and compounds the problems people face in insuring their human capital in incomplete asset markets. Furthermore, workers and firms hurt by protracted exchange-rate swings often demand import protection from their governments.


Much of the enthusiasm for monetary unification within the European Union (EU) stems from the belief that locked exchange rates maximize the gains from a unified market and that exchange-rate-induced shifts in competitiveness within the EU can undermine the political consensus for free intra-EU trade. 


Maurice Obstfeld, Kenneth Rogoff. 1995.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4        


고정환율제도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이점들을 생각해봤을때, 상당수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 동아시아 국가들의 태생적 한계 - ②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개발단계에서 발생하는 만성적인 고인플레이션은 또다른 조건을 만들어낸다. 바로 개발도상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의 만기가 짧고 a debt structure of very short duration, 외국통화로 표기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각주:7] 된다는 점이다. 만성적인 고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개발도상국의 통화가치가 심한 변동을 겪는 상황에서, 장기채권과 개발도상국 통화로 표기된 채권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아무도 구입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은 만기가 짧고, (통화가치가 안정된) 외국통화로 표기된 채권을 발행할 수 밖에 없었다.  


In contrast to the industrialized countries, many emerging-market countries have experienced very high and variable inflation rates, with the result that debt contracts are of very short duration. (12) (...)


There are two major institutional differences in the financial markets of industrialized countries versus emerging-market countries that imply different propagation mechanisms for financial instability. As mentioned earlier, in industrialized countries where inflation typically has been low and not very variable, many debt contracts are of long duration. Furthermore, because these industrialized countries typically retain a strong currency, most debt contracts are denominated in the domestic currency. 


In contrast, many emerging-market countries have had high and variable inflation rates in the past and so, long-term debt contracts are too riskyThe result has been a debt structure of very short duration. Given poor inflation performance, these countries also have domestic currencies that undergo substantial fluctuations in value and are thus very risky. To avoid this risk, many debt contracts in these countries are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 (18)


Frederic Mishkin. 1997. 'The Causes and Propagation of Financial Instability'. 12-18


경제학자 Barry Eichengreen은 이러한 현상을 "신흥국의 원죄 The Original Sin" 이라 칭했다. '왜 환율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단일통화를 쓰면 안될까?' 에서도 보았듯이, 1993년-1998년 기간 사이에 개발도상국이 보유한 자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denominated by its own currency 의 비중은 2.03% 불과했다.  


1998년 이후에도 신흥국의 원죄는 계속된다. 1999년-2001년 사이 발행된 5.8조 달러 규모의 채권 중, 5.6조 달러가 미 달러·유로화·엔화·파운드·스위스 프랑화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미국·유럽·일본·영국·스위스는 4.5조 달러 규모의 부채만 짊어졌다. 즉, 나머지 1.1조 달러의 부채는 다른 국가들이 (자국통화가 아닌) 외환 형태로 보유하게 된 것이다.   


Of the nearly $5.8 trillion in outstanding securities placed in international markets in the period 1999-2001, $5.6 trillion was issued in 5 major currencies: the US dollar, the euro, the yen, the pound sterling and Swiss franc. To be sure, the residents of the countries issuing these currencies (in the case of Euroland, of the group of countries) constitute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world economy and hence form a significant part of global debt issuance. 


But while residents of these countries issued $4.5 trillion dollars of debt over this period, the remaining $1.1 trillion of debt denominated in their currencies was issued by residents of other countries and by international organizations. Since these other countries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issued a total of $1.3 trillion dollars of debt, it follows that they issued the vast majority of it in foreign currency. 


The measurement and consequences of this concentration of debt denomination in few currencies is the focus of this paper.  


Barry Eichengreen, Ricardo Hausmann and Ugo Panizza. 2003. "The Pain of Original Sin". 4


  • 출처 : Barry Eichengreen, Ricardo Hausmann and Ugo Panizza. 2003. "The Pain of Original Sin". 28
  • 1993년-1998년 사이,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이 자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보유한 비중은 전체부채 중 2.3%에 불과하다.
  • 반면, 같은 기간에 미국·일본·영국·스위스는 전체부채 중 52.6%를 자국의 통화형태로 보유하고 있다
  • 유로화가 도입된 1999년 이후, 유로존 국가들이 유로화 형태로 보유한 부채비율은 23.2%에서 56.8%로 증가하였다.


채권 발행국과 통화형태별 누적부채를 살펴보자.


  • 출처 : Barry Eichengreen, Ricardo Hausmann and Ugo Panizza. 2003. "The Pain of Original Sin". 29
  • 전세계 부채 중 미국이 부담하는 부채비율은 약 32%이지만, 미 달러 형태로 표기된 부채비율은 약 52%에 이른다.
  • 미국·유로존·일본은 전세계 부채 중 71%를 부담하지만, 미 달러·유로·엔화로 표기된 부채는 약 87%에 달한다.

Figure 1 plots the cumulative share of total debt instruments issued in the main currencies (the solid line) and the cumulative share of debt instruments issued by the largest issuers (the dotted line). The gap between the two lines is striking. While 87 percent of debt instruments are issued in the 3 main currencies (the US dollar, the euro and the yen), residents of these three countries issue only 71 percent of total debt instruments. The corresponding figures for the top five currencies, 97 and 83 percent, respectively, tell the same story.

Barry Eichengreen, Ricardo Hausmann and Ugo Panizza. 2003. "The Pain of Original Sin". 6-7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원인 · 발생과정 


앞서 논의했던 내용을 다시 정리하자면, 1990년대 금융자유화 정책 시행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을 향해 만기가 짧고, 외국통화로 표기된 자본이 급격히 유입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런데 1997년이 되자 자본흐름의 반전 Reversals of Capital Inflows 이 발생하면서 자본유입이 갑작스레 중단되고 Sudden Stops, 급격한 자본유출 Disruptive Capital Outflows 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는 하락압력을 받게 되고 이는 투기적공격 Speculative Attack 의 유인을 증가시켰다. 더군다나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입했던 해외부채는 만기가 짧았기 때문에, 급작스런 자본유출은 유동성위기 Liquidity Crisis를 초래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정환율제도와 자국 통화가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선,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 foreign exchange intervention 함으로써 자국 통화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락하는 자국 통화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국통화를 외환시장에 공급하고 자국통화를 사들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다른 방안으로는 금리를 올림 the policy rate 으로써 급격한 자본유출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금리인상 또한 문제를 초래한다. 금리인상은 투자와 소비를 저하시켜 경제를 불황에 빠뜨리고, 이를 통해 해당국 경제의 기초여건에 의심을 품은 외국투자자들은 자본유출을 가속화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하고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용인해야 할까?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통해 수출이 증가하면 자본계정 Capital Account 의 손상을 경상계정 Current Account 으로 메꿀 수 있으니? 그러나 자국 통화가치 하락은 큰 문제를 야기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은행과 기업들이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국 통화가치 하락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가치의 상승을 뜻했다. 다시 말해, 개발도상국 은행과 기업들의 채무부담이 증가한 것이다.   


경제학자 Paul Krugman은 『불황의 경제학』(2009) 을 통해,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발생과정을 쉽게 설명한다.     


외국으로부터의 차입이 둔화되자 중앙은행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엔화와 달러의 유입이 줄자 외환시장에서 바트화에 대한 수요도 줄어든 것이다. 반면 수입 대금 결제를 위한 외환 수요는 줄지 않았다. 바트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태국은행은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을때와 정반대의 조치를 취했다. 시장에 개입해 달러와 엔화를 주고 바트화를 사들여 자국의 통화를 지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통화 가치를 낮추려는 것과 높이려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태국은행은 원하는 만큼 바트화를 공급할 수 있다. 그저 찍어내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달러는 찍을 수 없다. 따라서 바트화의 가치를 방어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외환보유고는 얼마 안 가 바닥을 드러냈다.


통화가치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바트화 유통량을 줄이고 이자율을 올림으로써 투자자들이 달러를 빌려 바트화에 재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칼이었다. 당시 투자 붐이 일단락되면서 태국의 경제 성장은 이미 둔화되고 있었고, 건설 경기 또한 좋지 못했다. 이것은 일자리 축소를 의미했고, 일자리 축소는 낮은 소득을, 낮은 소득은 경제 다른 부문에서의 해고를 의미했다. 완전한 의미의 경기후퇴는 아니었지만 태국 경제가 더 이상 과거 방식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은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율 상승은 투자를 막는 일일뿐더러 경제를 확실한 불황에 빠뜨리는 길이었다. 


대안은 정부의 통화 개입 포기였다. 바트화 매입을 중단하고 바트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곤란한 일이었다. 평가절하가 정부 신인도에 흠집을 낼 것이라는 게 한 가지 이유였다. 또한 너무나 많은 은행과 금융회사, 기업들이 달러 채무를 갖고 있었다. 바트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오른다면 그들 다수가 파산할 것이 뻔했다.


진퇴양난의 답답한 상황이었다. 태국 정부는 바트화 하락을 용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외환보유고 손실을 막기 위해 혹독한 대내적 조치를 취할 생각도 없었다. 대신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어떤 전환점이 생겨나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뻔한 결말로 흘러갔다. 통화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폴 크루그먼. 2009. 『불황의 경제학』. 112-113




※ 고정환율제도의 문제점 - 투기적공격에 취약


이러한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원인 · 발생과정을 경제학계에서는 경제학이론을 사용하여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발도상국 특성상 고정환율제도를 택할 수 밖에 없었고,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점이다. 


개발도상국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고정환율제도가 초래하는 문제점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개발도상국들은 인플레이션 관리를 위해 고정환율제도를 도입한 상황이었다. 고정환율제도는 환율변동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자본유입을 증대시켜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체계가 발달되지 못했던 개발도상국의 특성상[각주:8], 갑작스런 자본유입 증대는 과잉대출 excessive lending & lending boom 로 이어지고 대출의 상당수는 부실처리 substantial loan losses 된다. 그 결과 부실대출을 떠안게 된 은행의 대차대조표는 크게 손상 a deterioration of bank balance sheets 되고 만다.   


Another potential danger from an exchange-rate peg is that by providing a more stable value of the currency, it might lower risk for foreign investors and thus encourage capital inflows.


Although these capital inflows might be channeled into productive investments and thus stimulate growth, they might promote excessive lending, manifested by a lending boom, because domestic financial intermediaries such as banks play a key role in intermediating these capital inflows.


Indeed, Folkerts-Landau, et. al (1995) found that emerging market countries in the Asian-Pacific region with the large net private capital inflows also experienced large increases in their banking sectors. Furthermore, if the bank supervisory process is weak, as it often i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so that the government safety net for banking institutions creates incentives for them to take on risk, the likelihood that a capital inflow will produce a lending boom is that much greater. 


With inadequate bank supervision, the likely outcome of a lending boom is substantial loan losses and a deterioration of bank balance sheets.


Frederic Mishkin. 1998. 'The Dangers of Exchange-Rate Pegging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13-14


이러던 와중에, 자본유출이 발생하여 동아시아 통화가치에 대한 하락압력이 거세졌다. 그런데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금리를 인상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까? 높아진 금리로 인해 은행의 부채부담은 증가하게 되고, 은행의 대차대조표는 더더욱 손상된다. 따라서 개발도상국 중앙은행은 금리인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경제주체들은 "개발도상국 중앙은행이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지 못할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 하락에 대한 투기적공격은 더더욱 심해진다.   


the deterioration in bank balance sheets can promote a currency crisis because it becomes very difficult for the central bank to defend its currency against a speculative attack. Any rise in interest rates to keep the domestic currency from depreciating has the additional effect of weakening the banking system further because the rise in interest rates hurts banks’ balance sheets.


This negative effect of a rise in interest rates on banks’ balance sheets occurs because of their maturity mismatch and their exposure to increased credit risk when the economy deteriorates.


Thus, when a speculative attack on the currency occurs in an emerging market country, if the central bank raises interest rates sufficiently to defend the currency, the banking system may collapse. Once investors recognize that a country’s weak banking system makes it less likely that the central bank will take the steps to defend the domestic currency successfully,


they have even greater incentives to attack the currency because expected profits from selling the currency have now risen. Thus, with a weakened banking sector, a successful speculative attack is likely to materialize and can be triggered by any of many factors, a large current account deficit being just one of them. In this view, the deterioration in the banking sector is the key fundamental that causes the currency crisis to occur.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4


더군다나 금융자유화 정책 시행 이후 자본유입의 양이 더욱 더 증가하면서 개발도상국 통화가치의 고평가 현상이 생겨났다. 변동환율제도를 택했더라면 자본유입으로 인한 통화가치 상승압력을 환율조정 Exchange-Rate Adjustment 을 통해 흡수할 수 있었지만, 고정환율제도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고평가된 통화가치를 지켜본 경제주체들은 "언젠가는 통화가치가 하락할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투기적공격 Speculative Attack 을 통해 환차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고정환율제도가 투기적공격에 대한 유인을 증가시킨 것이다.


물론 변동환율제도에서도 투기적공격이 발생하여 통화가치가 하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정환율제도 하에서 투기적공격이 발생하면, 변동환율제도 하에 비해 더 가파른 폭의 통화가치 하락이 발생한다. 고정환율제도 자체가 불안정성을 키운 것이다. 


Under a pegged exchange-rate regime, when a successful speculative attack occurs, the decline in the value of the domestic currency is usually much larger, more rapid and more unanticipated than when a depreciation occurs under a floating exchange-rate regime.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13


경제학자 Maurice Obstfeld와 Kenneth Rogoff는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한 금리인상 정책은 투자, 실업, 정부부채, 소득분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을 감수하면서까지 통화가치 하락을 막아내겠다' 라는 정부의 공언은 믿을 수 없다. 즉, 정부가 통화가치를 방어할 것이라는 신빙성을 경제주체들에게 주지 못한다면 Lack of credibility, 고정환율제도는 투기적공격에 더욱 더 취약해진다." 라고 지적한다.   


If central banks virtually always have the resources to crush speculators, why do they suffer periodic humiliation by foreign exchange markets? The problem, of course, is that very few central banks will cling to an exchange-rate target without regard to what is happening in the rest of the economy. Domestic political realities simply will not allow it, even when agreements with foreign governments are at stake.


As we have seen, to fend off a major speculative attack, the monetary authorities typically must be prepared to allow sharp increase in domestic interest rates, especially short-term rates. Such sharp spikes in interest rates, if sustained for any length of time, can wreak havoc with the banking system, which typically borrows short and lends long. 


Over the longer term, these unanticipated interest rate rises can also have profound negative effects on investment, unemployment, the government budget deficit and the domestic distribution of income. A government pledge that it will ignore such side effects indefinitely to defend the exchange rate is not likely to be credible. Lack of credibility, in turn, makes a fixed exchange rate more vulnerable to speculative attack.


Maurice Obstfeld, Kenneth Rogoff. 1995.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7-8    


그리고 Maurice Obstfeld와 Kenneth Rogoff는 "보통 정부는 투기적공격을 한번 방어하고 나면 고정환율제도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이다. 이전에 투기적공격을 초래했던 요인은 다음번 투기적공격을 유발하는 씨앗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이 쓴 논문의 제목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처럼 고정환율제도는 망상 Mirage 에 불과한 것이다.


Government often feel that if they could pull off a sudden realignment "just once" and thereby put fundamentals right, they would thereafter enjoy the fruits of a credibly fixed rate, including exchange-rate certainty and domestic price discipline. They are wrong. 


The factors that led to the last realignment remain and contain the seeds of the next one. No one can say for sure when it will occur, but its likelihood reintroduces both exchange-rate uncertainty and inflationary pressures-the very evils a fixed rate was supposed to guard against.


Maurice Obstfeld, Kenneth Rogoff. 1995.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9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의 문제점 - 대차대조표 위기 초래


고정환율제도가 초래하는 문제들을 정리하면, "고정환율제도 → 환율변동의 불확실성 제거 → 금융자유화 정책 → 동아시아 국가로의 자본유입 증가 → 과잉대출로 인한 은행권 대차대조표 손상 →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반전과 자본유출 →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 하락 → 은행권 대차대조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통화가치 방어를 위한 금리인상 정책 할 수 없음 → 통화가치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적공격 유인이 더더욱 증가" 라는 경로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은행권 대차대조표 손상을 막기 위하여,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용인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통화가치 하락 용인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한다. 바로, 개발도상국 은행과 기업들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y 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하락하자,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지고 있던 은행과 기업들의 부채부담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은행과 기업들의 대차대조표가 손상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간부문의 대차대조표 손상은 동아시아 경제의 신뢰성 상실 the loss of confidence 로 이어졌고 추가적인 통화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통화가치 하락을 막아야할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한 금리인상 정책은 경제의 산출물을 떨어뜨리기 a decline in output 때문에, 이것 또한 신뢰성 상실을 초래한다. 경제학자 Paul Krugman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대차대조표 위기 Balance Sheets Crisis" 라고 칭한다.

 

Balance sheet problems: 


Finally, descriptive accounts both of the problems of the crisis countries and of the policy discussions that led the crisis to be handled in the way it was place extensive emphasis on the problems of firms’ balance sheets. On one side, the deterioration of these balance sheets played a key role in the crisis itself—notably, the explosion in the domestic currency value of dollar debt had a disastrous effect on Indonesian firms, and fear of corresponding balance sheet effects was a main reason why the IMF was concerned to avoid massive depreciation of its clients’ currencies. (...)


instead of creating losses via the premature liquidation of physical assets, a loss of confidence leads to a transfer problem. That is, in order to achieve the required reversal of its current account, the country must experience a large real depreciation; this depreciation, in turn, worsens the balance sheets of domestic firms, validating the loss of confidence. policy that attempts to limit the real depreciation implies a decline in output instead—and this, too, can validate the collapse of confidence.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6


경제학자 Frederic Mishkin 또한 "1997 외환위기가 금융위기로 커진 원인에는 짧은 만기구조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질 수 밖에 없는 신흥국의 한계에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 하락은 기업들의 대차대조표를 악화시켰고, 기업들은 대차대조표를 복구하기 위해 위험성이 큰 사업을 벌였다. 즉, 통화가치 하락이 대차대조표에 준 충격이 동아시아 경제를 위축시켰다 " 라고 말하며, 대차대조표 손상 문제를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진단한다. 


A currency crisis and the subsequent devaluation then helps trigger a full-fledged financial crisi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because of two key features of debt contract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debt contracts both have very short duration and are often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


These features of debt contracts generate three mechanisms through which a currency crisis in an emerging market country increases asymmetric information problems in credit markets, thereby causing a financial crisis to occur.


The first mechanism involves the direct effect of currency devaluation on the balance sheets of firms. With debt contracts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y, when there is a devaluation of the domestic currency, the debt burden of domestic firms increases. On the other hand, since assets are typically denominated in domestic currency, there is no simultaneous increase in the value of firms’ assets.


The result is a that a devaluation leads to a substantial deterioration in firms’ balance sheets and a decline in net worth, which, in turn, worsens the adverse selection problem because effective collateral has shrunk, thereby providing less protection to lenders. Furthermore, the decline in net worth increases moral hazard incentives for firms to take on greater risk because they have less to lose if the loans go sour. Because lenders are now subject to much higher risks of losses, there is now a decline in lending and hence a decline in investment and economic activity.


The damage to balance sheets from devaluation in the aftermath of the foreign exchange crisis has been a major source of the contraction of the economies in East Asia, as it was in Mexico in 1995. This mechanism was particularly strong in Indonesia, which saw the value of its currency decline by over 75%, thus increasing the rupiah value of foreign-denominated debts by a factor of four. Even a healthy firm initially with a strong balance sheet is likely to be driven into insolvency by such a shock if it has a significant amount of foreign-denominated debt.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4-5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교훈 - 2013년 현재는?


경제개발 단계에서 고정환율제도와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1997년 발생한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게 된다.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가져다 준 교훈은 '① 고정환율제도의 포기 ② 만기불일치 Maturity Mismatch 해소 ③ 통화불일치 Currency Mismatch 해소 ④ 외환보유고 확충' 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경제학계는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Capital Flows Volatility 초래하는 위험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남미 금융위기 이후에는 국가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에, 1990년대 초반 유럽 금융위기 이후에는 자기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Effect 방지에, 그리고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에는 자본흐름의 변동 Capital Flows Volatility 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 에서 살펴봤듯이, 자본이동을 감독하는 거시건전성 감독정책 Macroprudential Supervision 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2013년 현재 동아시아 국가들과 신흥국은 자본흐름의 변동에 대한 대비를 잘 하고 있을까? 미국 Fed의 양적완화 정책 축소 Tapering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급작스런 자본유출에 대한 위험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것이다.




<참고자료>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2편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2013.10.27


3편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2013.11.09


4편 -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2013.11.11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2013.08.23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2013.10.18


2013년 6월자 Fed의 FOMC - Tapering 실시?. 2013.06.26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 2013.09.14


Barry Eichengreen, Ricardo Hausmann and Ugo Panizza. 2003. "The Pain of Original Sin"


Maurice Obstfeld, Kenneth Rogoff. 1995. 'The Mirage of Fixed Exchange Rates'.


Frederic Mishkin. 1997. 'The Causes and Propagation of Financial Instability'.


Frederic Mishkin. 1998. 'The Dangers of Exchange-Rate Pegging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폴 크루그먼. 2009. 『불황의 경제학』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국제금융센터. 'Ⅲ. 외환위기 주요 사례 분석 -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2013.08.23 http://joohyeon.com/162 [본문으로]
  2. 1세대 모델을 다룬 대표적인 논문은, Paul Krugman. 1979. 'A Model of Balance-Payment Crises'. Robert Flood & Peter Garber. 1984. 'Collapsing Exchange Rate Regime: Some Linear Examples'. [본문으로]
  3. 2세대 모델을 다룬 대표적인 논문은, Maurice Obsfeld. 1994. 'The Logic of Currency Crises'. [본문으로]
  4. EMS는 역내 통화의 변동폭에 한도를 정한 일종의 고정환율제도로서 환율변동폭은 기준환율 중심으로 상하 2.25%로 제한됐었다. [본문으로]
  5. 외환보유고가 감소했다는 사실은 외환시장에서 국내통화를 사들이고 외국통화를 공급했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자본유출과정에서 외국통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 가격이 상승했다면, 개발도상국은 시장에 개입하여 외국통화를 공급함으로써 외국통화가격을 다시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외국통화를 시장에 팔고 받은 국내통화는 중앙은행 계정에 흡수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통화공급량이 축소된 것이다. [본문으로]
  6. (뒤에서 고정환율정책의 문제점에서도 다룰 것이지만) 이것을 어떻게보면, 고정환율정책이 개발도상국의 통화정책을 제한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Frederic Mishkin은 "개발도상국은 통화정책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정환율제도로 인해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This criticism of exchange-rate pegging may be less relevant for emerging market countries than it is for developed countries. Because many emerging market countries have not developed the political or monetary institutions which result in the ability to use discretionary monetary policy successfully, they may have little to gain from an independent monetary policy but a lot to lose.) (7) 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Frederic Mishkin의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고정환율제도로 인해 제약된 신흥국의 통화정책은 1997 외환위기 확산의 원인이 되고 마는데... [본문으로]
  7. 한국의 단기외채 증가에 대해서는,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http://joohyeon.com/174 참고. [본문으로]
  8. 1997년 당시 한국 금융감독체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http://joohyeon.com/173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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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④]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외환위기 ④] 단기외채 조달 증가 - 국내은행위기를 외채위기·외환위기·체계적 금융위기로 키우다

Posted at 2013. 11. 11. 02:48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1997년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의 회고록 중 일부.


● 97년 7월 8일 : 태국, 금융위기에 몰리다


- 모든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이던 7월 초, 난데없이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을 거듭하고 (...) 신문 지면은 우리나라도 당장 그 금융태풍에 휘말릴 것처럼 온통 우려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나-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태국과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97년 7월 27일 : 태국 위기 남의 일 아니다


-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대외신인도를 예의 주시하면서 대책 강구가 필요했다. 특히 신용도가 괜찮은 은행들이 해외로 나가 달러를 많이 빌려 외환보유고를 많이 쌓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 97년 9월 8일 : 태국과 한국은 다르다


- 나-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태국과 한국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선 경제의 기초여건이 달랐다. (...) 무엇보다 태국은 역외 금융시장을 육성한다는 명분 하에 금융시장이 완전개방되어 있어 헤지 펀드 등 단기 투기성 자금의 유입이 용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증권시장 일부만 개방되었을 뿐,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견해는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이었다.


● 97년 9월 20일 :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의 대문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뒤에 있는 쪽문으로 나가서 저지른 일이 집안 전체를 뒤흔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 97년 10월 17일


- 동남아 통화위기가 10월 중순에 들면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 97년 10월 23일


- 홍콩 증시 폭락 사태로 또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계 증시가 모두 출렁이는 것이어서 우리도 그런 충격파 속에 함께 놓여진 것으로 생각했지,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치닫는 길에 들어섰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79-287


1997년 7월~10월 사이 강경식은 '무관심 → 당혹 → 자신감 → 당혹 → 위기감 → 패닉' 의 심경변화를 보여준다. 7월 태국 외환위기가 발생했을때 우리나라와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다가 '은행 해외지점들의 외환차입금' 통계를 알고난 뒤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9월 들어 다시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 자신감을 가지게되고 '금융시장의 낮은 개방도' 를 이유로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이 심각한 문제임을 9월 20일에 인지하게 되고, 10월 중순 들어서 대만 · 홍콩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우리나라 통화가치 하락이 가속화되자 패닉에 빠져든다.


1997년 동아시아경제와 한국경제에 구체적으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은행 해외지점들의 외환차입금'과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현지에서 빌려쓴 돈'은 또 무엇일까? '금융시장의 낮은 개방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이번 포스팅을 통해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자.




※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으로 인한 단기외채 유입증가

- 기업 : 무역신용성 외환거래 → 단기외채 비중 증가

- 은행 : 해외지점을 통한 단기외화 차입  

- 종금사 : 단기로 조달해온 외화를 장기로 운용 → 만기구조 불일치 발생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에서 살펴봤다시피, 1990년대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 · 금리자유화 등의 금융자유화 정책 financial liberalization 을 시행했다. 금융자유화 정책의 또다른 내용은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정부는 금융기관 및 기업의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에서도 다루었던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대칭적 규제'가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에서도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경제는 외환거래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단기자본의 도입보다 장기자본에 대한 도입에 더 많은 규제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와 '비대칭적 규제'는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차입금리가 낮은 단기외화를 위주로 차입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두열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1998) 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 단기외채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96년 58%에 이르렀다[각주:1]. 만기구조가 짧은 단기외채는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웠다.



종금사의 부실문제와 더불어 경제에 있어 ‘약한 고리’를 형성한 것으로서 대외부채의 단기화이다. 이는 1990년대에 있어 세계화 추진 및 OECD 가입을 위한 조급한 자본자유화의 과정에서 미숙한 정책으로 인하여 제도적으로 단기자본의 도입보다 장기자본에 대한 도입에 더 많은 규제가 남아 있게 된 데서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외국환관리규정에 단기외화차입에 대해서는 규제가 없는 반면 장기외화차입에 있어서는 재경부 장관에 대한 신고 및 사전보고 의무가 존재함에 따라 금융기관들이 규제가 없고 차입금리가 낮은 단기외화를 위주로 차입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표 5-38>에서 우리 나라의 외채구조 변화를 보게 되면 1992년까지 우리 나라 전체외채 428억 달러 중 단기외채는 185억 달러로서 전체의 43% 수준에 머무르던 것이 1994년을 계기로 53%, 57%,58%로 계속 상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9-210


구체적으로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단기외채를 늘렸을까? 기업부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환거래 자유화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의 <90년대 환율정책과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분석: 외환위기의 정책적 원인과 교훈>(1998) 에 따르면, 당시 기업들은 무역신용을 경로로 하여 단기외채를 조달해왔다.




외환정책당국은 기업의 외환거래의 경우 우선적으로 실물거래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무역신용성 외환거래를 자유화한다는 방침에 따라 1990년대중 지속적으로 세부정책조치를 단행하였다. (...) 외환정책당국은 1990년대중 매년 계속하여 기업의 연지급수입기간 및 수출선수금의 영수한도를 증가시키며 무역관련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왔다.


<표 10>은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채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 10>을 보면 우선 기업의 무역신용성 외채는 1992년의 61억달러에서 1996년에는 220억달러로 급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환거래규제상 기업은 무역신용성 외채 이외에는 단기외채를 보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역신용성 외채의 증가는 그대로 기업의 전체 단기외채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표 10>이 보여주는 무역신용성 외채의 급증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무역신용성 외채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또는 바꿔 말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따른 무역신용규모의 증가를 반영한 것이었는가? 만일 이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이 외채의 증가는 외환유동성 위험의 상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문제시할 현상이 못된다.


그러나 곧 밝혀지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무역신용성 외채가 급증한데에는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따른 무역신용규모의 확대를 반영한 것도 있겠으나 일정 부분은 기업이 무역신용을 경로로 하여 기타 용도의 자금조달원으로 이용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신인석. 1998. '90년대 환율정책과 외환거래 자유화정책 분석: 외환위기의 정책적 원인과 교훈'. 『한국개발연구원』. 44-46 


1990년대에 들어서 은행들의 단기외채 the short-term external borrowing 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속 Wang Yunjong의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2001)의 Table 3를 보면, 1990년대 한국으로의 자본유입 Capital Inflows 중 상당수가 은행을 통해 발생 Foreign Credits to Bank 했다. Table 4를 보면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1996년 중 대외부채 External Debt 의 66.7%가 금융부문 Financial Sector 의 부담이었고, 단기외채의 비중은 61.0%에 달했다.  


< 출처 :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6-17 >


은행들은 주로 해외지점 overseas branches 을 통해 단기외채를 들여왔는데, 그 비중이 국내지점에 맞먹었다. 금융자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은행들은 해외지점을 늘렸는데, 금융시장 개방과 자율화에 상응하는 준비태세와 대응전략이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채 무분별한 영업확대 및 해외진출 확대를 한 것이다. 


< 출처 : 재정경제원. 1998.01.30. '1997 경제위기의 원인 · 대응 · 결과'. -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부록 571쪽에서 재인용 > 


< 출처 :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7 >


As also found in Table 3, the major portion of the increase in foreign capital inflows was the short-term external borrowing by the banking sectorConsequently, the short-term external debt grew much faster than long-term debt throughout the years, and the financial sector became the major holder of external debts. Out of the total increase in external debt during the three years (1994-96), the banking sector explains about 70 percent. The remaining 30 percent reflect growth of the corporate sector's external debt, mainly related with trade credits.


In fact, short-term foreign currency liabilities of the Korean banks were much larger than reflected in capital inflows. As part of the liberalization measures, banks were allowed to open and expand operations of overseas branches. By exploiting the foreign capital channeled through overseas branches, banks actively operated foreign currency denominated business through domestic branches. This resulted in large foreign currency liabilities of overseas branches comparable to those of domestic branches as vividly shown in Table 5.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16-17


기업 · 은행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종금사의 외화차입증가 이다.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은 단지 금리가 싸다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단기외화를 들여와서 장기로 운용하였다. 1997년 10월 기준 종금사들의 총외화차입금은 약 200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 중 1년 미만 단기차입이 64.4%인 13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종금사들은 단기로 조달해온 외화차입금 대다수를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로 운용했는데, 1년 이상 장기대출 비율은 83.7%인 168억 달러에 달해 엄청난 자금만기구조의 불일치 maturity mismatch 가 발생했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표 5-41>을 보면 1997년 10월 말 현재 종금사들은 단기로 129억 달러, 장기로 71억 달러를 조달하였는데 이 중 단기로 운용한 것은 32억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 167억 달러는 장기로 운용하여 심각한 차입대출의 기간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종금사들의 자산과 부채간 기간 불일치는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15


1982년 금융자율화 조치의 일환으로 32개까지 늘어난 단기금융회사는 1992년에 선발 8개 단자회사가 은행과 증권회사로 전환했고, 1994년 9개 지방 단자회사와 1995년 나머지 15개 단자회사가 무더기로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하여 우리나라는 30개나 되는 종합금융회사 천지가 되었다.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24개 전환 종합금융회사들은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차입하여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을 하였다. (...)


1997년 10월에는 종합금융회사의 총외화 차입금이 200억 달러까지 되었는데 그 중 1년 미만 단기차입이 64.4%인 120억 달러나 되었다. 위험한 단기차입금으로 1년 이상 장기대출을 83.7%인 168억 달러나 했으니 엄청난 자금만기구조의 불일치(maturity mismatch)가 생겼다. 한보철강 부도로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신규차입이 중단되자 7일 이내의 초단기 차입으로 하루하루를 넘기다가 기아자동차 사태가 터지고는 일일자금(over-night)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홍콩의 금융시장에서 종합금융회사들은 "금리, 금액, 기간을 불구하고 돈을 빌리려고 홍콩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떼거지" 라는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


종합금융회사는 Merchant Bank 이지만 bank라는 이름을 달고 다닌 종합금융회사의 행태와 자금난은 우리나라 모든 금융기관의 대외신인도를 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은행의 단기차입마저 끊기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결국에 가서는 IMF사태를 몰고 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종합금융회사가 도화선이 되어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11월에 우리나라에도 상륙하게 되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428-431




※ 19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 발생과 기아자동차 부도유예 처리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97년 한국경제는 금융자유화 이후 기업 · 은행 · 종금사의 단기 외화차입금을 증가하여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도 살펴봤듯이, 1994년-1996년 간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와 고평가된 원화가치, 대기업들의 과도한 부채와 한보철강 등의 부도로 인해 1997년 당시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기초여건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와중에 1997년 7월 태국을 시작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해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말레이시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확산을 본 외국투자자들은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도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나 7월에 발생한 기아자동차가 사실상 부도처리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월에 한보그룹(10위)[각주:2] · 4월에 삼미그룹(26위), 진로그룹(19위) · 5월에 대농그룹(44위), 한신공영그룹(58위)에 이어 7월 기아그룹(8위)마저 무너지면서, 곧바로 신용평가기관들은 기아자동차에 대한 대출규모가 큰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하였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평가절하를 계기로 동남아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투자자들의 주의가 환기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7월 15일 기아자동차가 사실상 부도나 다름이 없는 부도방지협약을 신청하였다. 곧바로 신용평가기관들은 기아자동차에 대한 대출규모가 큰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하였으며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치러야 할 재정비용이 국내총생산의 20%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전망으로 인해 7월 30일 Moody's는 정부출자기관인 한국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을 하락시켰으며, 같은 이유로 8월 6일 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부터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국가신용등급 전망의 하향조정으로 말미암아 민간기업과 금융기관의 해외자금조달은 점차 어려워졌으며 차입조건도 악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7-8월중 산업은행 채권의 스프레드와 선물환율이 급등한 점에서도 볼 수 있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23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외환위기를 수습했던 이규성의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2006) 을 통해서도, 동남아 외환위기 발생하고 기아그룹이 부도유예 처리된 1997년 7월 이후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국내금융시장 동향을 살펴보면, 금리에 있어서는 7월 15일 기아그룹의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된 후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이 상승하였으며 7월 중 평균으로 각각 11.41%와 11.86%를 나타냈다. 8월에는 동남아 위기의 영향 우리 금융기관의 부실 우려 등에 따른 해외 차입여건의 악화로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은 각각 12.39%와 12.11%로 큰 폭 상승하였다. 9월에도 종합금융회사의 자금사정 악화와 기아의 화의신청 등에 영향을 받아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은 각각 13.17%와 12.36%로 상승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


금융기관의 해외차입 여건 역시 금융기관들의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인하여 장단기 자금차입 모두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은행들의 단기외채에 대한 만기연장 비율이 하락하는 동시에 가산금리는 대폭 상승하였다. 8월 12일에 일부 은행은 외화결제자금 부족으로 한국은행으로부터 7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또한 은행들의 장기차입여건도 악화되었다. (...)


종금사들도 급속한 대외신인도 하락에 따라 자체신용에 의한 외화차입이 어려워지면서 1997년 6월 이후 부족한 외화유동성은 주로 국내은행으로부터 조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7월부터는 국내은행의 외화자금 사정도 악화되자 초단기 차입에 주로 의존하였다. 특히 지방소재 종금사의 경우 외화조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중에는 원화자금으로 외화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25-26


1997년 7월 이후 경제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8월에 한국정부는 금융기관 부채의 지급보증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지급보증 선언은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켰다. 한국정부는 외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해왔는데, 과거에는 통했던 방식이 1997년에는 통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 한국경제 성장과정 - 정부의 지급보증을 통한 해외자본 도입


한 국가가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면 물적자본 physical capital 이 필요하고, 물적자본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각주:3]하다. 박정희정권은 1962년 『외자도입촉진법』(the Foreign Capital Inducement Act) 을 제정함으로써 '정부의 지급보증 하에 외국자본 도입' 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돈이 없던 한국이 정부의 지급 보증하에 해외자본을 들여와 생산활동에 투입[각주:4]하였고 경제성장 달성에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윤제, 김준경의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1997) 에 따르면, 1962년-1966년 사이 한국경제 총투자의 53 퍼센트가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은 외국자본에 의해 동원되었다. 그리고 1975년 당시 국내은행 상업대출의 88 퍼센트가 정부의 지급보증 하에 동원된 외국자본 이었다. 


The Allocation of Foreign Loans


Foreign Capital - especially foreign loans - played a large role in Korea's financial sector policy. As with domestic credit, the government also tightly controlled allocation of foreign credit. From 1962 to 1991, the ratio of total investment to GNP was 27.4 percent annually. Six percent was financed by foreign capital, primarily loans. Hence, approximately 22 percent of total investment during this period was financed by foreign capital. Between 1962 and 1966 (when the Korean economy began to surge), 53 percent of the total investment was financed with foreign capital. (Table 11).


Korean firms that wished to borrow abroad were required to obtain the approval of the EPB. The Board also determined the total amount of required loans according to investment priorities for projects and enterprises specified by the five-year economic plans. MOF closely monitored all approved foreign borrowings and their repayment. In addition, the government guaranteed virtually all foreign loans. In 1966 the government revised the Foreign Capital Inducement Act to allow banks to provide guarantees without approval from the National Assembly.       


KEB (one of the specialized banks in Korea) and commercial banks could issue repayment guarantees for private foreign loans without authorization from the National Assembly. Since the government held the majority of shares in commercial banks, the KDB and the KEB, the government in effect provided their repayment guarantees. As such, the government could use the allocation of foreign loans as a policy tool for industrial financing, without political intervention. As of 1975, for example, domestic banks provided repayment guarantees for 88 percent of the total commercial loans (Table 12).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85-86       

      

외화부채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은 1990년대에 들어서도 관행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에서도 살펴봤듯이, 한국 은행권은 외화부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출에 있어서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 상황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1997년이 되자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왔던 방식이 이제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 금융기관 부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선언한 한국정부 

- 민간금융기관의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


1997년 8월 25일, 한국정부는 민간부문의 해외차입이 어려워지자 '금융기관 부채의 지급보증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종금사들이 자력으로 외화결제를 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8월 18일 한국은행이 보유고에서 5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게 된다[각주:5] 


97년 8월 25일(2) 대외신인도 대책


8월 25일 발표한 대책은 특융 등 부실금융기관에 대한 대책보다는 대외신인도 제고 쪽에 더 역점을 두었었다. 여기에는 외신인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부가 금융기관의 대외 채무에 대해 '정부 신용으로 보장'하고, 특정 금융기관의 대외 지급 불능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필요시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다. (...)


핵심은 정부의 지급 보증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했다. (...) 7월 기아사태 이후 해외 금융시장에서는 우리 정부의 '구조적 문제 해결 의지'와 정책의 실천력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차입금리도 올라가는 추세였고 외화 확보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는 국내 은행의 신용 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필요하고, 정부 보증 정도의 강력한 의지표명이 있어야 금융시장 안정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나의 생각을 고집할 수 없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64


그리고 10월 22일, 정부는 부도상태에 처한 기아그룹을 산업은행 출자를 통해 구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킨다. 기아자동차에 대한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debt equity swap'로 번역해야 마땅한데, 일부 외신에서는 이를 'nationalization(국유화)'로 보도한 것이다. 기아의 부담을 국가가 떠맡는 것으로 해외에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한국경제 자체의 대외신인도가 하락한 것이다. 때가 바로 민간금융기관의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각주:6].


97년 10월 22일 기아 처리, 국내에선 대환영 해외에선 비판적


11시에 기아에 대한 법정관리 방침을 발표하자, 주가지수는 34.5포인트, 6.08%나 폭등했고 일거에 지수 600선을 회복했다. 이제 기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금융개혁법안 통과[각주:7]에만 힘을 기울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문제를 처리한 날이 공교롭게도 홍콩 증시가 요동치기 시작한 바로 그 날이었다. 연속 폭락장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증시가 모처럼 상승세로 돌아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그 기대는 간단히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다음날인 23일에는 33.2포인트나 빠지는 폭락장세로 반전했다. 좀더 빨랐거나 오히려 며칠 더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홍콩 증시가 폭락하는 날과 겹친 것은 '최악의 택일(?)'이었다.


게다가 기아 처리에 대한 해외 논평은 매우 냉담했고 비판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경제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23일자 신문에서 "변화와 개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던 강경식은 기아 처리에 있어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기아를 '국유화'한 것은 한국이 미래에 번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혁과정에 있어서 엄청난 후퇴이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이러한 비판 중에는 사실도 있었지만, 내용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다. 그 하나는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debt equity swap'으로 번역해야 마땅한데, 일부 외신에서는 이를 'nationalization(국유화)'으로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취임 초부터 발표문은 항상 영문과 함께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있다. 해외에 대한 서비스 차원뿐 아니라, 이번처럼 발표 내용이 잘못 전달되는 불상사에 대비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발표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보니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만 것이다. 산업은행 융자의 출자전환은 대주주가 없는 상황에서 기아문제를 처리해갈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러나 기아의 부담을 국가가 떠맡는 것으로 해외에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낭패를 보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기아를 '공기업 형태로 운영'한다는 발표문에도 문제가 있었다. 협력업체에 대한 원활한 자금 공급과, 불필요하게 '제3자 인수설'에 휘말리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국내용'이었는데, 해외에서는 기아를 '공기업화해서 살린다'라는 뜻, 즉 '국유화'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3자 인수 방침은 추후에 밝혀도 된다고 생각하고, 발표 당시에 이를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책이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91-293


19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에 이어 10월 기아그룹 부도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국제금융계는 한국경제의 기초여건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지만,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국제 금융계에서 '신용'을 잃어버린 데 있다. 한보사태 이후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내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의 어느 금융기관이 선뜻 한국 기업이나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겠는가. 더욱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국을 시작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들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


우리가 '태국과 다르다'는 것을 강변하면 할수록 국제 금융가에서 자라나고 있는 한국 경제에 대한 의혹의 싹은 커져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특히 한국정부가 한보나 기아사태와 같은 당면현안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기초체력'만 강조하자 해외에서는 "한국 정부의 통제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지적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31-33


금융기관 부실을 지켜본 외국채권자들이 "한국의 금융기관이 부실처리 되면 지급보증을 했던 한국정부가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정부는 변제능력이 있는가?"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서 채무국 자체의 변제능력을 의심하게 된 외국 채권자들이 일순간 투자자금을 회수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부족한 투자재원을 전략산업에 집중투자하기 위해 정부가 금융기관의 운영을 시장기능에 맡기지 않고 직접 주도하여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민간금융기관들도 공기업처럼 인식되어 왔고,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금융기관의 부채는 관행적으로 정부가 보증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관행은 한편으로는 안정된 금융시장을 형성해 전례 없이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효율적인 과잉투자를 조장하는 문제점을 낳게 된다[각주:8]. (...)


이러한 과잉투자문제는 경제발전과 자본자유화가 진척되면서 더욱 심각해지는데,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정부의 금융기관 대출을 일일이 감시할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들은 자본자유화에 따라 저리의 해외자금을 차입하여 마구 기업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관행적인 정부보증을 믿었기에 외국 채권자들도 사업평가 한 번 하지 않고 선뜻 국내 금융기관에 자금을 빌려 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가 실패로 끝나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서 채무국 자체의 변제능력을 의심하게 된 외국 채권자들이 일순간 투자자금을 회수해감으로써 외환위기가 야기되었다는 것이 아시아 외환위기에 관한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9-10




※ 1997년 10월 23일, 동남아 외환위기가 동북아로 북상하다


정부의 지급보증선언 · 기아자동차 공기업화 논란과 더불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남아 외환위기의 북상이다. 공교롭게도 기아자동차 공기업화 논란 다음날인 10월 23일, 홍콩증시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외환위기가 동북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1997년 10월 17일, 대만이 외환시장방어 포기를 선언했고 ,10월 23일 홍콩증시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커지고 말았다. 


10월 22일, 3개월 간의 실랑이 끝에 정부는 부도상태에 처한 기아그룹을 산업은행 출자를 통해 구제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가 바로 민간금융기관 부도가 국가부도로 인식이 전환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인 10월 23일 홍콩의 주가가 폭락하였고, 이에 따라 외국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경제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10월 24일 S&P는 한국의 국가신용을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AA-로부터 A+로 하향조정하였고, 장기신용전망도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S&P는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에 대해 "이번 구제조치가 단기적인 압력을 완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임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라고 혹독히 비난하였다. 산업은행의 국채가격은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자자들은 세계 11위 규모의 한국 경제가 멕시코와 같은 경제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걱정하였다.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 발표전에 128bp 였던 산업은행 채권 스프레드는 불과 열흘만에 269bp로 넓어졌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24

   

1997년 10월 23일을 기점으로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자금 회수로 인해 한국 외환시장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1997년 들어서 원화가치가 조금씩 하락하고 있긴 하였으나, 10월 23일을 기점으로 원화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2일 1달러당 915.10원이었던 환율은 23일 921.00원 · 24일 929.50원 · 27일 939.90원 · 28일 957.60원 · 29일 964.00원 · 11월 6일 975.00원 · 11월 10일 999.00원 · 11월 17일 1,008.60원 · 11월 25일 1,122.00원 · 12월 23일 1,962원까지 대미달러 환율이 치솟는다. 


< 출처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는 1997년 10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래에 첨부한 외환보유액 그래프에 따르면 1997년 10월 말,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약 300억 달러로 나온다. 그렇지만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의 실제 외환보유고가 150억 달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50억 달러는 약 5주일분의 수입액 도는 단기외채의 5분의 1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 출처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1997 한국의 외환위기의 원인 

- 원화가치하락을 노린 투기적공격이 아니라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 


앞서 논의됐던 내용을 종합하자면, 199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은 막대한 양의 단기 외화차입금을 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기아자동차는 부도유예처리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인한 논란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서 외국투자자들의 급격한 자금회수를 불러왔고 이는 원화가치 하락과 외환보유고 고갈로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전 포스팅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원화가치 하락을 노린 헤지펀드 · 핫머니의 투기적공격이 1997 외환위기의 원인일까?'를 통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발발한 "1997년 11월달 외환보유고 감소의 주된 요인은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이 아니라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 이었다." 라고 밝힌바 있다. '<표 7> 외환보유고 수요요인(1997)'를 보면 11월 중 외환보유고 수요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7>에서 환율요인에 따른 외환수요의 증가분을 가장 넓은 기준의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표에는 경상수지적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과 포함된 것의 두 가지 투기적 공격지표를 계산하여 놓았다. 두 지표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11월중 투기적 공격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의 14~20%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경상수지적자까지 감안한 광의의 투기적 공격 지표에 의거하면 9~11월중의 환율에 따른 외환수요요인은 1~3월에도 미달하는 규모였다. 


두 기간의  차이와 11월 외환위기를 낳은 것은 환위험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고 따라서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볼 수 없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의 존재여부[각주:9] 였음은 <표 7>에서 명백하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26-27


그리고 1997년 11월달 외환보유고 감소의 주된 요인이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인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인지 여부는 외환시장에서 외환에 대한 수요 및 공급요인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표 6> 외환시장 수급요인 월별추이(1997)'을 살펴보면, 1997년 11월 들어 '외채감소액'이 증가[각주:10]하고'해외지점 예치금 증가액'이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났음을 뜻한다. 해외지점에 대한 국제채권은행의 채무상환요구가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에 의해 충족된 것이다. 


 < 출처 :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25 >  


그렇다면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또한,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는 어떤 경로를 통해 발생했을까?




※ 국내금융기관 해외지점의 단기 대외지불부담액 

-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 고갈의 주요원인


앞서 "해외지점 overseas branches 을 통해 단기외채를 조달한 은행들" · "종금사의 외화차입증가를 이야기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내은행 해외지점에 대한 한국은행의 예치금 증가액'이 늘어난 이유를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대로 199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은행들과 종금사는 해외지점을 통해 단기외채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외채통계에는 한국의 막대한 해외 현지금융이 제외되기 때문에 외채규모가 과소평가 된다. 


박대근, 이창용은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1998) 을 통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그리고 이들의 현지법인이 차입한 역외금융차입까지를 포함시킬 경우 한국의 단기외채 지불부담은 1,000억 달러로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단기외채 수치의 두 배에 달한다"(26) 라고 지적한다.


이규성 또한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2006) 를 통해 "1994~1996년간의 총대외지불부담금 및 순외채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미달러화 표시 경상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라고 지적한다.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의 외채통계는 세계은행(IBRD) 기준에 의거하여 작성되었으며, 세계은행 기준 외채는 공공부문, 민간부문 및 금융부문 등 우리나라 경제주체들이 국내로 도입한 외채총액 중에서 아직 상환되지 않은 잔액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해외채권자들로부터 우리의 외채통계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즉, 한국의 막대한 해외 현지금융도 외채통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IMF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금융 가운데서 금융기관의 해외점포가 차입한 금액과 국내금융기관의 역외계정차입금을 외채통계에 포함시키기로 하였으며, 이와 같이 정의된 광의의 외채를 총대외지불부담으로 명칭을 붙였다. 이러한 외채통계 작성 기준에 입각하여 추산된 우리나라 외채규모의 변화추이는 [표 2-4]에 제시되어 있다. 


추산된 외채규모를 전제로 우리나라의 외채상환 능력을 분석해 보면, [표 2-5]에 제시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세계은행에 적용하고 있는 외채상환능력 평가기준의 어느항목에 비추어 보더라도 경채무국 또는 외채상환능력에 문제가 없는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를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1994~96년간의 총대외지불부담 및 순외채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미달러화 표시 경상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또한 1996년의 경우에는 경상 GDP 성장률이 해외차입 금리수준을 하회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외환위기 직전의 우리 경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외채상환능력이 저하되는 시기에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59-60


다르게 말하면, 해외지점의 대외지불부담액을 포함할 경우 한국경제의 외환유동성 부족이 심각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인석의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1998)에 나오는 '<표 8> 외환유동성 추이'를 보면, 막대한 양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1996년 들어서부터, '국내금융기관 해외지점 단기대외지불부담'이 포함된 지표B가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경제는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 상태였다" 라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 경제에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 문제가 존재하였는가? 또한 존재하였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는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표 8>을 작성하였다. <표 8>은 한국경제의 외환유동성 추이를 두 가지 지표로 제시한 것이다. 하나는 세계은행기준 단기외채(유동부채)에서 유동성이 높은 대외자산을 제한 '지표 A'이고, 둘째는 IMF기준 대외지불부담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여 계산한 '지표 B'이다.


<표 8>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과연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6년말 현재 지표 A,B 모두 양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 이 시점부터 잠재적으로 외환유동성이 부족할 수 있는 영역에 진힙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야기되기까지는 거시충격과 이에 대한 정책대응상의 오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표가 보이듯이 단기외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로의 자본유입이 증가한 것은 94년부터였으며 같은 시기 외환유동성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급격한 악화가 진행된 것은 지표 A에 의거할 때 명백히 96년이었고, 이는 물론 96년에 기록한 대폭의 경상수지 적자[각주:11]에 기인한 변화였다. 그리고 96년의 경상수지적자는 교역조건 충격으로 요구되었던 환율절하를 정책당국이 지연시킨 결과[각주:12]였다고 평가되므로, 그만큼의 외환유동성 악화는 거시정책대응 미숙에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셋째, 그러나 한국경제가 지니고 있던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의 크기는 해외지점의 대외지불부담 증가를 고려하지 않는 한 과소평가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잠재적 외환유동성 부족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96년 말에 있어서도 지표A에 의거하는 한 문제의 심각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1-32


당시 은행들과 종금사들은 대기업부실[각주:13] · 7월 동남아 외환위기 · 정부의 지급보증 논란 등으로 외국투자자들이 급격한 자금회수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외화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7대 시중은행의 차환율[각주:14]은 10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다. 


< 출처 :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7 >


은행들의 외환유동성 사정이 어렵게 되자 그 동안 은행에 의존해 오던 종금사들의 외환유동성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제 금융기관들은 해외지점이 보유한 단기대외지불부담금 결제를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1월 중 한국은행이 국내 금융기관에 당일 결제자금으로 외환을 지원한 현황은 아래 첨부한 [표 1-18]과 같다. 해외지점의 부족한 결제용 외환을 충당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은 11월 상반월에는 8.4억 달러, 하반월에는 80.9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해외에 예치하여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환보유고에서 국내 은행의 해외지점에 예치한 금액이 11월 말에는 169.4억 달러로 대폭 증가하였다[각주:15]


그 결과 한국은행의 가용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 50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금융기관의 해외지점에 예금한 외화인 해외예치금은 평상시라면 회수하여 외환보유고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외환위기가 시작되어 해외지점이 외환부족상황에 처함에 따라 사실상 사용불가능한 외환보유고가 되어버렸다.


< 출처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2 >


< 출처 :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9 >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은 "국내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의존하게 되는 시점을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표 11>과 [그림 5]에 의하면 인출사태는 11월 17일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한다.


<인출사태의 발생시점>


11월 국내금융기관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한국은행은 이들 금융기관에 외환을 공급하였고, 그 결과 (가용)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발적 자금공급자가 없어져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는 것을 인출사태로 정의할 때, 따라서 국내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의존하게 되는 시점을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이 사용한 구체적인 지원방법은 피지원은행에 대한 한국은행의 외화예금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 외화예금은 국내본점에 대한 수탁금은 '외화예탁금'으로, 국외지점에 대한 수탁금은 '해외지점 예치금' 으로 한국은행 계정상 분류되었는데, 따라서 외화예탁금과 해외지점 예치금의 합계치(이하 '예치금 합계치'로 약칭)는 11월 중 한국계 은행에 요구된 채권상환액에 대한 추정치를 제공해준다. 또한 그러므로 예치금 합계치의 일별추이를 관찰하면 인출사태의 발생시점을 가늠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같은 추론에 근거하여 예치금 합계치의 10~11월중 추이를 보인 것이 <표 11>과 [그림 5]이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인출사태는 11월 17일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14일까지 큰 변동이 없던 예치금 합계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었던 15, 16일을 지낸 뒤 뚜렷한 상승세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8-39




※ 정부당국의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정책? or 외환시장 미발전의 구조적문제?


앞서 살펴본대로, 1997년 11월 국내금융기관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한국은행은 이들 금융기관에 외환을 공급하였고 그 결과 (가용)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다. 게다가 원화가치하락을 막기위한 정부당국의 개입은 외환보유고 고갈을 가속화시켰다. 박대근, 이창용은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1998) 을 통해 "정부당국의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정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라고 비판한다. 


1997년 당시의 외환보유고의 동향과 외환시장 개입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 '<표 8> 한국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을 살펴보면 1997년 4월~6월 들어 한보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외화유입이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7월 동남아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고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하고 11월부터는 감소폭이 커진다. 


박대근, 이창용은 "10월 말 이후의 외환보유고 감소는 환율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외환시장 개입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외환시장이 외환수급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빠지자 통화당국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달러를 공급"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율의 평가절하를 시장기능에 맡겼으면 외환보유고 감소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환보유고의 증감은 통화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표 8>은 1997년 한 해 동안 한국은행의 현물 및 선물시장 개입규모와 외환보유고 및 외화예탁금 증감액의 월별 변화를 보여준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97년 1사분기에 정부는 원화의 절하를 막기 위해 달러를 매도하였다. (...)


통화당국의 달러화 매도개입은 4월에 들어서면서 매수개입으로 바뀌고 이에따라 6월까지는 외환보유고가 증가한다. 4-6월은 한보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외화유입이 다시 재개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달러를 매수함으로써 원화의 절상을 막아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면서 1사분기에 감소한 외환보유고를 재충전하였다. 그러나 7월 이후 동남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본유출이 시작되자 환율의 급등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달러화 매도개입을 재개하였고 그 규모는 9월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0월 말 이후의 외환보유고 감소는 환율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외환시장 개입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도 하락으로 해외신규차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외채 원리금 상환에 필요한 외화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 외환시장에서 외환을 구매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원화절하에 대한 기대로 달러의 공급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에 따라 외환시장 개장과 함께 환율은 일일변동제한폭의 상한까지 상승하고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외환시장이 외환수급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빠지자 통화당국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달러를 공급하였다.   


이와 같은 외환시장 개입은 외환보유고를 감소시켰고, 그 결과 대외신인도가 추락하여 자본유출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명확해진 시점에서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시장평균환율제도를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귀중한 외환보유고를 낭비한 셈이다. 사후적으로 볼 때 환율방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진 시점이었기에 당연히 환율의 평가절하를 시장기능에 맡겨 놓았어야만 했다. 1996년과 1997년 상반기까지의 외환시장 개입은 옳든 그르든 그 나름대로의 정책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10월 이후 이루어진 외환시장 개입은 상황을 오판한 정책실패로서 외환위기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29-31


그러나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은 "IMF 이후 환율변동제한을 없앤 다음에도 외채상환을 위한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대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보유고가 그렇게 급감하게 되었던 것" 이라고 항변한다. 일반적인 외환시장은 가격(환율)이 변화할 때 외화 공급과 수요가 늘거나 줄어들면서 균형을 맞추지만, 당시 한국의 외환시장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시장 기능이 작동하는 '외환시장'이 아직 없다는 것이 재경원 실무자들의 생각이었다. 시장이 되려면 가격(환율)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탄력적으로 늘기도 줄기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외환시장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IMF 이후 채권시장, 부동산시장 등이 많이 개방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환율이 올라간다고 해서 달러를 들여와 원화로 바꾸어도 주식투자 이외에는 운용할 데가 없고, 환율이 아무리 올라가도 외채 상환을 위해서는 달러를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IMF 이후 환율변동제한을 없앤 다음에도 외채상환을 위한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대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보유고가 그렇게 급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환율만'으로 외환 수급의 균형을 이룰 수는 없었다. 환율상승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없앤 97년 12월에도 환율안정을 위해 보유 외환을 시장에 공급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


우리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데 시장에만 맡겨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97년 11월 당시, 상승압력은 흡수하면서 정부의 환율안정에 대한 정책의지에 대한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래서 상승압력을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한국은행에, 안정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재경원이 시장 관리를 주도하도록 하면서 환율제한폭을 없애는 방향의 정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2.25%의 제한폭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너무 변동폭이 작았던 것이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314-315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 국장을 맡았던 정덕구는 "(서울 외환시장 특성상, 정부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없다면) 기업들은 수출입 결제자금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의 규모가 너무 작다 보니[각주:16] [각주:17] 달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와도 문제가 생기고, 반대로 일정 규모 이상으로 빠져나가도 문제가 생겼던 것" 이라고 덧붙인다.


서울 외환시장은 원래 기업의 수출입 결제자금, 즉 순수한 실수요 자금만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국내 은행과 종금사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국내 외환시장에 달려들어 무조건 달러를 사들였다. 그 바람에 기업들은 수출입 결제자금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한국은행은 11월 18일에도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이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길은 이제 완전히 막혀버렸다. (45) (...)


시장의 실패이다. 시장감시 시스템이 붕괴됐더라도 시장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시장의 자생력이 살아 있다면 감독이 다소 느슨해지더라도 위기국면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 외환시장은 그 규모가 너무 작았다. 시장이 자생력을 가지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거래가 있어야 하는데 장에서 거래되는 외환의 규모가 너무 작다 보니 달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와도 문제가 생기고, 반대로 일정 규모 이상으로 빠져나가도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어느 정도 자본 유출입은 시장이 스스로 감내해내야 하는데 서울 외환시장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외국인투자자들의 시장지배력이 커진 것도 문제였다. (111)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45, 111




※ 대한민국 정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 급격한 자본유입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알지 못했



1997년 11월 21일,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낸 한국정부는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에서 다루었던 국내은행위기(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각주:18] · 외환위기(Currency Crisis)[각주:19]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각주:20]로 발전[각주:21]하게 된 결과, IMF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 살펴봤듯이, 1997년 당시 대기업부실[각주:22]과 이로 인한 금융권부실[각주:23]이 국내은행위기로 끝나지 않고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하게 된 원인은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의 과도한 단기외채 조달 때문이었다. 국내경제위기는 대외신인도 하락을 가져왔고 이는 외국투자자들의 자금회수로 이어졌다. 단기로 조달한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기업 · 은행 · 종금사들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정부당국은 외화결제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 그 결과, 한국의 외환보유고 소진을 본 외국투자자들은 자본회수를 서두르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과 아시아국가들은 1990년대 자본자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급격한 자본유입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각주:24]였다.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 증가가 초래할 문제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연쇄적으로 발생한 외환위기에 대해, 이규성은 "아시아의 위기는 경상수지의 중요성이 도외시된채 진행된 자본자유화 과정에서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 라고 말한다.


자본거래가 자유화되면 한편으로는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져 자본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간 자금흐름이 갑작스럽게 반전되기도 하고 환율의 투기 등이 발생함으로써 국제금융시장의 가변성이 증폭되고 때로는 외환위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대폭 확대하는 경우에는 그 위험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각주:25]. 이하에서는 자본자유화 과정에 있어서 경상수지의 중요성, 위험성을 고려한 외채관리의 중요성과 환율정책의 중요성을 외환위기측면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


자본자유화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해외자본 도입 및 해외진출이 매우 용이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은 환율은 크게 변동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금리가 높은 국내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는 금리가 낮은 해외차입을 선호[각주:26]하였다. (...)


이러한 상황의 변화 속에서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의 의미가 달라진다며 국제수지를 걱정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비웃는 당국자도 있었다. (...) 그런데 앞의 제 Ⅱ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상수지 적자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되더라도 국제금융시장의 심리가 변하여 자본수지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유지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 


오늘날과 같이 환율과 금리의 변동성이 매우 큰 금융환경 속에서 조그만 충격에도 급격히 자산구성을 변경하는 투자가들의 행동양식을 생각할 때 지속적이로 안정적인 자본수지의 흑자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수지의 흑자가 발생하더라도 유입된 해외자본을 과잉투자하거나 부동산과 같은 비생산적 투자[각주:27]에 활용하거나 지나친 소비를 보전하는 데 사용한다면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확대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1993년 이후 자본자유화에 따른 해외자본 조달의 용이성에 안주하면서 고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우리는 변동성이 심한 국제금융환경 속에서 국제투자가들은 언제든지 쉽게 표변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외면하였다. 이번 위기를 통하여 비록 자본거래가 자유화된 상황에서 해외자본의 조달이 용이해졌다 하더라도 경상수지 적자가 갖는 의미를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 하겠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위기 당사국들은 자본자유화 확대 → 대규모 자본수지 흑자 → 환율의 고평가 속에 고성장 추구 →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과정[각주:28]을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 과거 많은 나라들이 재정적자 확대 → 경상수지 적자 확대 → 자본수지 흑자 확대라는 경로를 걷다가 외환위기에 직면한 양상과는 현저히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의 위기는 경상수지의 중요성이 도외시된 채 진행된 자본자유화 과정에서 자본유입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발생한 자본계정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86-89




< 4편 참고자료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신인석. 1998. '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박대근, 이창용. 1998 '한국의 외환위기: 전개과정과 교훈'. 『한국경제학회』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재정경제원. 1998.01.30.  '1997 경제위기의 원인 · 대응 · 결과'


이제민. 2007. "한국의 외환위기: 원인, 해결과정과 결과". 『경제발전연구 제13권 제2호』.


  1. 1997년에는 단기외채비율이 42%로 하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국제금융기관의 자금회수로 인하여 생긴 결과이다. 1997 한국 거시경제에 의문을 품은 국제금융기관은 차입금회수에 서두르게 되는데, 급격한 자금회수 과정에서 다수의 한국 기업들과 은행들이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고만다. [본문으로]
  2. 대기업 군의 서열은 1996년도 금융, 보험업을 제외한 기업집단의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출처는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88 [본문으로]
  3. 경제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단순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물적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함을 뜻한다. 한 국가의 부wealth를 단순한 '돈의 총량'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면 그만이다.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법정통화 fiat money 일 뿐이다. [본문으로]
  4. 이것의 경제학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5.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26-27 [본문으로]
  6. 서울대학교 이제민은 '한국의 외환위기: 원인, 해결과정과 결과'(2007)을 통해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많은 문헌이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한국 정부가 1997년 8월 민간부문의 외채에 대한 지급 보증을 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갖는 의미다. 국내 구조가 외환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보다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한 후로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 여부가 아니라, 정부가 민간의 외채를 대신 갚아 줄 능력이 있는지 여부가 외환위기가 일어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물론 한국정부가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문제는 재정의 불건전성이 아니라 지급보증을 한 민간의 단기외채에 비해 정부(한국은행)가 가진 외화준비금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 한국 정부의 문제는 결제능력부족(insolvency)이 아니라 유동성부족(illiquidity)이었다" 라고 주장한다. 1997 외환위기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냐, 아니면 단순한 유동성위기냐'의 논쟁은 추후에 다룰 계획이다. [본문으로]
  7. 이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의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http://joohyeon.com/173 참조 [본문으로]
  8.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9.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이 보고서의 논평을 맡은 이영섭은 "<표7>의 해석에 대해서 논평자도 기본적으로 저자의 입장을 같이하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저자가 제시한 1997년 11월중의 대규모의 인출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투기적 공격 때문에 발생된 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제채권단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표7>을 보면 투기적 공격은 그 이전부터 발생하지만 채권인출은 11월에만 발생하고 있으므로, 이는 10월말 및 11월 초에 발생하기 시작한 위기에 대한 대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표7>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외환위기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만일 외환위기의 시작을 11월 중하순(예를 들어, IMF 구제금융 신청일인 11월 21일)으로 잡으면 저자의 해석에 대해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작을 10월 하순(예를 들어, 기아사태처리 발표 및 홍콩증시 폭락이 발생한 10월 22~23일)으로 잡으면 이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저자와 대립되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고 지적한다. 본인도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점을 10월 하순으로 잡더라도, 이는 헤지펀드 등의 투기적공격이 아니라 1997년 동안 높았던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본문으로]
  10. 다시말해 외채가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1.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2.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의 '※ 원화가치 고평가와 1994-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를 막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3.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본문으로]
  14. = 만기연장비율 [본문으로]
  15.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1-42 [본문으로]
  16. (포스팅 서두에 나오듯) 1997년 9월 당시 강경식은 "우리나라는 증권시장 일부만 개방되었을 뿐,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 라며 "한국 자본시장의 낮은 개방도"를 장점으로 생각햇지만 오히려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본문으로]
  17. 당시 IMF 또한 "한국의 시장개방 정도가 작아서 문제" 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더 큰 폭의 자본시장 개방'을 제시한다. 당시 IMF의 이러한 처방이 옳았는지의 여부는 추후에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18. 특정국이 공공부문 혹은 민간부문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상태 [본문으로]
  19. 특정 통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해당국 정부가 대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사용하거나 금리 인상 등을 통해 환율을 방어하는 상태 [본문으로]
  20. 외환위기 · 은행위기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인데 "금융시장이 심각한 붕괴에 있는 상태 · 위기의 확산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적인 중개기능이 손상되어 실물경제에 대규모 부정적 효과 파급"하는 상태 [본문으로]
  21. 은행위기 · 외채위기 · 외환위기 · 체계적 금융위기의 정의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22.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본문으로]
  23.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http://joohyeon.com/173 [본문으로]
  24.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의 '※ 원화가치 고평가와 1994-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를 막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http://joohyeon.com/170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25. 1997년 당시 한국경제는 '자본거래의 자유화'가 가져오는 위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7년의 교훈을 배운 2013년 한국은 현재 '자본거래의 급격한 변동이 가져오는 위험'을 가장 잘 대비하고 있는 국가로 꼽힌다. │ 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 http://joohyeon.com/164 참조 [본문으로]
  26. 이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의 '※ 국내은행 대출고객 비중에서 5~30대 재벌 & 비재벌기업 비중 증가 →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 상승' http://joohyeon.com/173 참조 [본문으로]
  27. 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자본이동 통제하기 - 거시건전성 감독정책의 필요성'의 '※ 신흥국 금융시장의 거품을 초래하는 미국 Fed의 통화정책' http://joohyeon.com/164 참조 [본문으로]
  28.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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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③]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외환위기 ③]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Posted at 2013. 11. 9. 15:03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지난 포스팅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에서는 1997 한국 외환위기의 핵심원인이었던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를  다루었다. 당시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했던 한국 기업들은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해 현금수입이 감소한 반면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지출은 증가해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제2금융권을 통해 기업어음(CP) 등을 발행하여 단기자금 조달을 늘려갔는데, 기업어음에 의한 자금조달의 문제는 만기구조가 단기일 뿐만 아니라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대기업군의 연쇄적 도산을 초래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대기업들이 '제2금융권' (혹은 비은행금융권) 을 통해서 '단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 증가로 금융시스템 내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금융감독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번 포스팅을 통해 '경제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의 증가' · '금융감독 시스템의 미흡' 등등 1997년 당시 한국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정부가 금리를 통제하는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을 통해 성장해왔다. 정부는 인위적으로 낮게 형성된 금리를 통해 특정집단에 금융자원을 몰아주었다. 반면, 정부의 선택을 받지 못한 기업들은 장외시장 curb market 을 통해 시장균형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정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기업들은 제도금융권 밖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두열은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2002) 보고서를 통해 "제도금융권에 대한 장기간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의 산물로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권이 형성되었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에 있어서 비은행권의 형성배경을 보면 정책당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동원을 극대화하고 전략 산업부문을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은행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제도금융권에 대해 장기간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을 실시하였다. 당시 정책당국의 금융억압 내용을 보면 정부가 은행의 여수신 금리를 결정하고 은행의 대출부문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등 자금의 가격과 수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기간에 걸친 금융억압의 산물로 제도금융권 밖에서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권이 형성되어 금융산업에 있어서 은행을 중심으로 한 제도금융권과 사금융권의 2중구조가 심화되었다. 사금융권의 규모가 막대해짐에 따라 단기 고금리 사채가 성행하고 기업의 재무구조가 악화되자 정책당국은 1972년에 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사채를 일정기간 저금리로 동결하고 상환을 유예하는 등사채 동결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8.3조치[각주:1]를 실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정책당국은 채 동결의 부작용을 완화하고 사금융권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1972년부터 단기금융회사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단기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등 비은행금융기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77   


여기서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도 다루었듯이, 그동안 한국경제는 기업부실이 발생하였을때 정부가 직접 금융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보통 기업부실이 발생하면 주요 채권자인 은행이 나서서 부실채권을 정리하지만, 한국경제에서 은행은 단순히 국가의 지시를 받는 대리인 역할에 머물렀다. 


은행들은 "은행 자산과 부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보다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게 경영평가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행들은 본연의 임무인 신용평가 · 리스크 관리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융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신용금고·단자회사 등 비은행금융권이 커지고 만다.     


Korea relied on credit interventions too heavily and for too long as an industrial policy instrument. The banking system bore the brunt of this strategy. The government used the banking system as a treasury unit to finance development projects and to manage risk sharing in the economy.


Bankers were treated as civil servants. Their performance was evaluated according to whether they complied with government guidance, rather than whether they managed their assets and liabilities efficiently. Commercial banks in Korea were involved so heavily in directed credit progrmas that they almost functioned as development banks. In the process, they incurred large nonperforming loans (NPLs) (Table 19), which again had to be covered with government support. 


Consequently, banks lagged behind the development of the real sector and could not effectively meet its demand for financial servies; the banks thus lost market share to other financial institutions, such as Non-Banking Financial Instutions(NBFIs), which could operate more feely and thus prolifereatd.  


  • 한국경제에서 은행부문은 신용창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은행부문이 한국경제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 < 출처 :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

당시 경제관료들은 이러한 '한국 금융산업의 낙후성과 비은행금융권의 비정상적인 발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금융개혁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추진된 몇차례의 금융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장관으로 1997 외환위기를 수습했던 이규성은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를 통해서 금융개혁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금융산업의 낙후성은 앞으로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추진된 금융개혁의 기본방향은 창의와 능률에 바탕을 둔 금융의 자율성과 상업성을 제고하여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경쟁과 시장원리를 확충함으로써 금융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금융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

이러한 70~80년대에 추진된 기업 · 금융개혁정책의 결과 기업부문에 있어서 기업공개가 확대되었으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이 통제되고 부동산취득이 어렵게 되었다. 금융부문에 있어서도 금융상품이 다양화되고 새로운 금융기법이 도입되었다. (...) (그러나) 은행은 민영화되었지만 은행장은 여전히 정부에서 사실상 선임하였으며 금융기관의 경영은 자율화되었지만 관치금융의 폐습이 근절되지 않고 부실채권은 여전히 늘어갔다.[각주:2] 기업과 금융의 취약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

금융자유화가 추진되지 못한 이유도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금융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시중은행은 민영화되고 이들이 공급하는 정책금융은 축소되었지만 이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보다 여전히 기업을 지원하는 공공적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고성장의 신화가 풍미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각주:3]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어렵게 하였다.

둘째로 정부는 금융자율화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는 노력에 소홀하였다. 정부는 은행을 민영화하면서도 누적된 부실채권을 충실히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민영화 이후의 은행 책임경영체제를 제대로 확립할 수 없었다. 민영화된 은행은 분산된 소유구조로 인하여 경영주체를 확립하지 못하고 은행장은 여전히 정부가 선임하였다. 또한 정책금융을 과감하게 재정으로 이관하지 못하여 정부의 관여와 보호의 관행이 지속되었다.

셋째로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차입경영이 지속[각주:4]됨으로써 신용평가에 의한 여신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담보와 대마불사의 기준에 의한 신용공여가 시정되지 못하였다.

끝으로 금융자율화에 따라 건전성 감독이 강화되어야 하는데도 감독체계는 여전히 미흡하였으며 신용평가기관과 예금보험기구도 미비된 상태[각주:5]였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영리기관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부의 보호를 기대하면서 점포나 수신고 늘리기와 같은 외형성장을 추구하고 대기업 위주의 신용공여에 안주하고 있었다.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제도금융권은 단순한 금융자원동원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은행금융권'의 영향력은 1990년대 초반에 시행된 금융자유화로 인해 더욱 더 커졌다.  



※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은행금융권의 팽창



1990년대 시행된 금융자유화의 중점은 금리자유화 이었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금융억압 Financial Reression 정책의 일환[각주:6]으로 금리를 인위적으로 통제했었으나, 1991년 11월' 제 1단계 금리자유화'를 시작으로 금리자유화가 단계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문제는 금리자유화 과정에서 비은행권 금리가 은행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유화 되었다는 점이다. 


금융시장의 규제정도가 균등하지 않고 특정부문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이른바 비대칭적 규제 Unbalanced Regulation[각주:7]가 적용된 결과, 비은행권의 수신비중은 은행의 수신비중을 2배 이상 능가할 정도로까지 비대화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각주:8]가 비은행권 비중을 더욱 더 키우고 만것이다.


한국 종금사의 성장은 외환위기 발생 전에 은행권과 비은행권인 종금사간에 업무영역, 금리, 경영 등에 대한 규제에 있어서 과도한 차별이 지속되었음에 많이 기인한다. 지속된 은행권과 비은행권간비대칭적인 규제종금사를 비롯한 비은행권(여기에서는 제2금융권을 의미함)의 이상 비대화를 가져왔다.


비대칭적인 규제의 내용을 보게 되면 첫째, 업무영역에 있어서 비은행권에 대해서는 은행수신 상품과 유사한 상품의 취급이 허용되어 온 반면 은행권에 대해서는 제2금융권 상품의 특성을 반영한 금융상품의 취급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둘째, 금리에 있어서는 1990년대 들어 추진된 금리자유화 과정에서 비은행권의 금리가 은행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유화되어 은행의 수신금리 자유화비율이 비은행권에 비해 낮은 추이를 지속하였다. 셋째, 자금운용에 있어서도 은행이 정책금융, 지시금융, 구제금융 등을 주도적으로 담당해야 했던 반면 비은행권은 은행에 부과되고 있던 지급준비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규제에 따라 비은행권이 비대화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제2금융권의 수신 및 여신 비중이 은행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어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 1996년에는 비은행권의 수신비중이 은행의 수신비중을 2배 이상 능가할 정도로까지 비대화하게 되었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85-186


비은행권의 빠른 팽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90년부터 1996년까지 7년간 은행권의 자산규모는 185조원에서 451
조원으로 244% 증가하였음에 비하여 비은행금융권의 자산규모는 216조원에서 761조원으로 352% 증가하였다.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도 살펴봤듯이, 이러한 비은행금융권의 여신은 단기일 뿐만 아니라 담보에 바탕을 두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을 경우 갑작스런 여신회수에 돌입하므로 기업부도급증의 원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업의 부도가 증가할수록 비은행금융권의 부실여신도 늘어나 자본잠식에 빠진 비은행금융권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졌다. 

'기업의 수익성 악화 → 비은행금융권의 갑작스런 여신회수 → 기업부도 → 부실여신 증가 → 자본잠식에 빠진 비은행금융권 증가 → 자본보충위해 여신회수노력 증가 → 기업부도 → (...)  국내금융시장 혼란' 이라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1997. 9월 말 현재 종합금융회사의 총부실여신은 [표 1-9]에서 보는바와 같이 5조 4,862억 원이었으며, 이는 자기자본대비 135.6%에 달하는 규모였다. 특히 기존의 6개 종합금융회사를 제외한 전환종금사(단기금융업무의 비중이 높은 종전의 단자회사에서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한 회사)의 부실여신 비율이 높았다. 그 중 대한 · 제일 · 신한 · 나라 · 한화 · 한솔 · 경남 · 대구 · 쌍용 · 청솔 · 울산 · 신세계 · 경일 등 14개 종금사는 자기자본대비 부실여신비율이 200%를 초과하여 사실상 자본이 완전 잠식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은 국내 금융시장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무디스와 S&P는 각각 7.26일과 8.6일에 5개 시중은행을 감시대상으로, 국가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팽창한 기업어음(CP)시장

게다가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에서도 살펴봤듯이,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대칭적규제단기금융상품인 기업어음(CP, Commercial Paper) 시장의 팽창을 불러왔다. 은행수신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먼저 자유화되고 신탁계정의 금리자유화 폭이 컸었다. 그 결과 자금조달비용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행이 까다롭고 장기금융인 회사채시장에 대한 규제는 지속되고 기업이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는 단기금융인 기업어음 시장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었다. 

따라서, 은행은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을 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회사채, 국채 등 비교적 안전한 자산보다는 기업어음 등 위험자산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시장으로 자원배분이 집중된 것이다.   

은행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자유화됨에 따라 장기수신비중이 늘었으며,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큰 CD 및 신탁계정으로 자금조달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같은 시중금리수준에 비해 평균자금조달비용이 상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자산운영도 금리가 규제된 대출보다는 금리가 자유화된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하려 하게 되었다. 


  • 1990년 이후,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컸던 CD·금전신탁 계정으로 은행수신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조달비용은 증가하게 되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7-8

회사채금리의 경우도 비록 자유화되어 있었기는 했으나, 당국의 물량규제로 실질적으로 금리를 규제해왔다. 반면, 기업어음(CP)의 경우 1993년 만기 및 최저금액제한이 완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금리에 대한 행정지도도 완전철폐하였으며, 물량규제도 전혀 없어 실질적으로 거의 완전히 자유화된 금리가 되었다.


따라서 단기여신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어음이 거의 완전자유화된 반면 장기금융인 은행의 대출과 회사채금리에 대해서는 행정규제가 지속됨에 따라 개인과 금융기관의 자금운용이 CP 등 고수익단기금융자산에 크게 몰리고 대출과 회사채보유 등은 상응한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표2> 참조).


기업의 자금조달원도 이러한 단기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실제로 이들 기업부문의 자금조달의 flow측면에서 보았을때의 변화는 <표3>과 같다. 


(...)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규제완화의 일환으로 추진된 은행의 신탁자산운용에 대한 규제완화는 (1993년 10월) 신탁자산의 유가증권 보유를 크게 늘어나게 하였다. 은행의 경우 전반적으로 실질적인 금리자유화폭이 큰 신탁계정이 은행계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신탁계정의 자산운용측면에서도 신탁대출보다 유가증권 보유비중이 더 크게 늘어났다. 유가증권 보유에 있어서도 국채와 같은 무위험자산이 줄고, 주식이나 회사채 같은 장기금융보다 기업어음 등 단기채권 보유가 크게 늘어났다.



  • 1991년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 고수익 추구에 따라, 기업들도 회사채·은행대출·기업신용 보다는 기업어음(CP)에 의존해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기업어음(CP) 증가율이 가장 높은 것을 <표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1990년, 기업들의 자금조달 중 기업어음(CP)가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6년, 기업어음(CP)이 차지하는 비중은 17.5%로 증가하였다. 기업어음(CP)에 비해 안전자산인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1.5%에서 17.9%로 감소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4-8

 



※ 국내은행 대출고객 비중에서 5~30대 재벌 & 비재벌기업 비중 증가 

→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 상승


기업어음(CP)은 만기구조가 짧기 때문에 기업들의 위험도를 키우고 은행대출에 비해 금리가 높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조달비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보통의 기업들은 되도록이면 기업어음(CP)에 의한 자금조달을 꺼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금융자유화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각주:9]' 이다. 

1990년 초반 자본거래 규제가 완화됨에 따라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은 국내은행대출 혹은 기업어음(CP)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 대신에 금리가 싼 해외차입을 크게 늘리기 시작[각주:10]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은행대출 수요는 줄어들게 되었는데, 그 공백은 5대재벌 이외의 기업들이 메우게 됐다. 국내은행 대출고객 구성에 있어 (5대 재벌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 비중이 증가한 것이다. 그 결과, 탄탄한 수익구조를 가진 5대 재벌이 아닌 비교적 수익성이 낮고 위험도가 큰 나머지 기업들을 주고객으로 삼게된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가 상승했다. 

  • 1990년대 자본시장 개방 이후,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들은 국내금융이 아닌 해외금융을 통한 자금조달을 늘리기 시작한다. 

  • 그 결과, 1990년대 들어 5대 재벌의 국내부채비율은 줄어들고 해외부채비율은 증가한다. 
  • 줄어든 국내금융 수요는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이 메꾸었다. 1990년대 들어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국내부채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은행의 부채와 자산구조로 보았을 때 부채구조는 다소 장기화된 반면 자산구조는 오히려 단기화하여 은행의 원래기능인 단기부채를 장기자산으로 전환하는 기능이 감소하였으며, 자금조달비용은 상승하고 자산구성 역시 수익성이 큰 자산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은행고객의 경우 평균차입비용상승, 조달자금의 단기화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은행의 대출고객 구성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자본거래 규제완화와 더불어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의 경우 1994년부터 해외차입을 크게 늘이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본자유화는 상업차관이나 국내회사채 시장개방보다는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직접금융시장에서의 주식 및 사채발행을 우선적으로 자유화함으로써 해외에 지명도가 높은 5대 재벌이 주로 자본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이들의 자금수요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여기서 생긴 국내금융의 여유를 보다 수익성이 낮고 위험도가 높은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확대로 메우게 된다. 그 결과 국내금융기관들의 자산구성위험도는 증가하게 되었다. 

둘째, 여신에 있어서도 고수익자산에 대한 금융기관 간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가계대출 및 중소기업대출 등 고금리대출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고, 또한 30대 기업의 여신관리에 따라 우대금리의 적용을 받는 대기업들의 은행대출기회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이들의 단기금융시장에서의 차입확대를 촉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8-11

비교적 금리가 낮은 해외차입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한 5대 재벌은 부채부담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아래 첨부한 '<그림 12> 부채의 평균비용'을 보면, 5대 재벌이 부담하는 부채의 평균비용이 크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부채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5대 재벌과 달리 국내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이들은) 기업어음(CP) 등 고금리 단기상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자유화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커진 기업어음(CP) 시장,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금융의 부실화와 기업의 부실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5대 재벌의 경우에는 1992년 이후 부채의 평균비용이 하락하였는데 이는 금리가 싼 해외차입비중이 늘어난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6~30대 재벌의 경우는 부채의 평균비용이 1993년 이후 완만하게 상승하였는데, 이는 전체 시장금리수준의 변동과 더불어 금융시장 구성이 비교적 6~30대 재벌이 많이 의존한 업어음 등 고금리 단기상품쪽의 비중이 크게 발전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

기업의 재무구조측면에서 볼 때, 이미 해외에 널리 알려진 5대 기업과 포철, 한전과 같은 공기업들이 주로 해외자금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해외에 나가 기채할 수 있을만큼 지명도가 알려지지 않은 5재 재벌 이하의 민간기업들에게는 이러한 자본개방은 재무구조 개선에 별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


5대 재벌이 자본거래의 부분적인 자유화로 자금조달원을 해외로 돌리게 되자 국내금융시장에서의 여유가 생기게 되고, 때마침 자율화가 가속화된 국내금융시장이 경쟁심화[각주:11]와 더불어 6~30대 재벌과 여타 비재벌기업들이 국내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기회가 확대되었다. 이 규모가 작은 재벌들은 5대 재벌에 비해 그 당시 재무구조가 취약했을 뿐 아니라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내금융기관 자산portfolio의 위험도는 높아지게 되었다. (15-16) (...)



당시 국내금융시장에서의 불균형된 금리자율화는 단기금융시장 특히 기업어음시장의 급속한 성장을 조장하여 전반적으로 기업의 자금조달을 단기화시켰다. (...) 1995년 하반기 이후의 국내경기침체, 교역조건의 악화는 결국 6~30대 재벌의 매출수익과 현금흐름을 더욱 악화[각주:12]시켰으며, 이자지급과 원금상환능력을 크게 떨어뜨려 1997년부터 일련의 부도사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금융위기는 지난 약 10년간의 실질임금의 과도한 인상, 기업들의 방만한 투자행태[각주:13]를 조장한 경쟁질서 및 산업정책에 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으나, 1993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금융자유화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하여 결국은 기업의 부실화, 금융부실화를 재촉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보인다. (17-18)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15-18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앞서 살펴본것처럼 1997년 한국 금융시장은 1990년에 시행된 금융자유화로 인해 비은행금융권과 기업어음시장(CP)의 규모가 팽창해 금융시스템 내의 불안정성이 증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은행 대출고객구성에서 비교적 수익성이 낮은 5대 재벌미만 기업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가 상승하는 상황이었다. 


금융경제학 권위자인 Frederic Mishkin은 "금융자유화 financial liberalization 는 대출규모의 급격한 증가 the lending boom 를 불러오고 그 결과 은행들은 고위험성 대출 excessive risk-taking lending 을 늘리게 된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금융자유화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성 대출이 증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Frederic Mishkin은 "① 은행들의 리스크관리 능력부족 ② 금융감독기능의 부재" 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the story starts with financial liberalization that resulted in the lending boom which was fed by capital inflows. Once restrictions were lifted on both interest-rate ceilings and the type of lending allowed, lending increased dramatically. As documented in Corsetti et al. (1998); Goldstein (1998); World Bank (1998); Kamin (1999), credit extensions in the Asian crisis countries grew at far higher rates than GDP. The problem with the resulting lending boom was not that lending expanded, but that it expanded so rapidly that excessive risk-taking was the result, with large losses on loans in the future.


There are two reasons why excessive risk-taking occurred after the financial liberalization in East Asia. The first is that managers of banking institutions often lacked the expertise to manage risk appropriately when new lending opportunities opened up after financial liberalization. In addition, with rapid growth of lending, banking institutions could not add the necessary managerial capital (well-trained loan officers, risk-assessment systems, etc.) fast enough to enable these institutions to screen and monitor these new loans appropriately.


The second reason why excessive risk-taking occurred was the inadequacy of the regulatory/supervisory system. Even if there was no explicit government safety net for the banking system, there clearly was an implicit safety net that created a moral hazard problem. Depositors and foreign lenders to the banks in East Asia, knew that there were likely to be government bailouts to protect them. Thus they were provided with little incentive to monitor banks, with the result that these institutions had an incentive to take on excessive risk by aggressively seeking out new loan business.


Emerging market countries, and particularly those in East Asia, are notorious for weak financial regulation and supervision. When financial liberalization yielded new opportunities to take on risk, these weak regulatory/supervisory systems could not limit the moral hazard created by the government safety net and excessive risk-taking was the result. This problem was made even more severe by the rapid credit growth in a lending boom which stretched the resources of the bank supervisors. Bank supervisory agencies were also unable to add to their supervisory capital (well-trained examiners and information systems) fast enough to enable them to keep up with their increased responsibilities both because they had to monitor new activities of the banks, but also because these activities were expanding at a rapid pace.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2-3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에서 살펴봤듯이, 경제개발단계에서 단순히 국가의 금고 역할을 담당하고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국가의 지시에 의해 부담만 떠안았던 한국의 은행들[각주:14]은 기업신용과 대출리스크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연세대 경제학과 함준호는 "위기이전 우리 금융시스템은 정부의 직간접적인 위험보증 등을 통해 위험을 조절해왔으나, 금융자율화 이후 정부개입 철회의 공백을 대체할 시장규율이 미처 정립되지 못하여 금융시스템 내의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위기이전 우리 금융시스템은 상업적 원리에 따른 자본배분보다는 금융저축의 결집과 투자재원의 확보에 보다 주력했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적 중개 위주의 금융기능은 비교적 투자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적었던 60, 70년대의 성장단계에서는 매우 중요시되는 기능이었다. 즉 개발성장 시기에 있어 자본배분기능과 위험조절기능은 금융부문보다는 오히려 정부의 직간접적인 위험보증 등을 통해 그 기능이 제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정부가 점진적이나마 지속적인 금융자율화를 추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원분배기능과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던 점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


과거 정부개입에 수반하여 제공되었던 광범위한 암묵적 정부보증이 80년대말 이후 90년대에 걸쳐 금융자율화 추진과 함께 비은행부문으로부터 점차 축소 · 철회되기 시작하였으나, 정부개입 철회의 공백을 대체할 시장규율을 미처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금융시장의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가운데 금융저축이 비은행부문을 통해 대기업투자로 중개되었다.


함준호. 2007. '외환위기 10년: 금융시스템의 변화와 평가'. 『한국경제학회』. 5-6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조윤제의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의 '<표 7> 신용평가의 엄격성 비교: 국내신용평가회사와 S&P'를 보면, 1997년 당시 국내은행들과 신용평가사들의 신용평가가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금융시장의 전반적인 건전성을 감독하는 통합기구의 부재였다. 2013년 현재는 금융감독원이 은행 · 증권 · 보험 등의 건전성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1997년 당시에는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감독하는 기구가 은행감독원 · 증권감독원 · 보험감독원 · 신용관리기금 으로 분산되어 있어 통합감독기구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은 "한보그룹이 거래한 금융기관 수는 70개가 넘었기 때문에, 감독기구의 분산은 한보그룹 부실의 전모를 파악하기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라고 말한다.       


97년 5월 18일 권한은 책임과 함께 주어져야


김인호 경제수석과 윤증현 금융정책실장과 점심을 하면서 6월 임시국회와 관련하여 금융개혁 관련 쟁점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금융감독기구들을 통합하는 쪽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감독기구를 총리실 산하에 두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즉 금융거래 질서유지를 위한 감독기능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명학히 하기 위해서도 관련 기구들은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보의 경우에 거래한 금융기관 수는 70개가 넘는다. 물론 은행뿐 아니라 종금사, 보험회사 등 모든 금융기관을 상대로 거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감독을 여러 기관에서 나누어 하게 되면 전모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자연히 전체를 보면서 '건전하게 운영하는지를 감독' 하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 더욱이 금융기관간의 업무 영역의 장벽이 무너지는 추세여서 앞으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래서 감독기능을 한 지붕 밑에 통합해서 운영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152-153


당시 통상산업부 차관이었던 강만수 또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감독이 부재한 상태" 였다고 밝한다.


당시에 종합금융회사에 대한 감독업무가 종합금융회사의 개벌업무에 따라 은행법, 증권거래법, 증권투자신탁업법, 종합금융회사에관한법률, 단기금융업법, 시설대여업법, 외국환관리법, 외자도입법 등에 따라 자금시장과, 산업금융과, 증권업무과, 국제금융과 등에 흩어져 있었고 검사업무도 재정경제원 감사관실,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에 분산되어 있었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감독은 부재한 상태였다. 금융자율화를 위해 규제를 풀었으면 감독은 더 철저해야 하는데 감독마저 풀어버렸다. IMF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규제(regulation)와 감독(supervision)을 혼동하여 모두 다 풀어버렸다고 충고를 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430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 국장을 맡았던 정덕구는 "1997년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은 감독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었고,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이 벌어지자 정부는 뒤늦게 금융감독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각주:15]" 라고 말한다.


시스템의 실패다. 풀어 말하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개방이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장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시장의 룰'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시장에서 룰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그 시장은 죽은 시장이나 다름없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 경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룰을 잘 지켜야 한다. "반드시 발과 머리, 몸만 사용한다."는 것이 그 룰 가운데 하나이다. 골키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공을 손으로 잡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심판이 경기감독을 느슨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독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선수들이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 이런저런 반칙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1997년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이 그랬다. 시장참여자들이 '시장의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데도 감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들이 국내외 금융기관에서 자기 능력 이상으로 돈을 끌어다 써서 부실대출이 늘어났다. 또 일부 종금사들은 해외에 나가서 달러를 빌려 투기등급의 채권 등에 투자하는 등 리스크를 키워가고 있었따. 그런데 정부는 규제완화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감독강화보다는 규제를 푸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한보철강이 부도난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정부는 뒤늦게 금융감독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금융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금융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데다 시작한 시기도 너무 늦고 말았다. 더욱이 기아사태가 터진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외국인투자자들은 한국의 금융당국을 불신하게 된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110-111


정부는 금융감독시스템 보완 필요성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지만 이미 대차대조표 손상[각주:16] 기업부실채권으로 인해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금융기관의 부실화로 연결된 상황이었다.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 다루었던 대기업군의 연쇄적인 도산이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 를 초래한 것이다.


The outcome of the lending boom arising after financial liberalization was huge loan losses and subsequent deterioration of banks’ balance sheets. In the case of the East-Asian crisis countries, the share of non-performing loans to total loans rose to between 15 and 35% (see Goldstein, 1998). The deterioration in bank balance sheets was the key fundamental that drove these countries into their financial crises.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3


97년 7월 22일 특융 대신 국채를 현물 출자하자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부실기업' 문제가 '부실금융기관'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55


위기의 그림자는 1997년 초부터 드리웠다. 나는 그림자가 번져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내게는 우울한 한 해였다. 그림자는 짙었고, 나는 무력했다. (...) 

"요즘 은행 대출 부실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전문위원 최범수가 내게 자료를 보여줬다. 은행 대출의 15%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였다. 이 통계가 한 경제신문에 흘러 나가는 바람에 정부는 발칵 뒤집힌다. 정부는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또 다른 위원은 "잠재적 부실까지 따지면 부실채권이 30% 안팎일 것" 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35-36)

(...)

외환은행의 부실이 그렇게 심각할 줄, 그래서 결국 감자까지 해야 할 상황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외환은행은 당시 국내 외환거래의 90퍼센트 이상을 맡고 있었다. 환거래를 위해 계약을 체결해놓은 코레스망도 세게적이었다. 기업 금융에 강했고, 인력 수준도 뛰어났다. 그만큼 외화 조달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데…….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 건 한 달 뒤인 6월 말, 은행 경영평가 뚜껑을 열고 나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외환은행의 부실여신은 10조 7,923억 원. 한 달 이상 연체돼 떼일 우려가 큰 돈이 그만큼이다. 평가를 받은 12개 은행 평균(3조 6,470억원)의 세 배. 외환은행 전체 여신의 28.6%나 됐다. 요즘 은행의 연체율이 1퍼센트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말이 안되는 수치였다. 하기야 그럴 만했다. 기업 금융을 많이 했던 게 원인이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주거래은행은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에 집중돼 있었다. 외환위기로 기업이 흔들리자 두 은행도 덩달아 부실이 커진 것이다. (140)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35-36, 140




※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은?


이번 포스팅에서 확인한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은행금융권' · '비은행금융권을 팽창시킨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와 비대칭적 규제' ·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대출증가로 인한 금융기관 자산구성위험도 증가' · '은행들의 고위험성 대출을 막지못한 취약한 금융감독 기능' 등을 통해서,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 문제 · 대기업군의 연쇄적인 도산이 국내은행위기(Banking Crisis)를 초래한 원인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1997년 당시의 경제위기를 '1997 외환위기' 라고 부른다.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에서도 언급했듯이, 외환위기(Currency Crisis)란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증대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1997년 당시의 경제위기를 '1997 외환위기' 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 포스팅에서는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1. 1972년 8.3 사채동결조치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2. 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http://joohyeon.com/171 참조. [본문으로]
  3. 1997년 들어 문제를 초래하기 시작한 한국경제 특유의 성장방식 (기업들의 차입경영, 금융자원 동원) 은 '고성장' 이라는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에, 경제성장 과정에서 문제삼기 어려웠다. '고성장의 신화'에 가려 감춰져 있던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 특히나 '차입경영을 통한 대기업들의 외형확장'은 1997년 대기업 연쇄부도의 주요원인이 됐었다. 이에 대해서는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 대마불사에 익숙해있던 경제주체들 -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됐다고?' http://joohyeon.com/172 참조. 게다가 '금융시스템 낙후' 라는 또 다른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대기업부실'과 연결되어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본문으로]
  4. 이에 대해서는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참조. [본문으로]
  5. 이에 대해서는 밑의 파트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에서 자세히 다룬다. [본문으로]
  6.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http://joohyeon.com/157 [본문으로]
  7.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본문으로]
  8. 1997 외환위기 원인을 탐구하는데 있어 경제학계에서는 "금융자유화 순서가 잘못" 이라는 관점과 "금융자유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금융감독체계 전반적인 문제" 라는 관점이 대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본문으로]
  9.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0. 5대 재벌의 해외차입 증가는 국내은행위기가 외환위기로 발전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 참조 [본문으로]
  11.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이 작동하던 시절 국가의 금융자원배분에 따라 (상대적으로 편하게) 영업하던 금융기관이, "금리자유화와 영업자유화"를 맞게 된다면 고위험 고수익 영업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최두열은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1998)을 통해, "금리의 자유화는 금융기관들간의 금리경쟁을 격화시켜 예대마진을 축소시켰다. 한편 업무의 자유화는 금융기관의 업무별 영역을 제거함에 따라 그 동안 진입제한에 따라 독점적 지대Rent를 보장해 주었던 금융기관의 영업기반을 취약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에 따라 금융기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성이 악화되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 │ 참고 :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본문으로]
  12.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3.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4. 이종화, 이영수는 <한국기업의 부채구조-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1999) 에서 "한국에서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는 일본, 독일과 마찬가지로 매우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의 메인뱅크제도(main banking system)가 기업지배(corporate governance)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반면, 한국의 금융기관은 이러한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높은 부채비율은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관치금융, 비통화금융기관의 재벌소유, 느슨한 금융감독에 따른 '사금고화' 등의 문제에 더욱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라고 지적한다. 은행과 기업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15. 1997년 당시 정부는 ① 중앙은행의 위상 재정립 ② 금융감독기관의 통합 등 금융감독 시스템을 개혁 ③ 예금보험 체계 정비 ④ 기업 구조조정 활성화 방안 ⑤ 은행의 지배구조 개선책 등의 내용이 담긴 '금융개혁법안'을 입안하려 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 여부, 한국은행 소속이었던 은행감독원의 분리여부' 등을 둘러싸고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이 갈등을 빚으면서 1997년 11월 '금융개혁법안' 통과는 무산되고 만다. [본문으로]
  16. 은행 대차대조표상의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현상을 '대차대조표 손상 deterioration of banks' balance sheets' 라고 한다. 신흥국 은행들의 대차대조표 손상은 단순한 은행위기banking crisis와 외환위기currency crisis를 금융시장 전체가 마비된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키우게된다. 은행들이 대차대조표 복구를 위해 대출자금을 급격히 회수하기 시작하면 기업들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게다가 국내경제의 건전성에 의심을 품은 해외자본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통화가치가 하락하여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해 금리를 올릴 경우 은행의 부채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자본유출을 막기위한 금리인상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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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②]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외환위기 ②]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Posted at 2013. 10. 27. 20:14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앞선 포스팅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1997년 한국경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고평가된 원화가치 ·  1996년 -229억 달러, GDP 대비 -4.75%에 달하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거시경제의 긴장도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가 발생하고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떠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를 촉발시켰는지를 살펴보자.


1997 한국의 외환위기의 시작일자는 태국 외환위기가 시작된 7월 · 원화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한 10월말 · 대규모 국제채권인출 사태가 벌어진 11월 ·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11월 21일 등으로 각각 잡을 수 있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하는 건 1997년 1월 23일에 발생한 "한보그룹의 부도사태"이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7월에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경제위기는 그보다 앞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초반부터 연쇄도산한 대기업군을 살펴보면, 1월에 한보그룹(10위)[각주:1] · 4월에 삼미그룹(26위), 진로그룹(19위) · 5월에 대농그룹(44위), 한신공영그룹(58위) · 7월 기아그룹(8위) · 10월 쌍방울그룹(55위), 태영정밀그룹(81위) · 11월 해태그룹(24위), 뉴코아그룹(27위) · 12월 한라그룹(13위) 등이다. 


따라서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분석은 1997년 초부터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면 1997년초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대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주요원인으로는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한 기업 현금흐름의 이상 · 과잉투자로 인한 현금지출 증가 그리고 기업의 차입경영 이라는 한국경제 구조적문제 · 과도한 부채와 높은 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증가 · 단기어음을 통한 자금조달 등을 꼽을 수 있다. 




※ 1996년부터 악화된 수익률 - 원화가치 고평가와 과잉투자가 초래한 문제


수출주도형 제조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경제 특성상, 원화가치 고평가는 기업의 현금수입을 감소시킨다. 문제는 수출감소로 인하여 기업의 현금수입의 흐름이 감소되고 있는 반면, 기업의 현금지출 요인은 설비투자의 증가로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다. 현금수입은 줄어드는데 현금지출을 증가하니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당연히 악화되었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6 >


위에 첨부한 '<표 5-28> 제조업 현금흐름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출둔화로 인한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3.0% 감소한 반면, 투자활동 현금유출 증가(16% 증가)로 인해 투자활동 현금흐름은 -11.5% 감소했다. 그 결과, 1996년 제조업의 현금은 전년도에 비해 -75.1%나 감소했다. 그렇다면 이제 1996 당시 얼마만큼의 과잉투자가 발생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2 >    


1996년 당시 기업의 현금지출을 증대시킨건 기업의 과잉투자였다. 위에 첨부한 '<표 5-26 한국의 설비투자 및 생산능력 관련지표'를 살펴보면, 제조업의 설비투자는 1980년대 후반 GDP 대비 12%~13% 수준에서 19960년대 전반기 15%~16%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1996년도에 16.78%로서 정점에 달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설비투자가 증가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그 동안 과점상태에서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던 많은 업종에서 규제완화와 함께 새로운 진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산업으로는 자동차, 반도체, 철강, 항공, 석유화학 등의 분야였는데 새로 진입한 기업들에 의한 신규투자 외에 신규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기존업체들의 증설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과도한 설비투자가 이루어졌다.[각주:2] [각주:3] [각주:4]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    


특히나 철강산업의 경우 1993년~199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과잉투자가 발생했는데, 1997년 1월 부도처리된 한보철강의 경우 3년 사이 7,440억원의 투자비용이 지출되었다. 당시 한보그룹의 자산규모가 약 5조원 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짧은 기간동안 엄청난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4 >    


그 결과, '<표 5-27> 제조업 경영분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제조업은 1996년 수익성과 재무구조 측면에서 지난 9년간 최악의 성과를 거두었다. 1996년 매출액 증가율은 10.3%로 1995년에 비해 반토막이 났고,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6.5%를 기록하였다.




※ 문어발식 확장과 차입경영을 통한 재벌들의 몸집불리기 행태 - 한국경제의 구조적문제


무엇보다 당시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분별한 차입경영 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에서도 살펴봤듯이, 한국은 "기업이 독재정권에 정치자금을 대주고 독재정권은 대출을 통해 기업을 밀어주는 과정" 이라는 정경유착을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권에 계속 접촉하기 위해서는 '기업규모 Firm Size'가 커야한다. 기업들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규모 늘리기'에 열중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규모늘리기의 결과는 높은 부채비율로 나타난다.


< 출처 :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4-5 >


또한,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에서도 보았듯이, 기업이 부실에 빠지더라도 국가는 사채동결 · 공적자금 투입 등을 통해 기업들을 구제해줌으로써 대마불사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대마불사의 환경속에서 기업들은 주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왔기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위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risk-free 경제가 한국경제의 모습이었다.     


박종규, 조윤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2002) 논문을 통해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편 우리 기업의 경영행태는, 특히 재벌기업들이 그러하였지만, 수익 극대화보다는 외형확대에 치중해왔다. 대마불사의 환경에서 기업의 자금조달은 담보대출에 많이 의존하였으므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식 및 채권시장 등 자본시장의 미발달로 자본시장이 기업의 수익증대를 독려할 인센티브가 없었으며, 기업회계의 불투명성과 기업정리, 인수·합병 관련 제도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회사가 어려워도 외부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진다 해도 주가하락으로 인한 경영상의 위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국 과거의 우리경제는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위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risk-free 경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은 회사채 보유를 국채보유보다 선호해 왔다. 이는 금융기관들이 국제금리가 다른 채권금리에 비해 너무 낮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은행보증 회사채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가증권이 국채와 다름없이 안전하다고 여겼으므로 구태여 국채라는 안전자산을 따로 보유해야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사채는, 그것을 발행한 기업의 자산규모가 충분히 크다면, 대부분 안전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자산규모가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이 기업의 순위를 결정짓는 기준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산규모에 따라 기업들이 "계층화" 또는 "신분화"되어 대규모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시중 자금은 물론 우수 인력과 기술을 거의 독점 할 수 있었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계층화가 그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았듯이 자산규모에 따른 기업의 계층화로 인하여 우리경제의 활력도 점차로 상실되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14-15


<출처 :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18-25 > 


< 출처 :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5 >


실제로 한국기업들의 부채비율을 살펴보면, 1997년 말 현재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911조 원으로 GDP대비 1.9배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제조업의 부채/자본비율은 396.3%로서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인 대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4대 재벌의 평균부채비율 295%도 엄청난 규모지만 11위-30위 재벌들의 평균부채비율은 503.85%에 육박한다.


또한, 위에 첨부한 '<그림1 부채-자산비율(Leverage)과 총자산이익률(ROA)>'을 보면, 1989년을 기점으로 한국기업들의 전체부채비율(debt/asset)[각주:5] [각주:6]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게다가 앞서 논의했듯이, 기업들의 수익성악화로 인해 총자산이익률(ROA)는 계속 하락하는데 1996년에는 -0.2%를 기록하였다.   


본 논문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1999)를 쓴 이종화, 이영수는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500%가 넘는 30대 재벌의 부채/자본비율에서 나타나듯이 재벌의 문어발식 규모확장 및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아졌으며, 중복투자로 투자수익률이 계속 하락하였다는 점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가 외환위기 및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이러한 위기를 겪게 된 배경이 무엇 때문인가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구들은 한국경제에서 고도성장을 위한 관치금융, 그리고 이에 따른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가 기업의 과잉투자 및 금융부실을 가져왔으며, 이것이 현재 위기의 근본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부실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구제관행이 재벌그룹에게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으며, 이것이 투자사업의 위험과 수익률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차입에 의존한 규모확장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가 재벌그룹의 부채비율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게된 배경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911조 원으로 GDP대비 1.9배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제조업의 부채/자본비율은 396.3%로서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인 대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자본축적이 미미하고, 고도성장을 추진하고 있는 경제에서 기업의 부채비율으 높을 수 있으며, 또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가 밀접한 한국경제에서 부채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당연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500%가 넘는 30대 재벌의 부채/자본비율에서 나타나듯이 재벌의 문어발식 규모확장 및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아졌으며, 중복투자로 투자수익률이 계속 하락하였다는 점이다.


방만한 차입경영에 따른 높은 부채비율은 한국경제가 외생적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되었음을 최근의 금융위기가 입증하고 있다. 우선 해외부채(foreign debt)가 많은 기업은 급격한 환율상으로 큰 손실[각주:7]을 입게 되었고, 이것은 기업도산과 금융부실을 초래하였다. 


또한,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은 경기침체 및 금융경색가 같은 경제여건 악화에 대해 쉽게 대처하지 못한 것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외환시장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급격한 이자율상승은 기업 자본조달비용의 급상승을 가져와 많은 기업이 도산하게 되는 유동성 위기(liquidity crisis)[각주:8]를 겪게 되었다.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2


1997 외환위기 발생 이후, 경제위기를 수습하고 한국경제 구조개혁을 담당했던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기업들의 과도한 차입경영을 방지하기 위해 '부채비율 200% 미만' 유지를 기업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기업들은 일제히 "부채비율 200%는 못 맞추겠다" 라고 아우성 이었다. 그 동안 경제성장을 달성해오면서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해진 기업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부채비율 200퍼센트[각주:9]는) 1998년 4월,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취임하며 던진 기업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내년 말까지 부채비율이 200퍼센트를 넘는 기업은 도태될 겁니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나는 재벌 개혁을 두고 '야생마 길들이기' 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야생마를 길들이겠다고 처음부터 올라타면 다친다. 울타리를 쳐놓고 조금씩 좁혀가며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 부채비율 200퍼센트는 재벌을 옭아매는 담 중 하나였다.


200퍼센트, 사실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나온 기준은 아니었다. 해외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을 검토해 정했다. 당시미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10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일본이 150~200퍼센트 사이였다. 200퍼센트,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이미 시장의 법칙이 돼서 그렇다. 지금 부채비율이 300퍼센트쯤 되는 기업이 있다 치자. 모두 '불량 기업' 이라고 인식한다. 주가가 떨어지고 추가 대출이 막힌다. 이것이 시장의 감시다.


그땐 아니었다.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518퍼센트였다. 1000퍼센트를 넘나드는 회사도 있었다. 그걸 확 끌어내리라니 자연히 반발이 심했다. 대기업들이 대놓고 "우린 못 한다"고 나왔다. 4~5년 말미를 주면 몰라도 2년 안에는 절대 200퍼센트를 못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다. 금감위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다. 나는 아예 기업인들은 만나질 않았다.


그러니 은행에 호소했다. 금감위가 각 그룹에 "5월 초까지 주거래 은행에 제출하라"고 지시한 재무약정 자료, 15대 그룹은 일제히 "부채비율 200퍼센트는 못 맞추겠다"는 자료를 냈다. 어떤 그룹은 "건설·중장비 회사 특성상" 또 다른 그룹은 "막 인수한 회사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플레이도 잇따랐다.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부채비율이 높은 계열사를 팔거나, (그 회사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계열사를 팔면 됩니다." 나는 공개 석상에서 재벌을 압박했다. 왜 위기가 왔는가. 원칙도 두려움도 없이 성장만 쳐다보고 달려서다. 이제 그 원칙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이 장관은 "실속있는 기업 몇 개를 팔아서라도 부채비율을 맞추라"고 기업을 다그쳤다. 강 수석은 "계열사별 비율은 조정하더라도 그룹 전체가 200퍼센트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270-272    




※ 부동산가격 상승과 차입경영에 의해 지탱되던 한국경제 

- 부동산가격 하락과 높은 대출금리로 인한 금융비용의 증가


앞서 살펴봤듯이, 1996년 한국경제는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한 기업들이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해 현금수입이 감소하고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지출은 증가해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또한 과잉투자는 단순한 현금지출증가 뿐 아니라 투자효율성을 낮추어 엄청난 규모의 부실 자산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더해 기업의 담보가치를 제공해주던 부동산 가격하락이 지속되어 기업의 재무구조는 더더욱 악화되어 갔다. 기업의 수익성은 떨어져가고 담보가치를 제공해주던 부동산가격도 하락한다? 이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달성에 큰 도움을 주었던 '기업들의 차입경영'이 문제를 초래하기 시작한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과도한 부채'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박종규, 조윤제는 "기업의 담보가치는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업손실을 자산가치의 상승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라고 지적한다.  




수익성 여부에 개의치 않는 외형확대를 위한 투자를 장기간 지속하다보니 투자 효율성은 낮아진[각주:10] 반면 자금과 인력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경제전체적으로 항상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게 되어 자본수익률을 넘는 고금리, 노동생산성을 넘는 고임금이 지속되었다. 기업들은 고임금, 고금리, 고임대료에 의해 영업활동에서 손해가 났으나 공장이나 건물 등의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자산가치를 증식하고 이를 담보로 더 많은 대출을 받아 다시 공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산 수익율은 더 떨어져 경제의 불균형 상태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투자를 확대하면 할수록 실제 영업손실은 더 깊어지는 상황이 오래 지속된 결과가 바로 위기 이전 우리경제가 안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부실 자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개발 이후 계속되던 부동산 가격 상승세는 1991년 하반기 들어 소폭이나마 하락세로 반전되기 시작하였다.(<그림8>, <그림9> 참조) 즉 1991년 하반기부터는 그동안 한국경제의 성장방식을 유지해온 가장 중요한 동력 중 하나이던 '부동산버블'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담보가치는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업손실을 자산가치의 상승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과거의 관행을 관성적으로 유지하여 왔으며 자금과 인력에 대한 높은 수요도 줄어들지 않음으로써 고임금과 고금리, 고임대료 등 왜곡된 상대가격 체계도 별다른 조정을 받지 않은 채 1997년말 외환 및 금융위기가 도래하기까지 지속되었다. (...)


되돌아보면, 대략 이 시점, 즉 1990년대 초부터 한국경제는 새로운 방식의 성장패턴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대략 이 시점부터 해외투자자들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이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1991년부터 해외자본의 유입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의 구조개혁을 모색했어야 했던 시점에서 정책당국이나 일반 국민들은 한국경제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over-confidence)과 함께 경제의 흐름에 대한 착시현상을 가지게 되어 스스로의 개혁보다는 오히려 '개방화시대에 대규모 해외자본유입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국경 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일류가 되기 위해 어떤 투자를 늘이고 어떻게 경쟁의 우위를 선점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였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14-17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요소투입의 증가'에서 논의했듯이 한국경제는 '요소투입의 증가', 즉 투자investment 를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해왔다. 투자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니,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 금융시장은 만성적인 자금수요가 존재했고 따라서 높은 금리수준을 유지했다. 기업의 수익성이 양호하고 부동산가격 상승이 지속됐을때는 '과도한 부채 · 높은 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이 문제시 되지 않았지만,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부동산가격 상승이 멈추자 '금융비용 증가'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금융비용의 증가는 기업의 경상이익률[각주:11] 하락을 초래했다. 1996년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1.0% 로서 1996년 중 금융비용 부담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 출처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 >

  • <[표 1-1] 국가별 금리 · 임금 · 지가 및 물류비 비교>를 보면, 한국의 실질금리가 미국·일본·대만에 비해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4 >  


박종규, 조윤제는 "대출금리 수준 자체가 높을 뿐 아니라 대출규모도 막대하였기 때문에 금융비용의 부담이 매우 높았다" 라고 지적한다.    


국제금리가 5~7%일 때 국내금리는 우리기업들의 투자수익률보다 높은 수준을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예를 들어 제조업의 평균 대출금리는 1990년대 들어 11~13%, 회사채 수익률은 12~18%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대출금리 수준 자체가 높을 뿐 아니라 대출규모도 막대하였기 때문에 금융비용의 부담이 매우 높았다. 그 결과 금융비용의 매출액 대비 비중도 1990년대 제조업의 경우 6%에 가까워 기업의 총자산 영업이익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금융비용등을 차감한 총자산 경상이익률은 영업이익률에 비해 대폭 줄어들고 있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30-31




※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조달의 증가 

- 대기업 연쇄도산의 파장이 커지게 된 원인


위에 논의했던 것을 종합하여 1996년 한국경제를 이해하자면, 차입경영을 통해 몸집불리기로 성장해왔던 한국기업들이 원화가치 고평가와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흐름이 나빠진 상황에서, 부동산가격 하락과 금융비용 부담증가로 인해 재무구조가 더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런데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투자를 위한 자금조달은 필요하다. 기업들은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통해 단기자금조달을 늘리기 시작한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6 >  


'<표 5-28> 제조업 현금흐름표'를 살펴보면, 1996년 단기차입금은 전년대비 43.9%나 증가했고, 회사채를 통한 현금유입도 전년대비 43.8%나 증가했다. 즉, 1996년 중에 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어 영업활동에 필요한 현금이 부족해진 데다가 투자활동에 소요되는 현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주로 단기차입금 및 회사채 발행에 의하여 현금을 유입하였기 때문이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0 >      


'<표 5-33> 기업의 자금조달 내역 추이'를 보면 기업 자금조달 구조의 악화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996년 기업의 자금조달에서 은행 등을 통한 간접금융이 아니라, 기업어음 · 회사채 발행을 통한 간접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였다. 설비투자 증가로 인한 현금유출의 증가와 원화 고평가 및 시장개방 등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기업 자금조달 구조의 악화로 나타난 것이다. 


기업어음 · 회사채 등은 은행대출보다 금리가 높기 때문에 기업들에 있어 높은 금리부담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기업의 자금조달 구조 중 기업어음에 의한 조달비중이 상승하였다는 것은 조달자금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1997년 초반부터 대기업군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각주:12]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4 >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대다수 자금을 종금사 등의 제2금융권을 통해 조달하였다는 것이다. 위에 첨부된 '<표 5-34> 금융권별 10대 부실기업 여신현황'을 살펴보면 1997년 부도처리된 10대 기업들의 여신 상당수가 종금사 등의 제2금융권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93-94 > 


이들 제2금융권의 무담보 기업어음에 의한 여신은 단기일 뿐만 아니라 담보에 바탕을 두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을 경우 갑작스런 여신회수에 돌입하므로 부도가 급증하게 된다. 위에 첨부한 '<표 19> 부도 대기업규모군의 차입금 현황'을 보면, 1996년에 비해 1997년 어음차입금 규모가 급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부실대기업군에 대해 제2금융권이 갑작스런 여신회수를 시행했음을 나타낸다. 기업어음에 의한 자금조달의 문제 만기구조가 단기일 뿐만 아니라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이 1997년 초반부터 발생한 대기업군의 연쇄적 도산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될 수 있다.[각주:13]




※ 대마불사에 익숙해있던 경제주체들 

-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됐다고?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과 위에서도 논의했듯이, 그동안 한국경제는 기업의 부실이 생겼을때 부채를 탕감해주거나 공적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왔다. 대기업이 부도처리 되는 것에 익숙치 않았던 상황이다.


그런데 1997년 초반, 수익성 악화 · 과잉투자 · 차입경영 · 제2금융권을 통해 조달한 단기차입금이 문제가 되어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되었다. 당시 한보그룹의 자산은 약 5조원인 반면 총부채는 6.6조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막대한 부실규모는 우리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이 되었고 1997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더 큰 문제는 해외자본들에게도 한국 대기업의 부실처리가 익숙치 않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기업의 부실이 발생할 경우 정부주도로 처리가 됐었기 때문에 해외자본들은 손실을 전혀 부담해 오지 않았었다. 해외 자본들은 비단 한보그룹과 연관된 금융기관 · 기업들 뿐 아니라 한국경제 전체의 건전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인) 이규성은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보의 부도는 해외자본에도 큰 충격이었다. 이에 더하여 은행도 부도 처리될 수 있다고 청와대 당국자의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자 충격은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은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부실이 발생할 경우 시장에 의하여 부도처리되기보다는 정부주도로 정리해왔으며, 이 때 해외자본들은 손실을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


이러한 보도가 있은 후 일본에서는 몇몇 한국계 은행의 현지지점들이 일본계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단기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수습에 나선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2월 초에 한국계 은행의 해외지점에 대한 지불능력을 책임지겠다고 언론에 발표[각주:14]하기도 하였다.


해외 자본들은 비단 한보에 대출한 금융기관이나 한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전반에 걸쳐 건전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1997. 2월 초에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가 한국의 경제 위기감 고조라는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 등 외국 신문들이 한국의 금융위기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무디스(Moody's)는 1997. 2. 20일 한보에 대한 거액대출로 금융부실이 가시화된 조홍· 제일 · 외환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하향조정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은 국내금융시장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제 한보그룹의 협력업체 뿐만 아니라 일반 중소기업들까지 자금조달을 어렵게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금융기관들은 부실을 우려하여 기업대출에 소극적이고 경직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이에 더하여 3. 19일에 발생한 삼미그룹의 부도는 국내외 금융기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7-8


이규성은 뒤늦게나마 "왜 한국경제가 차입경영 · 대마불사 등의 구조적문제를 개혁하지 못했는지"를 돌아본다. 차입경영과 대마불사는 한국경제의 고성장을 이끈 방식이기도 했는데, 바로 이러한 '고성장의 혜택'에 가려 문제를 개혁하지 못했다[각주:15]고 반성한다.


놀랍게도 1970~80년대에 추진하였던 기업 및 금융개혁정책을 보면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과 내용이 거의 같은 것들이었다. 정부가 이처럼 일찍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경제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여기에는 첫째로 당시의 우리 사회가 고성장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 1970~80년대의 정권들은 정권창출 과정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좋은 치적이 필요하였으며 고성장은 가시적 성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좋은 표적이었다.


재벌들의 입장에서는 파산의 위험만 정경유착을 통하여 해결하면 차입에 의한 외형확장은 더 없는 부의 축적방법이었다. 근로자들에게는 고성장에 의한 일자리 마련이 가장 중요한 복지정책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업구조개혁의 당위성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고성장의 신화속에 매몰되었다. 결국 기업구조 개혁은 기업의 부실이 사회적으로 큰 과제로 떠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정책으로 전락하였다. (...)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고성장을 선호하고 시장제도의 미확립으로 인하여 재벌 중심의 경제시스템이 성장추구에 효율성을 갖는 상황에서는 기업구조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79-81




※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을 읽고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대기업들의 차입경영과 대마불사 신화는 그동안 한국경제 성장과정의 산물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대기업들이 제2금융권을 통해 단기자금 조달을 늘리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한국경제 특유의 성장과정이 금융시스템의 미발전과 제2금융권 발달이라는 문제도 낳긴 했지만, 적어도 1990년대 들어서는 금융시장 건전성 감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제2금융권을 통한 자금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② 기업어음(CP) 등을 이용한 단기자금 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③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 증가로 금융시스템 내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금융감독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음 포스팅에서는 '경제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의 증가' · '금융감독 시스템의 미흡' 등등 1997년 당시 한국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문제에 대해 다루겠다.



 

<2편 참고자료>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2013.08.18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2013.08.20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2013.10.18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2013.10.25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2013.10.13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1. 대기업 군의 서열은 1996년도 금융, 보험업을 제외한 기업집단의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출처는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88 [본문으로]
  2.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본문으로]
  3. 자동차산업의 경우는 기존의 현대, 대우, 기아 외에 삼성자동차의 진입이 1994년 말 허용되어 1995년부터 설비투자에 들어갔다. 석유화학의 경우 1990년 이후 투자가 전면 자유화됨에 따라 기존의 업체들뿐만 아니라 신규업체들도 대규모 신․증설 투자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품목의 공급과잉과 업체간 과당경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1992년 3월「석유화학공업 수습 안정대책」을 수립하여 다시금 시설과잉 부문에 대한 신규투자 억제를 실시하였다. 항공산업의 경우는 1993년 7월 신경제 5개년계획에 중형항공기 개발계획이 반영된 이후 설비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철강의 경우도 한보철강을 비롯한 각사가 설비의 증설투자에 들어갔다.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주석 108 [본문으로]
  4. 이러한 중복과잉투자는 김대중정부가 '빅딜'정책을 시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5. 저자인 이종화, 이영수는 "일반적으로 부채비율은 총부채/총자기자본으로 정의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부채비율을 총부채/총자산의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헥 총부채/총자산의 비율로 부채비율을 정의하여 사용한 이유는 총부채/총자기자본으로 정의하여 사용하는 경우 '자본잠식' 기업의 경우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잠식' 기업은 전체분석기업 중 3%에 해당하나, 이 중에는 총부채/총자기자본이 -40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업도 포함되어 있어 평균값을 구하거나 회귀분석을 하는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잠식' 기업 역시 분석자료에 포함시키기 위해 총부채/총자산을 부채비율로 정의하여 사용하였다." 라고 덧붙인다.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5쪽 각주 7 [본문으로]
  6. 부채비율을 산출하는 일반적인 기준인 부채/자본 비율에 비해 부채/자산 비율은 수치 자체가 절대적으로 낮은값을 기록하게 된다. 이 점을 유의하고 살펴봐야한다. [본문으로]
  7. 경제학자 Paul Krugman은 '은행부채의 상당 부분이 외화표시로 되어있을 때, 해당국 통화가치가 급락하여 은행의 대차대조표를 악화시키는 것'을 '신흥국 대차대조표 위기 Balance Sheet Crisis'라 불렀다. │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본문으로]
  8. 이러한 현상은 신흥국의 외환위기를 체계적 금융위기로 심화시킨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보통 금리를 올림으로써 통화가치를 상승케 하는데, 금리를 인상할 경우 은행의 부채부담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 그러나 신흥국이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면,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고 기업과 은행의 부채부담을 증가시킨다. 그 결과, 은행은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하게 되고 금융시스템 자체가 마비된다. 금융경제학 권위자인 Frederic Mishkin은 논문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1999)를 통해 "A currency crisis and the subsequent devaluation then helps trigger a full-fledged financial crisi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because of two key features of debt contract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debt contracts both have very short duration and are often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 These features of debt contracts generate three mechanisms through which a currency crisis in an emerging market country increases asymmetric information problems in credit markets, thereby causing a financial crisis to occur." 라고 말한다. │ 이에 대해서는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http://joohyeon.com/176 참고 [본문으로]
  9. 여기서 말하는 부채비율은 '총부채/총자기자본'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의 '※ 요소투입증가, 즉 과잉투자가 초래하는 경제적 문제들' 참조 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11. 경상이익=영업이익-이자비용 [본문으로]
  12. 2013년 현재에도 한국경제는 '기업어음(CP)을 통한 자금조달'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참조 [본문으로]
  13.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0-201 [본문으로]
  14. 이러한 정부 혹은 한국은행의 지불보증은 1997년 11월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 [본문으로]
  15. 이런 인식은 1997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방식에 큰 차이를 낳는다. 1997 외환위기가 발생한 주요원인은 '한국경제 구조적 문제' 라고 주장하는 측은 "강도높은 개혁을 주장"하고, '단순한 유동성 위기' 라고 주장하는 측은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아니라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화자금을 확보하면 됐을 뿐" 라며 반박한다. '1997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입장'과 'IMF가 내건 구제금융 조건들- 긴축정책과 자본시장 개방-이 타당했느냐'에 대해서는 추후에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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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①]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외환위기 ①]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Posted at 2013. 10. 23. 21:15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전 포스팅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를 통해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생긴 구조적 문제가 1997 외환위기 원인으로 이어졌다" 라는 말을 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해서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1997 외환위기로 이어졌을까?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이전에, 외환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1997년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어떠했는지, 어떤 요인이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였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국제금융센터가 발간<Ⅱ. 외환위기의 개념 및 이론적 모델>에 따르면, 외환위기(Currency Crisis)란 "특정 통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해당국 정부가 대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사용하거나 금리 인상 등을 통해 환율을 방어하는 상태"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통화가치가 전년도보다 10% 이상 하락하고 당해 연도에 25% 이상 급락한 경우"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외채위기(Debt Crisis)란 "특정국이 공공부문 혹은 민간부문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상태"를 뜻한다.


또한, 은행위기(Banking Crisis)란 "실제적 혹은 잠재적 은행 파산으로 은행들이 예금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해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대규모로 개입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대규모 부실채권 · 뱅크런 등으로 인해 은행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는 외환위기 · 은행위기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인데 "금융시장이 심각한 붕괴에 있는 상태 · 위기의 확산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적인 중개기능이 손상되어 실물경제에 대규모 부정적 효과 파급"하는 상태를 뜻한다. 


외환위기(Currency Crisis)와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는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고 선후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해당국의 금융시스템이 마비되어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시에 자본을 회수할 경우 해당국 통화가치가 급락하여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경우 · 은행부채의 상당 부분이 외화표시로 되어있는 경우[각주:1], 해당국 통화가치 급락하면 은행 경영사태가 급속히 악화[각주:2] [각주:3]되는데 이에 따라 금융위기로 커지는 경우.


1997년 한국은 외환위기 · 외채위기 · 은행위기 · 체계적 금융위기 모든 것을 겪었다.

1997년 한국경제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1997년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 - 고평가된 통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주목해야 할 것은 금융시장 개방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경제에서 금융은 자원배분을 위한 통제의 대상이었다.게다가 외국인에게는 증권시장 투자한도가 제한되어 있었고 외국은행의 국내지점 설립에도 규제가 있었다. 한국은 1990년 2월부터 열린 한·미 금융정책회의(FPT, Financial Policy Talking)을 통해 금융시장 개방에 나선다.



  • 출처 :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330
  • 이 표는 자본시장개방 협상대비를 위하여 재정경제원 국제금융국이 만든 계획표(Blue Print) 이다. 
  • 실제 3단계 장기계획은 1993년 6월에 확정되었고, 첨부된 계획표와는 조금의 차이가 존재한다.


1990년 2월부터 열린 ·미 금융정책회의(FPT, Financial Policy Talking)는 한국의 환율과 금융시장의 개방을 협상하는 회의였다. (...) 1990년 두 번 열린 ·미 금융정책회의는 환율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금융자율화, 증권시장 개방, 외국은행 국내지점 규제철폐 등이 주요의제였고 콜 시장의 개방, 금리의 완전 자율화, 정책금융의 폐지 등으로 확대되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325


하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1995년 이후 엔화의 절하이다. 일본의 엔화는 엔고가 절정에 달하였던 1995년 4월 83.6엔/$에서부터 1996년 말에는 113.7엔/$ 까지 절하되어 약 36% 절하되었다. 


  • 1995년 4월~1996년 12월 간의 엔/달러 환율변동 추이. 1995년 5월을 기점으로 일본 엔화는 달러화대비 약 36% 평가절하 된다. 


이러한 자본시장개방일본 엔화의 평가절하원화가치를 적정수준보다 고평가 시켰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최두열은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1998)을 통해 자본시장 개방에 따른 원화가치 고평가 현상을 지적한다.


원화의 고평가 문제는 한국의 '거시경제 전체에 대한 긴장도를 높인 가장 근본적인 요인' 이라고 할 수 있다. 대외부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격변수가 고평가됨에 따라 임금이 상승되고 임금상승에 대처하기 위한 시설재 투자가 증가하였으며 비교역재 부문으로 자원이 배분되는 등 많은 거시변수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1995년과 1996년에 기업의 현금흐름을 대폭 악화시킨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수출부진이었고 (...) 수출물량이 증가하지 못한 주된 단기적인 원인은 당시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원화의 고평가는 1990년대 자본시장 개방으로 인하여 1994년 이후 자본유입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


명목환율 수준으로 계산하여 보면 원화가 가장 고평가된 시점인 1996년 5월 적정환율 수준은 982원/$ 이었으나 실제환율 수준은 780원/$ 수준으로 원화가 202원/$ 고평가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원화의 고평가는 세계화 추진과 OECD 가입을 위하여 자본자유화를 조속히 추진해 나감에 따라 자본유입이 확대된 결과이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3-205


  • 1994년 1월~1997년 12월 간의 자본수지 계정. 1994년 이후 자본수지가 양(+)의 값을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외환위기의 본격적인 발발시기인 1997년 10월 말 이전까지 원화가치의 고평가현상은 지속되었다. (1997년 10월 말부터 원화가치가 급락함에 따라 고평가현상이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달러화에 페그된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엔화가치가 절하됨에 따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동반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최두열은 동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지적한다. 


"달러화에 대한 페그에 따른 문제점으로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게 되면 자국통화도 달러화와 함께 동반강세를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5년 5월 이후 달러화는 엔화에 대해 절상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달러화의 엔화에 대한 강세에 따라 사실상 달러화에 페그된 동아시아 각국의 통화가 동반강세를 보이게 되어 엔화에 대해 고평가 되었으며, 이것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킨 하나의 요인"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60


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한국은 자유변동환율제도가 아닌 일일환율변동폭이 제한된 시장평균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원화 또한 (완전히 달러화에 페그된 것은 아니었지만) 엔화 절하의 영향으로 1997년 이전까지 고평가된 통화가치를 유지하게 된다. 


  • 원/엔 환율추이. 일본 엔화의 절하에 따라, 한국 원화는 일본 엔화대비 고평가된다. 1994년 4월 100엔당 900원 수준이던 원화는 1996년 12월 100엔당 728원 수준까지 통화가치가 상승하였다. 


자본시장 개방과 일본 엔화의 절하로 인한 한국 원화가치의 고평가 현상. 그 결과는 1994년-1996년 3년간의 경상수지 적자, 특히나 1996년 -229억 달러 · GDP 대비 -4.75%에 달하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진다. 





※ 원화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가 초래하는 문제들


원화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는 어떠한 문제를 초래할까? 먼저, 고평가된 통화가치의 문제, 특히나 정환율제도를 택한 상태에서 통화가치 고평가가 초래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앞서 살펴본것 처럼 한국 원화가치는 자본시장 개방과 일본 엔화의 평가절하로 인해 적정수준을 넘어서서 고평가 되어있다. 이것을 본 시장참가자들이 "적정수준을 넘어선 원화의 고평가는 지속불가능하다" 라고 생각을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다시 말해, 시장참가자들이 "곧 원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될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시장참가자들간에 급격한 환율상승에 대한 예상이 우세하게 되는 그 순간, 자기실현적 투기공격(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각주:4]이 발생하게 되어 실제로 원화가치가 급락하게 된다. 


고평가된 통화가치가 외환위기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97년 당시 김만제 포항제철 회장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만남에서 "환율이 고평가되고 있어, 환율상승을 예상한 투기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51)"[각주:5] 라는 우려를 전했다. 


최창규는 <투기적공격 이론과 한국의 외환위기>(1998) 를 통해 기초적인 게임이론을 이용하여 '자기실현적 투기공격(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이 발생하는 원리를 설명한다.


제2세대 투기적공격모형은 외환보유액의 부족 등으로 인해 기초경제여건이 ‘위기범위(crisis zone)’에 속하게 되는 경우 실제 외환위기의 발생여부는 앞으로의 환율에 대한 시장참가자들의 예상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참가자들간에 급격한 환율상승에 대한 예상이 우세하면 실제로 환율급등이 초래되지만 환율이 계속 안정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한 경우에는 환율상승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형에서는 외환위기가 자기실현적 투기공격의 양상을 띠게 되며9) 복수균형(multiple equilibria)이 가능하게 된다. 복수균형이라 함은 기초경제여건이 위기범위에 속하는 경우 시장참가자들의 예상에 따라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고 외환위기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두가지 가능성을 가리킨 것이다. (...)


이 모형에서는 외환당국과 거래자 A, B 등 세 경제주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외환당국은 환율 안정에 쓸 수 있도록 일정한 외환(R)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두명의 거래자 A, B는 1회의 비협조적 게임(non-cooperative game)을 한다고 가정한다. 두명의 거래자는 각각 6만큼의 국내통화를 가지고 있으며 외환당국의 보유외환을 사기 위하여 국내통화를 ‘매도’하거나 계속 ‘보유’하는 두가지의 전략을 펼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외환을 사거나 파는 데 따르는 거래비용은 1이라고 하자.


첫번째 게임에서는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수준인 20이라고 가정되고 있다 (R=20). 이 경우에는 거래자 A와 B가 모두 국내통화를 매도하고 보유외환을 사더라도 외환당국은 여전히 8만큼의 외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거래자 중 1인이 국내통화를 매도하고 다른 1인은 매도하지 않을 경우 매도를 한 거래자는 1만큼의 비용이 들고 매도를 하지 않은 거래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나쉬균형(Nash Equilibrium)은 거래자가 모두 매도를 하지 않는이다.


두번째 게임에서는 외환보유액이 매우 낮은 수준인 6이라고 가정되고 있다(R=6). 여기서는 거래자 2인중 어느 한 사람이 외환을 사기 위해 국내통화를 매도하는 경우에도 외환보유액은 모두 소진된다. 따라서 외환당국은 평가절하를 하거나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외환당국이 보유외환으로 고정환율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면 50% 평가절하를 하게 된다고 가정하자. 거래자 2인중 어느 한사람만이라도 보유 국내통화를 모두 매각하여 외환을 사는 경우 중앙은행은 고정환율을 포기하고 50% 평가절하를 할 수밖에 없다. 이 거래자는 국내통화기준으로 3만큼의 자본이득을 보고 거래비용 1을 지급하게 되므로 2만큼의 순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 거래자 2인이 동시에 각각 3만큼의 국내통화를 매도하여 외환을 매입하는 경우 두사람은 모두 각각 3/2만큼의 자본이득을 보게 되고 거래비용으로 1을 지급하게 되므로 1/2[=(3/2)-1]만큼의 순이득을 얻게 된다. 따라서 유일한 나쉬균형은 양거래자가 국내통화를 매도하고 외환을 매입함으로써 고정환율이 붕괴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세번째 경우가 가장 흥미로운 경우이다. 여기서는 외환보유액이 중간정도 수준인 10이라고 가정되고 있다(R=10). 이 경우에는 어느 거래자 일방이 외환당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을 전부 살 수는 없지만 거래자 2인이 모두 국내통화를 매도하는 경우에는 외환당국이 평가절하를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수익(pay-off)을 계산해보면 아래와 같다. 


어느 거래자 일방이 공격을 하고 상대방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외환당국이 보유외환으로 충분히 공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평가절하가 일어나지 않는다.격을 감행한 거래자는 1만큼의 비용만 지급하게 된다. 두 거래자가 동시에 공격을 하게 되면 전체 보유외환 10을 각각 5만큼씩 나눠서 사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50%만큼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은 국내통화기준으로 각각 5/2만큼씩 얻게 되는 반면 거래비용은 1이 되어 각각 3/2[=(5/2)-1]만큼의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게임에서는 2개의 나쉬균형이 생기게 된다. 하나의 균형은 양거래자가 모두 공격을 하는 경우에 생긴다. 이때 외환당국은 평가절하를 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의 균형은 어느 거래자도 상대방이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경우에 생긴다. 이 때 외환당국은 평가절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투기적공격이 일어나면 고정환율이 붕괴되고 그렇지 않으면 고정환율이 유지된다는 의미에서 이들 균형에는 자기실현적 요소가 있게 된다.




최창규. 1998. '<투기적공격 이론과 한국의 외환위기>'한국은행 조사부 「경제분석」 제4권 제2호 (1998. Ⅱ). 7-10 


그리고 금융경제학계의 권위자 Frederic Mishkin은 "고정환율제도가 문제를 심화시킨다" 라고 지적한다. 고정환율제도를 택한 국가의 통화가치는 크게 변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화가치 고평가가 지속될수록 평가절하 압력을 계속해서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기적 공격으로 인해 통화가치가 한번 하락하기 시작하면 변동폭이 커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Under a pegged exchange-rate regime, when a successful speculative attack occurs, the decline in the value of the domestic currency is usually much larger, more rapid and more unanticipated than when a depreciation occurs under a floating exchange-rate regime.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또한, 원화가치 고평가에 이은 경상수지 적자도 외환위기의 빌미를 제공한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될수록 외국 투자자들은 국가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각주:6] 에 의심을 품게 된다. 김인준·이영섭은 <외환·금융위기와 IMF 경제정책 평가>(1998)에서 '경상수지 적자 → 경제의 기본 건전성에 회의를 갖게된 외국 투자자 → 자본유출 → 통화가치 급락' 현상을 이야기한다.  


국가간 금리 격차가 존재할 경우 자본자유화는 양국간 금리격차를 줄이는 데 공헌할 것이다. 그렇지만 양국간 발전단계가 다르다면 자본이동에 따라 금리격차가 줄어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편의상 자본자유화는 이루어졌지만 금리는 원래 수준을 유지한다고 가정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자본은 이자율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 결과 이자율이 높은 국가의 경우 자본시장개방에 따라 자본이 유입되면서 환율이 하락하고 경제가 활성화된다. (...)


이자율이 높은 나라로의 자본유입은 이 나라의 환율을 하락시키고 그 결과 가격경쟁력이 악화되어 경상수지가 적자로 될 것이다. 또한 자본유입에 따른 경기활성화도 경상수지를 악화시키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물론 어느 기간까지는 경상수지 적자가 자본유입으로 보전되기 때문에 이 나라 통화의 고평가 현상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환율의 고평가로 경상수지 적자가 상당기간 누적되면 외국 투자가들이 이 나라 경제의 기본 건전성에 회의를 갖게 되고 자본을 회수해 나가려 할 것이다. 이때부터 고금리는 더 이상 자본유입의 유인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환율에도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가 환율에 주로 영향을 끼치게 되고 경상수지 악화로 인해 환율은 상승할 것이다. 한편 환율상승에 따른 투자수익률 하락을 우려하여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려 함에 따라 환율은 더욱 더 상승할 뿐만 아니라 경기침체도 가속화될 것이다.


김인준·이영섭. 1998. "외환·금융위기와 IMF 경제정책 평가" . 『金融學會誌 Vol.3 No.2』 7-9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속인 왕윤종 또한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2001)에서 '경상수지 적자 → 경제의 기본 건전성에 회의를 갖게된 외국 투자자 → 자본유출 → 통화가치 급락' 현상을 말한다.


Over the period 1995-97, however, there was a series of adverse external shocks – particularly a trade-weighted appreciation of the region's currencies vis-à-vis the U.S. dollar, to which they were de facto pegged, rose against the Japanese yen, and a fall in the terms of trade for electronic-goods exporters. 


These shocks brought into question the sustainability of the currency pegs to the U.S. dollar, undermining the confidence of international investors in the region's prospects, and leading to a sudden withdrawal of their funds. 


As the currency pegs collapsed, the large stock of unhedged foreign currency denominated borrowings, undoubtedly fueled investors' new-found pessimism and the sense of market panic, making the crisis much more severe than it would otherwise have been.


왕윤종.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7


게다가 1996년에 기록한 '-229억 달러 · GDP 대비 -4.75%' 에 달하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는 외환유동성 자체를 크게 악화시켰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신인석은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를 통해 "환율절하 지연에 이은 96년에 기록된 대폭의 경상수지 적자가 잠재적인 외환유동성을 악화시켰다" 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외환유동성 악화는 1997년 12월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인출사태(banking panic)'을 촉발시켜 외환보유고를 고갈시켰다.   




<표 8>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야기되기까지는 거시충격과 이에 대한 정책대응상의 오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표가 보이듯이 단기외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로의 자본유입이 증가한 것은 94년부터였으며 같은 시기 외환유동성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급격한 악화가 진행된 것은 지표 A에 의거할 때 명백히 96년이었고, 이는 물론 96년에 기록된 대폭의 경상수지적자에 기인한 변화였다. 그리고 96년의 경상수지적자는 교역조건 충격으로 요구되었던 환율절하를 정책당국이 지연시킨 결과였다고 평가되므로, 그만큼의 외환유동성 악화는 거시정책대응 미숙에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31-32




※ 원화가치 고평가와 1994-1996년의 경상수지 적자를 막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신인석의 주장 중 눈여겨볼 대목은 "외환유동성 악화는 거시정책대응 미숙에 원인" 이다. 왜 당시 정책당국자들은 금융시장개방의 위험성을 간과했고, 원화가치의 절하를 지연시켰을까? 한국경제연구원의 허찬국은 <1997년과 2008년 두 경제위기의 비교>(2009) 보고서를 통해 "1990년대 당시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이 가져오는 파급효과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라고 비판한다. 


당시의 환율제도가 정책당국의 높은 결정력을 보장하는 약한 형태의 페그제(adjustable peg regime)였다고 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대외균형의 3년 연속 악화를 방치한 것은 의아한 일이라 하겠다. 지속되는 경상수지 적자 악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원화가치 절하 움직임이 가시적으로 없었다.


한 가지 설명은 자본시장 개방 이후 해외자금의 유입이 가속화되는 그때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에 이미 고도 성장기부터 대외교역 경험을 통해 환율이 수출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본시장 개방과 그에 따른 큰 규모의 국제적 자금이동에 따른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식이 낮았다고 보인다.


허찬국. 2009. '1997년과 2008년 두 경제위기의 비교'. 『한국경제연구원』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 국장을 맡았던 정덕구도 회고록 『외환위기 징비록』을 통해 "시장개방의 후유증을 간과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아쉬운 점은 시장 개방의 후유증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란 가치를 내걸고 적극적인 시장 개방에 나섰다. 그러나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비용이 뒤따른다. 시장 개방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구조조정 외에는 없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금융이나 기업 구조조정[각주:7]에 전혀 손도 대지 못하고 말았다. 재경원에서 끊임없이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정책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96


정덕구는 연이어 원화가치 고평가 문제를 바로잡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정부 정책이 시장에 먹혀들지 않게 되면 정부는 또 다른 정책을 발표하게 된다. 정책이 남발되는 것이다. 환율정책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정부는 1996년 말 경상수지적자가 자꾸 늘어가자 한승수 부총리와 박영철 금융연구원장 등이 모여 원화가치 하락(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 상승)을 용인할 것인지를 깊이 논의했다.


그러나 원화가치를 하락시키는 일은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물가상승 우려와 함께 국내 금융기관의 외채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는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눌려온 것은 언젠가 폭발하게 마련이다.


원화가치가 고평가된 상태로 계속 가게 되면 시장참여자들은 "언젠가는 원화가치가 하락할 것" 이라며 불안해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떤 계기가 생길 경우 환율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게 되는 것이다. 방안에 가스가 꽉 차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성냥불을 켜대면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111


김영삼정부 시절 관세청장 · 통상산업부 차관 · 재정경제원 차관을 역임한 강만수는 "원화가치 절하를 하지 못한 것이 경상수지 적자와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라며 원화가치 고평가의 책임을 한국은행과 정치권에 돌린다[각주:8] [각주:9].


8% 단일관세율과 고평가된 환율이라는 최악의 정책조합(the worst policy mix)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수출을 포기해야 할 환율 수준에서 추진된 '뼈를 깎는' 노력은 경상수지 적자를 예상보다 4배나 많은 사상 최대인 237억 달러에 달하게 하여 우리경제의 뼈를 실제로 깎았다. 이러한 방향착오를 한 다음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


1996년의 성장률은 내수증가가 기여했고 물가는 환율의 고평가와 수입증가가 기여한 것이었다. 1994년부터 3년간 경상수지는 물가와 성장률에 희생된 것이다. 대내균형을 위해 대외균형이 파괴된 것이다. 1996년은 물가를 희생해서라도 환율을 크게 올려 수출을 늘이고 수입을 억제했어야 했다. 


10%가 넘는 임금상승에서 가격경쟁력 상실을 보전할 수 있는 수단도 사실상 환율 뿐이었다. 매년 5% 정도의 절하만 있었더라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고임금으로 가격경쟁력이 상실되어가고 있는데 환율까지 평가절상 되었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


상반기에 경상수지가 연간목표를 넘어섰는데도 "원화가치의 가파른 하락으로 인해 외환시장이 출렁거리지는 않도록 하겠다"는 한국은행의 헛소리는 끊임없이 평가절상하여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중앙은행의 속성상 이해가 된다. 평가절상을 하는 만큼 다른 부분에서 통화를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이 중앙은행에는 있다. (...)


대내균형을 나타내는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임무이고 표를 의식하는 것은 정치권의 속성이다. 정부는 대외균형을 유지할 의무가 있고 대내와 대외 균형이 상충할 때는 비난을 무릅쓰고 대외균형을 선택해야 한다. 특히 경상수지가 감내하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될 때는 그렇다. (...)


최악의 두 정책이 동시에 조합됨으로써 1994년부터 국제수지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1996년 상반기에 벌써 연간 전망 적자를 넘어선 위기상황 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 경제가 위기로 치달아가는데 환율은 버려두고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호기를 부린 사람들은 우리를 슬프게 했고, 환율을 안정시킨다고 노력한 사람들의 빗나간 정책들은 우리를 절망케 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372-379




※ 원화가치 하락을 노린 헤지펀드 · 핫머니의 투기적공격이 1997 외환위기의 원인일까?


앞서 논의했던 것을 종합해보자. 금융시장개방과 일본 엔화의 절하는 원화가치의 고평가를 초래했고 이는 1994년-1996년, 특히나 1996년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만들어냈다. 적정수준을 넘어서 고평가된 원화가치를 본 시장참가자들은 "원화가치가 하락할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이는 자기실현적 투기적공격 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 을 유도했다. 경상수지 적자 또한 시장참가자들에게 "한국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에 의심을 품게해서 자본유출을 초래했다. 게다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한국경제의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이 야기되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고평가된 원화가치 ·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가 높아진 상태이다.


여기서 구별해야 하는 건 '자기실현적 투기적공격 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 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투기적공격'이란 말을 들으면 통화가치 하락 그 자체에 대해 베팅한 뒤 환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 · 핫머니 등을 떠올리기 쉽상이다[각주:10] [각주:11]. 그러나 1997년 당시, 고평가된 원화가치 · 경상수지 적자 · 잠재적인 외환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자본유출이 발생하고 외환보유고가 감소하긴 했지만, 헤지펀드 · 핫머니 등이 원화가치 하락에 베팅한 뒤 환차익을 챙기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1997년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은 9월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 이라며 한국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에 대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97년 7월 8일 태국, 금융위기에 몰리다


나-강경식-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태국과 우리는 여러가지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외국인이 우리 원화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주식시장이 고작인데, 그나마 한도액이 정해져 있어서 원화의 대량 매매는 있을 수 없고 그 외에 외국인이 원화를 사용할 일은 전혀 없다. 심지어 채권조차 살 수 없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거래되는 달러의 양은 1조 6천억 달러로 무역 등 실물거래 규모는 500억 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투기성 자금인 것이다. 세계 중앙은행 보유고 총액이 1조 달러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만큼은 이런 투기자금이 전혀 들락거리지 못한다. 전부 실제 거래되는 달러뿐이다. 금융 또한 해외에 개방이 안 되어 있어서 외국의 동향에 휘말릴 걱정이 없다. (...)


97년 9월 8일 태국과 한국은 다르다


무엇보다 태국은 역외 금융시장을 육성한다는 명분 하에 금융시장이 완전개방되어 있어 헤지 펀드(hedge fund) 등 단기 투기성 자금의 유입이 용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증권시장 일부만 개방되었을 뿐,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투기성 자금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견해는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이었다. 이날 토론에서도 한국과 태국이 다르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79-281     


강경식의 판단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신인석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발발한 "1997년 11월달 외환보유고 감소의 주된 요인은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이 아니라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 이었다.




<표 7>에서 환율요인에 따른 외환수요의 증가분을 가장 넓은 기준의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표에는 경상수지적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과 포함된 것의 두 가지 투기적 공격지표를 계산하여 놓았다. 두 지표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11월중 투기적 공격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의 14~20%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경상수지적자까지 감안한 광의의 투기적 공격 지표에 의거하면 9~11월중의 환율에 따른 외환수요요인은 1~3월에도 미달하는 규모였다. 


두 기간의  차이와 11월 외환위기를 낳은 것은 환위험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고 따라서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으로 볼 수 없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의 존재여부[각주:12] 였음은 <표 7>에서 명백하다.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26-27


고평가된 원화가치 ·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가 높아진 상태지만, 고평가된 원화가치 그 자체에 대한 헤지펀드 · 핫머니 등의 투기적 공격은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 그렇다면 과연 어떤 요인이 한국경제에 외환위기를 가져온 것일까? 신인석이 주장하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가져와보자. 


이전 포스팅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를 통해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생긴 구조적 문제가 1997 외환위기 원인으로 이어졌다" 라는 말을 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해서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1997 외환위기로 이어졌을까?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 이야기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란 '금융산업의 건전한 발전 저해 · 제2금융권 팽창 · 은행과 기업의 도덕적해이 Moral Hazard · 잠재적 부실채권 증가 · 재벌에 경제력 집중 · 재벌의 과다차입' 를 뜻한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요인이 어떻게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를 촉발시켰는지, 다음 포스팅에서 그 경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1편 참고자료 >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2013.10.18


국제금융센터 <Ⅱ. 외환위기의 개념 및 이론적 모델>.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2013.08.23


왜 환율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단일통화를 쓰면 안될까?. 2012.10.19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창규. 1998. '<투기적공격 이론과 한국의 외환위기>'한국은행 조사부 「경제분석」 제4권 제2호 (1998. Ⅱ).


김인준·이영섭. 1998. "외환·금융위기와 IMF 경제정책 평가" . 『金融學會誌 Vol.3 No.2』


Wang Yunjong. 2001. 'Does the Sequencing Really Matter?: The Korean Experience in the Capital Market Liberalization'. <THE JOURNAL OF THE KOREAN ECONOMY, Vol. 2, No. 1 (Spring 2001)>.


신인석. 1998.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한국개발연구원』.


허찬국. 2009. '1997년과 2008년 두 경제위기의 비교'. 『한국경제연구원』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1. 신흥국은 특성상,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경제학자 Barry Eichengreen은 이를 '신흥국의 원죄 Original Sin'로 표현했다. "왜 환율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단일통화를 쓰면 안될까?" http://joohyeon.com/113 [본문으로]
  2. 경제학자 Paul Krugman은 '은행부채의 상당 부분이 외화표시로 되어있을 때, 해당국 통화가치가 급락하여 은행의 대차대조표를 악화시키는 것'을 '신흥국 대차대조표 위기 Balance Sheet Crisis'라 불렀다. │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 이에 대해서는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http://joohyeon.com/176 참고 [본문으로]
  3. 이러한 현상은 신흥국의 외환위기를 체계적 금융위기로 심화시킨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보통 금리를 올림으로써 통화가치를 상승케 하는데, 금리를 인상할 경우 은행의 부채부담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 그러나 신흥국이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면,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고 기업과 은행의 부채부담을 증가시킨다. 그 결과, 은행은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하게 되고 금융시스템 자체가 마비된다. 금융경제학 권위자인 Frederic Mishkin은 논문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1999)를 통해 "A currency crisis and the subsequent devaluation then helps trigger a full-fledged financial crisi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because of two key features of debt contract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debt contracts both have very short duration and are often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 These features of debt contracts generate three mechanisms through which a currency crisis in an emerging market country increases asymmetric information problems in credit markets, thereby causing a financial crisis to occur." 라고 말한다. │ 이에 대해서는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http://joohyeon.com/176 참고 [본문으로]
  4. 경제학에서는 금융위기 원인의 2세대 모델로서 '자기실현적 투기공격 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 을 다루고 있다. │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http://joohyeon.com/162 [본문으로]
  5.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51 [본문으로]
  6. 경제학계에서는 금융위기 원인의 1세대 모델로서, '해당국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악화로 인해 자본유출이 발생하고 통화가치가 급락' 을 다루고 있다. │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http://joohyeon.com/162 [본문으로]
  7. 여기서 말하는 금융, 기업구조조정은 단순히 인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금융시스템에 대한 감독기능 강화, 대출시 엄격한 신용평가, 기업의 과다차입 방지 등등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태어난 구조적인 문제를 고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룬다. [본문으로]
  8. 김영상정부 시절 경제부처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던 그가 이러한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강만수, 강경식 등 경제고위관료들은 회고록 등을 통해 1997 외환위기의 책임을 "한국은행"에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은 "금융개혁법안"과 "환율관리"를 놓고 치열한 갈등관계 였기 때문인데, 그렇다고해서 고위경제관료들이 외환위기의 책임을 한국은행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본문으로]
  9.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해 일본의 엔화가치가 강제로 절상된 것을 지켜봤던 강만수는 "환율관리는 주권행사"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환율 정책만이 경제를 유지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이명박정부 집권 이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서 고환율 정책을 밀어부친다. 당시 강만수의 고환율정책은 물가인상 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10.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 파운드화 가치하락에 베팅한 George Soros를 들 수 있다. [본문으로]
  11. 물론, 금융위기 2세대 모델인 '자기실현적 투기적공격 self-fulfilling speculative attack'은 단순히 '헤지펀드, 핫머니 등이 통화가치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적 공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세대 모델이 강조하는건 '시장참가자들의 자기실현적 예측으로 인해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현상' 이다. 다만, 경제학 비전공자가 '투기적공격' 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헤지펀드, 핫머니 등만을 연상할 것 같은 노파심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본문으로]
  12.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이 보고서의 논평을 맡은 이영섭은 "<표7>의 해석에 대해서 논평자도 기본적으로 저자의 입장을 같이하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저자가 제시한 1997년 11월중의 대규모의 인출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투기적 공격 때문에 발생된 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제채권단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표7>을 보면 투기적 공격은 그 이전부터 발생하지만 채권인출은 11월에만 발생하고 있으므로, 이는 10월말 및 11월 초에 발생하기 시작한 위기에 대한 대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표7>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외환위기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만일 외환위기의 시작을 11월 중하순(예를 들어, IMF 구제금융 신청일인 11월 21일)으로 잡으면 저자의 해석에 대해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작을 10월 하순(예를 들어, 기아사태처리 발표 및 홍콩증시 폭락이 발생한 10월 22~23일)으로 잡으면 이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저자와 대립되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고 지적한다. 본인도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시점을 10월 하순으로 잡더라도, 이는 헤지펀드 등의 투기적공격이 아니라 1997년 동안 높았던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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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금+특별인출권+IMF포지션+외환) 추이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금+특별인출권+IMF포지션+외환) 추이

Posted at 2013. 8. 25. 11:35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출처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금+특별인출권+IMF포지션+외환) 추이 1994년-2012년. 차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외환위기를 맞았던 1997년 이후부터 외환보유액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1997년의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

2012년의 외환보유액은 3,260억 달러.


외환보유액이 급속도로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IMF 때문이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IMF는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강도높은 구조조정, 고금리" 등의 "긴축"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긴축의 여파로 실물경제가 침체-를 너머 박살수준;;-에 빠졌지만, "외환이 필요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IMF의 긴축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Martin Feldstein 등 일부 경제학자들은 IMF가 내건 가혹한 조건을 비판했다. "IMF의 가혹한 긴축을 경험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앞으로 단순한 '외환보유고 확충' 에만 신경쓸 수 있다" 라는 것. 다시 말해, 무역수지 흑자를 통해 벌어들인 외환을 기반시설 투자 등 '생산적인 용도'로 쓰지 않고, 또 다시 있을지모를 외환위기 방지-그리고 뒤이을 IMF의 가혹한 조치-를 피하기 위해 단순한 "외환보유고 확충" 용도로만 쓸 수 있다는 것.


The desire to keep out of the IMF'S hands will also cause emerging-market economies to accumulate large foreign currency reserves. A clear lesson of 1997 was that countries with large reserves could not be successfully attacked by financial markets. 


Hong Kong, Singapore, Taiwan, and China all have very large reserves, and all emerged relatively unscathed. A country can accumulate such reserves by running a trade surplus and saving the resulting foreign exchange. 


It would be unfortunate if developing countries that should be using their export earnings to finance imports of new plants and equipment use their scarce foreign exchange instead to accumulate financial assets.


Martin Feldstein. "Refocusing the IMF". <Foreign Affairs>. 1998년 3-4월


Martin Feldstein의 걱정이 맞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과 한국은 "외환보유고 확충"에 온 신경[각주:1]을 다썼다. 현재의 신흥국 위기가 "1997년 형태"의 외환위기로 커지지 않을 이유이다.


그러나 "1997년 형태"의 외환위기만 피하면 다행일까? 문제는 벌어들인 외환자금이 "생산적인 곳"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7년 이후, 한국과 신흥국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 1997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구조의 변화-정년고용의 폐지, 자영업의 증가, 대기업 독과점 심화, 낮은 경제활동참가율-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가올 신흥국 위기-한국의 위기-는 "초저금리 기조에서 디레버리징에 실패한 가계부채, 저성장, 고령화, 자영업 부채, 청년실업" 등등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는 이유이다.


Fed는 2015년 상반기 이후에도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어쨌든 2~3년 내에 금리를 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 Tapering 로도 이렇게 출렁이는 신흥국 경제가, 양적완화의 완전한 종료 Exit 혹은 Fed의 자산되팔기를 맞으면 어떻게 될까? 


경제전문가 혹은 경제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만 훑어봐도 맨날 안좋은 이야기 뿐이다. 경제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이유가, 그 사람이 '비관론자' 이거나 '종말론자' 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여러 정보를 취합하다보면 저절로 미래가 암울하게 보인다.





2013년 8월 25일에 썼던 글을 2013년 9월 14일에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1. 1997년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러한 행위는 2008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글로벌 과잉저축 - 2000년대 미국 부동산가격을 상승시키다' http://joohyeon.com/195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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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 -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 2013 동아시아 외환위기???

Posted at 2013. 8. 23. 11:28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은 대략 7가지. 비슷한 몇가지를 묶은 뒤, 5가지로 설명. 


1. 1세대 모델 

- 해당국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악화"로 인해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이론.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면 해당국 통화는 평가절하의 압박을 받게 되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시장참가자들이 달러를 구매하면서 해당국 통화의 평가절하는 가속. 해당국은 평가절하를 막는 과정에서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냄. 그리고 해당국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투명하지 못하"거나 "경영상태"가 좋지 못할 경우, 시장참가자들은 자금을 회수. 이 과정에서 해당국 통화가치가 폭락. 


- 1997년 한국의 사례 : 한국은 1994-1996년 동안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면서 원화의 통화가치는 고평가. (게다가 당시에는 자유변동환율제가 아니었음) 시장참가자들이 고평가된 원화가치에 의문을 품은 상태. 그리고 한국의 재벌들은 회계조작 등을 통해 투명하지 않은 재무상태를 유지했고,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초래한) 자산대비 부채 비율이 상당히 높았던 상황




2. 2세대 모델

- 시장참가자 간의 "자기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effect" 으로 인해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이론. 


해당국의 "고평가된 환율" "바닥이 보이는 외환보유고 현황" "단기외채 비중"을 본 시장참가자들 외환위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 환율이 고평가 되어있고, 외환보유고 규모도 작고, 단기외채 비중이 높긴 하지만, 경제성장률 등의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이 비교적 튼튼하다면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음. 


그러나 시장참가자 스스로 "외환위기가 발생할 것"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당국에서 자본을 회수하고 그 결과 해당국의 통화가치는 급락. 


- 1997년 한국의 사례 : 태국, 말레이시아 등과 비교해 한국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은 괜찮았음.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됐긴 했지만, 경제성장률이나 경제규모 등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비교해 건실. 그러나 외환보유고, 단기외채 비중 등을 중시한 시장 참가자들은 자금을 급속히 회수해가면서 외환위기가 발생. 


경제학자들이 "1997 한국의 외환위기는 지급불능insolvency 이 아니라 단순한 유동성부족 illiquidity 때문" 이라고 주장하는 이유




3. 금융기관을 통한 급격한 자본유출 & 도덕적해이 모델 Moral Hazard


- 금융기관은 "외화자금을 중개하는 역할(intermediation of capital inflows)" 을 함. 따라서 그 특성상 "대규모"의 자금을 차입함. 그리고 다른나라로부터 외화를 들여오기 때문에, "조달"면에서는 "단기자금"이 주를 이루고, 기업에 자금을 대출하는 "운용" 면에서는 "장기대출"이 주를 이룸. 이러한 "만기구조 불일치" 때문에, 급격한 자본유출 과정에서 은행은 "유동성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큼


- 그리고 "우리가 파산하면 정부가 보증을 서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은행은 "도덕적해이"에 빠짐. 그 결과, 대출과정에서 기업의 신용상태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부실대출을 일삼음. 


- 1997년 한국의 사례 : 1990년대 초반 "자본시장 개방" 이후, 금융기관은 막대한 양의 외국자본을 차입. 단기로 들여온 이러한 자본들을 "장기"로 기업들에 대출. "장단기 만기구조 불일치" 현상이 발생. 


그리고 당시 한국의 은행들은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재벌들에 막대한 양의 자금을 대출. 경제성장과정에서 생긴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으로 인해 금융업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본 시장참가자들이 갑자기 한국시장의 "만기연장 roll over 을 거부"하자, 장단기 만기구조 불일치에 따른 유동성위기가 발생했고 자산대비 부채비율이 과도하게 높았던 기업들이 도산. 




4. 호황-붕괴 사이클 모델 Boom-Bust Cycle


- 자본의 급속한 유입이 "자산가격을 폭등 boom"시키고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하락해야할 통화가치는 자본유입으로 인해 계속 고평가. 그러다가 경제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리장참가자들이 자금을 급속히 회수해 가면서, "자산가치가 급락 bust" 하고 해당국 통화가치가 하락. 경제는 침체에 빠짐. 


쉽게 말해, 자본의 급격한 유입이 거품 bubble 을 만들고, 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금융시장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이야기. 


- 1997년 한국의 사례 : 개인적으로는 '호황-붕괴 사이클 모델'은 1997년 한국의 사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 그렇지만, 세계경제의 화두인 "글로벌 불균형 Global Imbalances"를 설명하는 이론이고, 유럽경제위기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 




5. 금융공황 모델 Financial Panic & 전염효과 모델 Contagion Effect


- 시장참가들이 어느 순간에 "공포에 질려" 일시에 자금을 회수할 경우, 금융기관은 유동성위기에 빠짐. 시장참가자들의 "군집행동에 의한 상환요구"가 금융위기를 불러온다는 이론


- 시장참가자들이 서로 다른 국가를 "비슷하다고 인식"할 경우 "위기가 전염" 될 수 있다는 이론.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과 상관없이, 시장참가자들의 "인식" 만으로 자본유출 등의 상황이 발생하고, 그 결과 위기가 전염됨. 


- 1997년 한국의 사례 : 서양투자자들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그저 "똑같은 국가들" 이라고 인식했음. 태국과 한국은 경제구조, 경제규모, 여러가지 상황 등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서양투자자들은 "태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아시아 국가. 그런데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네? 한국도 믿을 수 없다" 라고 인식하고, 한국시장에서 자본을 급격히 유출해감. 


그 결과, 태국 등에 비해 경제의 기초여건 Fundamental 이 상대적으로 튼튼했던 한국에서도 외환위기가 발생. 2번의 "자기실현적 효과 self-fulfilling effect"와 유사. 




이러한 금융위기의 이론적 모델들을 이용해, 1997년의 상황과 2013년 현재를 비교하면?


1997년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IMF의 가혹한 조치를 경험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후 "외환보유고 확충"에 힘을 쏟았음. 실제로 동아시아 각국은 단기외채 비율이 1997년 당시와 비교해 작음. 우리나라의 경우, 회계공시제도 도입 등을 통해 "기업의 투명성"을 높였고 "경상수지는 흑자"를 가록하고 있음. 그리고 "외환보유고 규모는 건실"하고 "단기외채 비중도 낮음". 전문가들이 "1997년 형태"의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하는 이유. 


따라서, "1997년 형태"의 위기보다는 다른 위기를 살펴봐야 할텐데, 세계각국의 초저금리 기조 와중에도 "부채축소 deleveraging 에 실패한 가계" 나 "영업이익이 하락한 대다수 기업"들이 문제.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 Kenneth Rogoff 는 <This time is different> (<이번엔 다르다>) 를 통해, "이번엔 다르다! 금융위기는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을 비판했는데.. 금융위기 발생의 큰 요인이 "심리" 라는 것을 고려하면.... 최근 신흥국의 움직임은 그닥 좋을게 없을 거 같다;;;




2013년 8월 23일에 썼던 글을 2013년 9월 14일에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이미지파일이나 인용 등의 보완을 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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