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③]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외환위기 ③]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Posted at 2013. 11. 9. 15:03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지난 포스팅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에서는 1997 한국 외환위기의 핵심원인이었던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를  다루었다. 당시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했던 한국 기업들은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해 현금수입이 감소한 반면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지출은 증가해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제2금융권을 통해 기업어음(CP) 등을 발행하여 단기자금 조달을 늘려갔는데, 기업어음에 의한 자금조달의 문제는 만기구조가 단기일 뿐만 아니라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대기업군의 연쇄적 도산을 초래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대기업들이 '제2금융권' (혹은 비은행금융권) 을 통해서 '단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 증가로 금융시스템 내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금융감독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번 포스팅을 통해 '경제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의 증가' · '금융감독 시스템의 미흡' 등등 1997년 당시 한국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정부가 금리를 통제하는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을 통해 성장해왔다. 정부는 인위적으로 낮게 형성된 금리를 통해 특정집단에 금융자원을 몰아주었다. 반면, 정부의 선택을 받지 못한 기업들은 장외시장 curb market 을 통해 시장균형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정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기업들은 제도금융권 밖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두열은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2002) 보고서를 통해 "제도금융권에 대한 장기간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의 산물로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권이 형성되었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에 있어서 비은행권의 형성배경을 보면 정책당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동원을 극대화하고 전략 산업부문을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은행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제도금융권에 대해 장기간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을 실시하였다. 당시 정책당국의 금융억압 내용을 보면 정부가 은행의 여수신 금리를 결정하고 은행의 대출부문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등 자금의 가격과 수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기간에 걸친 금융억압의 산물로 제도금융권 밖에서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권이 형성되어 금융산업에 있어서 은행을 중심으로 한 제도금융권과 사금융권의 2중구조가 심화되었다. 사금융권의 규모가 막대해짐에 따라 단기 고금리 사채가 성행하고 기업의 재무구조가 악화되자 정책당국은 1972년에 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사채를 일정기간 저금리로 동결하고 상환을 유예하는 등사채 동결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8.3조치[각주:1]를 실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정책당국은 채 동결의 부작용을 완화하고 사금융권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1972년부터 단기금융회사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단기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등 비은행금융기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77   


여기서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도 다루었듯이, 그동안 한국경제는 기업부실이 발생하였을때 정부가 직접 금융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보통 기업부실이 발생하면 주요 채권자인 은행이 나서서 부실채권을 정리하지만, 한국경제에서 은행은 단순히 국가의 지시를 받는 대리인 역할에 머물렀다. 


은행들은 "은행 자산과 부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보다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게 경영평가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행들은 본연의 임무인 신용평가 · 리스크 관리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융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신용금고·단자회사 등 비은행금융권이 커지고 만다.     


Korea relied on credit interventions too heavily and for too long as an industrial policy instrument. The banking system bore the brunt of this strategy. The government used the banking system as a treasury unit to finance development projects and to manage risk sharing in the economy.


Bankers were treated as civil servants. Their performance was evaluated according to whether they complied with government guidance, rather than whether they managed their assets and liabilities efficiently. Commercial banks in Korea were involved so heavily in directed credit progrmas that they almost functioned as development banks. In the process, they incurred large nonperforming loans (NPLs) (Table 19), which again had to be covered with government support. 


Consequently, banks lagged behind the development of the real sector and could not effectively meet its demand for financial servies; the banks thus lost market share to other financial institutions, such as Non-Banking Financial Instutions(NBFIs), which could operate more feely and thus prolifereatd.  


  • 한국경제에서 은행부문은 신용창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은행부문이 한국경제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 < 출처 :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

당시 경제관료들은 이러한 '한국 금융산업의 낙후성과 비은행금융권의 비정상적인 발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금융개혁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추진된 몇차례의 금융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장관으로 1997 외환위기를 수습했던 이규성은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를 통해서 금융개혁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금융산업의 낙후성은 앞으로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추진된 금융개혁의 기본방향은 창의와 능률에 바탕을 둔 금융의 자율성과 상업성을 제고하여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경쟁과 시장원리를 확충함으로써 금융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금융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

이러한 70~80년대에 추진된 기업 · 금융개혁정책의 결과 기업부문에 있어서 기업공개가 확대되었으며, 대기업에 대한 여신이 통제되고 부동산취득이 어렵게 되었다. 금융부문에 있어서도 금융상품이 다양화되고 새로운 금융기법이 도입되었다. (...) (그러나) 은행은 민영화되었지만 은행장은 여전히 정부에서 사실상 선임하였으며 금융기관의 경영은 자율화되었지만 관치금융의 폐습이 근절되지 않고 부실채권은 여전히 늘어갔다.[각주:2] 기업과 금융의 취약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

금융자유화가 추진되지 못한 이유도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금융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시중은행은 민영화되고 이들이 공급하는 정책금융은 축소되었지만 이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보다 여전히 기업을 지원하는 공공적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고성장의 신화가 풍미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각주:3]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어렵게 하였다.

둘째로 정부는 금융자율화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는 노력에 소홀하였다. 정부는 은행을 민영화하면서도 누적된 부실채권을 충실히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민영화 이후의 은행 책임경영체제를 제대로 확립할 수 없었다. 민영화된 은행은 분산된 소유구조로 인하여 경영주체를 확립하지 못하고 은행장은 여전히 정부가 선임하였다. 또한 정책금융을 과감하게 재정으로 이관하지 못하여 정부의 관여와 보호의 관행이 지속되었다.

셋째로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차입경영이 지속[각주:4]됨으로써 신용평가에 의한 여신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담보와 대마불사의 기준에 의한 신용공여가 시정되지 못하였다.

끝으로 금융자율화에 따라 건전성 감독이 강화되어야 하는데도 감독체계는 여전히 미흡하였으며 신용평가기관과 예금보험기구도 미비된 상태[각주:5]였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영리기관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부의 보호를 기대하면서 점포나 수신고 늘리기와 같은 외형성장을 추구하고 대기업 위주의 신용공여에 안주하고 있었다.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제도금융권은 단순한 금융자원동원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은행금융권'의 영향력은 1990년대 초반에 시행된 금융자유화로 인해 더욱 더 커졌다.  



※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은행금융권의 팽창



1990년대 시행된 금융자유화의 중점은 금리자유화 이었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금융억압 Financial Reression 정책의 일환[각주:6]으로 금리를 인위적으로 통제했었으나, 1991년 11월' 제 1단계 금리자유화'를 시작으로 금리자유화가 단계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문제는 금리자유화 과정에서 비은행권 금리가 은행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유화 되었다는 점이다. 


금융시장의 규제정도가 균등하지 않고 특정부문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이른바 비대칭적 규제 Unbalanced Regulation[각주:7]가 적용된 결과, 비은행권의 수신비중은 은행의 수신비중을 2배 이상 능가할 정도로까지 비대화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각주:8]가 비은행권 비중을 더욱 더 키우고 만것이다.


한국 종금사의 성장은 외환위기 발생 전에 은행권과 비은행권인 종금사간에 업무영역, 금리, 경영 등에 대한 규제에 있어서 과도한 차별이 지속되었음에 많이 기인한다. 지속된 은행권과 비은행권간비대칭적인 규제종금사를 비롯한 비은행권(여기에서는 제2금융권을 의미함)의 이상 비대화를 가져왔다.


비대칭적인 규제의 내용을 보게 되면 첫째, 업무영역에 있어서 비은행권에 대해서는 은행수신 상품과 유사한 상품의 취급이 허용되어 온 반면 은행권에 대해서는 제2금융권 상품의 특성을 반영한 금융상품의 취급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둘째, 금리에 있어서는 1990년대 들어 추진된 금리자유화 과정에서 비은행권의 금리가 은행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유화되어 은행의 수신금리 자유화비율이 비은행권에 비해 낮은 추이를 지속하였다. 셋째, 자금운용에 있어서도 은행이 정책금융, 지시금융, 구제금융 등을 주도적으로 담당해야 했던 반면 비은행권은 은행에 부과되고 있던 지급준비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규제에 따라 비은행권이 비대화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제2금융권의 수신 및 여신 비중이 은행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어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 1996년에는 비은행권의 수신비중이 은행의 수신비중을 2배 이상 능가할 정도로까지 비대화하게 되었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85-186


비은행권의 빠른 팽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90년부터 1996년까지 7년간 은행권의 자산규모는 185조원에서 451
조원으로 244% 증가하였음에 비하여 비은행금융권의 자산규모는 216조원에서 761조원으로 352% 증가하였다.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도 살펴봤듯이, 이러한 비은행금융권의 여신은 단기일 뿐만 아니라 담보에 바탕을 두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을 경우 갑작스런 여신회수에 돌입하므로 기업부도급증의 원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업의 부도가 증가할수록 비은행금융권의 부실여신도 늘어나 자본잠식에 빠진 비은행금융권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졌다. 

'기업의 수익성 악화 → 비은행금융권의 갑작스런 여신회수 → 기업부도 → 부실여신 증가 → 자본잠식에 빠진 비은행금융권 증가 → 자본보충위해 여신회수노력 증가 → 기업부도 → (...)  국내금융시장 혼란' 이라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1997. 9월 말 현재 종합금융회사의 총부실여신은 [표 1-9]에서 보는바와 같이 5조 4,862억 원이었으며, 이는 자기자본대비 135.6%에 달하는 규모였다. 특히 기존의 6개 종합금융회사를 제외한 전환종금사(단기금융업무의 비중이 높은 종전의 단자회사에서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한 회사)의 부실여신 비율이 높았다. 그 중 대한 · 제일 · 신한 · 나라 · 한화 · 한솔 · 경남 · 대구 · 쌍용 · 청솔 · 울산 · 신세계 · 경일 등 14개 종금사는 자기자본대비 부실여신비율이 200%를 초과하여 사실상 자본이 완전 잠식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은 국내 금융시장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무디스와 S&P는 각각 7.26일과 8.6일에 5개 시중은행을 감시대상으로, 국가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팽창한 기업어음(CP)시장

게다가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에서도 살펴봤듯이,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로 인한 비대칭적규제단기금융상품인 기업어음(CP, Commercial Paper) 시장의 팽창을 불러왔다. 은행수신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먼저 자유화되고 신탁계정의 금리자유화 폭이 컸었다. 그 결과 자금조달비용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행이 까다롭고 장기금융인 회사채시장에 대한 규제는 지속되고 기업이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는 단기금융인 기업어음 시장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었다. 

따라서, 은행은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을 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회사채, 국채 등 비교적 안전한 자산보다는 기업어음 등 위험자산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시장으로 자원배분이 집중된 것이다.   

은행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자유화됨에 따라 장기수신비중이 늘었으며,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큰 CD 및 신탁계정으로 자금조달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같은 시중금리수준에 비해 평균자금조달비용이 상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자산운영도 금리가 규제된 대출보다는 금리가 자유화된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하려 하게 되었다. 


  • 1990년 이후,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컸던 CD·금전신탁 계정으로 은행수신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조달비용은 증가하게 되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7-8

회사채금리의 경우도 비록 자유화되어 있었기는 했으나, 당국의 물량규제로 실질적으로 금리를 규제해왔다. 반면, 기업어음(CP)의 경우 1993년 만기 및 최저금액제한이 완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금리에 대한 행정지도도 완전철폐하였으며, 물량규제도 전혀 없어 실질적으로 거의 완전히 자유화된 금리가 되었다.


따라서 단기여신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어음이 거의 완전자유화된 반면 장기금융인 은행의 대출과 회사채금리에 대해서는 행정규제가 지속됨에 따라 개인과 금융기관의 자금운용이 CP 등 고수익단기금융자산에 크게 몰리고 대출과 회사채보유 등은 상응한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표2> 참조).


기업의 자금조달원도 이러한 단기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실제로 이들 기업부문의 자금조달의 flow측면에서 보았을때의 변화는 <표3>과 같다. 


(...)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규제완화의 일환으로 추진된 은행의 신탁자산운용에 대한 규제완화는 (1993년 10월) 신탁자산의 유가증권 보유를 크게 늘어나게 하였다. 은행의 경우 전반적으로 실질적인 금리자유화폭이 큰 신탁계정이 은행계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신탁계정의 자산운용측면에서도 신탁대출보다 유가증권 보유비중이 더 크게 늘어났다. 유가증권 보유에 있어서도 국채와 같은 무위험자산이 줄고, 주식이나 회사채 같은 장기금융보다 기업어음 등 단기채권 보유가 크게 늘어났다.



  • 1991년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 고수익 추구에 따라, 기업들도 회사채·은행대출·기업신용 보다는 기업어음(CP)에 의존해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기업어음(CP) 증가율이 가장 높은 것을 <표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1990년, 기업들의 자금조달 중 기업어음(CP)가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6년, 기업어음(CP)이 차지하는 비중은 17.5%로 증가하였다. 기업어음(CP)에 비해 안전자산인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1.5%에서 17.9%로 감소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4-8

 



※ 국내은행 대출고객 비중에서 5~30대 재벌 & 비재벌기업 비중 증가 

→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 상승


기업어음(CP)은 만기구조가 짧기 때문에 기업들의 위험도를 키우고 은행대출에 비해 금리가 높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조달비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보통의 기업들은 되도록이면 기업어음(CP)에 의한 자금조달을 꺼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금융자유화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각주:9]' 이다. 

1990년 초반 자본거래 규제가 완화됨에 따라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은 국내은행대출 혹은 기업어음(CP)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 대신에 금리가 싼 해외차입을 크게 늘리기 시작[각주:10]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은행대출 수요는 줄어들게 되었는데, 그 공백은 5대재벌 이외의 기업들이 메우게 됐다. 국내은행 대출고객 구성에 있어 (5대 재벌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 비중이 증가한 것이다. 그 결과, 탄탄한 수익구조를 가진 5대 재벌이 아닌 비교적 수익성이 낮고 위험도가 큰 나머지 기업들을 주고객으로 삼게된 국내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가 상승했다. 

  • 1990년대 자본시장 개방 이후,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들은 국내금융이 아닌 해외금융을 통한 자금조달을 늘리기 시작한다. 

  • 그 결과, 1990년대 들어 5대 재벌의 국내부채비율은 줄어들고 해외부채비율은 증가한다. 
  • 줄어든 국내금융 수요는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이 메꾸었다. 1990년대 들어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국내부채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은행의 부채와 자산구조로 보았을 때 부채구조는 다소 장기화된 반면 자산구조는 오히려 단기화하여 은행의 원래기능인 단기부채를 장기자산으로 전환하는 기능이 감소하였으며, 자금조달비용은 상승하고 자산구성 역시 수익성이 큰 자산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은행고객의 경우 평균차입비용상승, 조달자금의 단기화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은행의 대출고객 구성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자본거래 규제완화와 더불어 해외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의 경우 1994년부터 해외차입을 크게 늘이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본자유화는 상업차관이나 국내회사채 시장개방보다는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직접금융시장에서의 주식 및 사채발행을 우선적으로 자유화함으로써 해외에 지명도가 높은 5대 재벌이 주로 자본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이들의 자금수요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여기서 생긴 국내금융의 여유를 보다 수익성이 낮고 위험도가 높은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확대로 메우게 된다. 그 결과 국내금융기관들의 자산구성위험도는 증가하게 되었다. 

둘째, 여신에 있어서도 고수익자산에 대한 금융기관 간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가계대출 및 중소기업대출 등 고금리대출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고, 또한 30대 기업의 여신관리에 따라 우대금리의 적용을 받는 대기업들의 은행대출기회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이들의 단기금융시장에서의 차입확대를 촉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8-11

비교적 금리가 낮은 해외차입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한 5대 재벌은 부채부담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아래 첨부한 '<그림 12> 부채의 평균비용'을 보면, 5대 재벌이 부담하는 부채의 평균비용이 크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부채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5대 재벌과 달리 국내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이들은) 기업어음(CP) 등 고금리 단기상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자유화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커진 기업어음(CP) 시장,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금융의 부실화와 기업의 부실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5대 재벌의 경우에는 1992년 이후 부채의 평균비용이 하락하였는데 이는 금리가 싼 해외차입비중이 늘어난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6~30대 재벌의 경우는 부채의 평균비용이 1993년 이후 완만하게 상승하였는데, 이는 전체 시장금리수준의 변동과 더불어 금융시장 구성이 비교적 6~30대 재벌이 많이 의존한 업어음 등 고금리 단기상품쪽의 비중이 크게 발전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

기업의 재무구조측면에서 볼 때, 이미 해외에 널리 알려진 5대 기업과 포철, 한전과 같은 공기업들이 주로 해외자금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해외에 나가 기채할 수 있을만큼 지명도가 알려지지 않은 5재 재벌 이하의 민간기업들에게는 이러한 자본개방은 재무구조 개선에 별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


5대 재벌이 자본거래의 부분적인 자유화로 자금조달원을 해외로 돌리게 되자 국내금융시장에서의 여유가 생기게 되고, 때마침 자율화가 가속화된 국내금융시장이 경쟁심화[각주:11]와 더불어 6~30대 재벌과 여타 비재벌기업들이 국내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기회가 확대되었다. 이 규모가 작은 재벌들은 5대 재벌에 비해 그 당시 재무구조가 취약했을 뿐 아니라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내금융기관 자산portfolio의 위험도는 높아지게 되었다. (15-16) (...)



당시 국내금융시장에서의 불균형된 금리자율화는 단기금융시장 특히 기업어음시장의 급속한 성장을 조장하여 전반적으로 기업의 자금조달을 단기화시켰다. (...) 1995년 하반기 이후의 국내경기침체, 교역조건의 악화는 결국 6~30대 재벌의 매출수익과 현금흐름을 더욱 악화[각주:12]시켰으며, 이자지급과 원금상환능력을 크게 떨어뜨려 1997년부터 일련의 부도사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금융위기는 지난 약 10년간의 실질임금의 과도한 인상, 기업들의 방만한 투자행태[각주:13]를 조장한 경쟁질서 및 산업정책에 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으나, 1993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금융자유화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하여 결국은 기업의 부실화, 금융부실화를 재촉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보인다. (17-18)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15-18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앞서 살펴본것처럼 1997년 한국 금융시장은 1990년에 시행된 금융자유화로 인해 비은행금융권과 기업어음시장(CP)의 규모가 팽창해 금융시스템 내의 불안정성이 증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은행 대출고객구성에서 비교적 수익성이 낮은 5대 재벌미만 기업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금융기관의 자산구성위험도가 상승하는 상황이었다. 


금융경제학 권위자인 Frederic Mishkin은 "금융자유화 financial liberalization 는 대출규모의 급격한 증가 the lending boom 를 불러오고 그 결과 은행들은 고위험성 대출 excessive risk-taking lending 을 늘리게 된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금융자유화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성 대출이 증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Frederic Mishkin은 "① 은행들의 리스크관리 능력부족 ② 금융감독기능의 부재" 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the story starts with financial liberalization that resulted in the lending boom which was fed by capital inflows. Once restrictions were lifted on both interest-rate ceilings and the type of lending allowed, lending increased dramatically. As documented in Corsetti et al. (1998); Goldstein (1998); World Bank (1998); Kamin (1999), credit extensions in the Asian crisis countries grew at far higher rates than GDP. The problem with the resulting lending boom was not that lending expanded, but that it expanded so rapidly that excessive risk-taking was the result, with large losses on loans in the future.


There are two reasons why excessive risk-taking occurred after the financial liberalization in East Asia. The first is that managers of banking institutions often lacked the expertise to manage risk appropriately when new lending opportunities opened up after financial liberalization. In addition, with rapid growth of lending, banking institutions could not add the necessary managerial capital (well-trained loan officers, risk-assessment systems, etc.) fast enough to enable these institutions to screen and monitor these new loans appropriately.


The second reason why excessive risk-taking occurred was the inadequacy of the regulatory/supervisory system. Even if there was no explicit government safety net for the banking system, there clearly was an implicit safety net that created a moral hazard problem. Depositors and foreign lenders to the banks in East Asia, knew that there were likely to be government bailouts to protect them. Thus they were provided with little incentive to monitor banks, with the result that these institutions had an incentive to take on excessive risk by aggressively seeking out new loan business.


Emerging market countries, and particularly those in East Asia, are notorious for weak financial regulation and supervision. When financial liberalization yielded new opportunities to take on risk, these weak regulatory/supervisory systems could not limit the moral hazard created by the government safety net and excessive risk-taking was the result. This problem was made even more severe by the rapid credit growth in a lending boom which stretched the resources of the bank supervisors. Bank supervisory agencies were also unable to add to their supervisory capital (well-trained examiners and information systems) fast enough to enable them to keep up with their increased responsibilities both because they had to monitor new activities of the banks, but also because these activities were expanding at a rapid pace.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2-3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에서 살펴봤듯이, 경제개발단계에서 단순히 국가의 금고 역할을 담당하고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국가의 지시에 의해 부담만 떠안았던 한국의 은행들[각주:14]은 기업신용과 대출리스크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연세대 경제학과 함준호는 "위기이전 우리 금융시스템은 정부의 직간접적인 위험보증 등을 통해 위험을 조절해왔으나, 금융자율화 이후 정부개입 철회의 공백을 대체할 시장규율이 미처 정립되지 못하여 금융시스템 내의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위기이전 우리 금융시스템은 상업적 원리에 따른 자본배분보다는 금융저축의 결집과 투자재원의 확보에 보다 주력했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적 중개 위주의 금융기능은 비교적 투자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적었던 60, 70년대의 성장단계에서는 매우 중요시되는 기능이었다. 즉 개발성장 시기에 있어 자본배분기능과 위험조절기능은 금융부문보다는 오히려 정부의 직간접적인 위험보증 등을 통해 그 기능이 제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정부가 점진적이나마 지속적인 금융자율화를 추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원분배기능과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던 점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


과거 정부개입에 수반하여 제공되었던 광범위한 암묵적 정부보증이 80년대말 이후 90년대에 걸쳐 금융자율화 추진과 함께 비은행부문으로부터 점차 축소 · 철회되기 시작하였으나, 정부개입 철회의 공백을 대체할 시장규율을 미처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금융시장의 위험조절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가운데 금융저축이 비은행부문을 통해 대기업투자로 중개되었다.


함준호. 2007. '외환위기 10년: 금융시스템의 변화와 평가'. 『한국경제학회』. 5-6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조윤제의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의 '<표 7> 신용평가의 엄격성 비교: 국내신용평가회사와 S&P'를 보면, 1997년 당시 국내은행들과 신용평가사들의 신용평가가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금융시장의 전반적인 건전성을 감독하는 통합기구의 부재였다. 2013년 현재는 금융감독원이 은행 · 증권 · 보험 등의 건전성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1997년 당시에는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감독하는 기구가 은행감독원 · 증권감독원 · 보험감독원 · 신용관리기금 으로 분산되어 있어 통합감독기구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은 "한보그룹이 거래한 금융기관 수는 70개가 넘었기 때문에, 감독기구의 분산은 한보그룹 부실의 전모를 파악하기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라고 말한다.       


97년 5월 18일 권한은 책임과 함께 주어져야


김인호 경제수석과 윤증현 금융정책실장과 점심을 하면서 6월 임시국회와 관련하여 금융개혁 관련 쟁점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금융감독기구들을 통합하는 쪽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감독기구를 총리실 산하에 두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즉 금융거래 질서유지를 위한 감독기능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명학히 하기 위해서도 관련 기구들은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보의 경우에 거래한 금융기관 수는 70개가 넘는다. 물론 은행뿐 아니라 종금사, 보험회사 등 모든 금융기관을 상대로 거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감독을 여러 기관에서 나누어 하게 되면 전모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자연히 전체를 보면서 '건전하게 운영하는지를 감독' 하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 더욱이 금융기관간의 업무 영역의 장벽이 무너지는 추세여서 앞으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래서 감독기능을 한 지붕 밑에 통합해서 운영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152-153


당시 통상산업부 차관이었던 강만수 또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감독이 부재한 상태" 였다고 밝한다.


당시에 종합금융회사에 대한 감독업무가 종합금융회사의 개벌업무에 따라 은행법, 증권거래법, 증권투자신탁업법, 종합금융회사에관한법률, 단기금융업법, 시설대여업법, 외국환관리법, 외자도입법 등에 따라 자금시장과, 산업금융과, 증권업무과, 국제금융과 등에 흩어져 있었고 검사업무도 재정경제원 감사관실,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에 분산되어 있었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감독은 부재한 상태였다. 금융자율화를 위해 규제를 풀었으면 감독은 더 철저해야 하는데 감독마저 풀어버렸다. IMF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규제(regulation)와 감독(supervision)을 혼동하여 모두 다 풀어버렸다고 충고를 했다.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430


1997년 당시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 국장을 맡았던 정덕구는 "1997년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은 감독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었고,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이 벌어지자 정부는 뒤늦게 금융감독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각주:15]" 라고 말한다.


시스템의 실패다. 풀어 말하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개방이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장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시장의 룰'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시장에서 룰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그 시장은 죽은 시장이나 다름없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 경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룰을 잘 지켜야 한다. "반드시 발과 머리, 몸만 사용한다."는 것이 그 룰 가운데 하나이다. 골키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공을 손으로 잡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심판이 경기감독을 느슨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독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선수들이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 이런저런 반칙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1997년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이 그랬다. 시장참여자들이 '시장의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데도 감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들이 국내외 금융기관에서 자기 능력 이상으로 돈을 끌어다 써서 부실대출이 늘어났다. 또 일부 종금사들은 해외에 나가서 달러를 빌려 투기등급의 채권 등에 투자하는 등 리스크를 키워가고 있었따. 그런데 정부는 규제완화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감독강화보다는 규제를 푸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한보철강이 부도난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정부는 뒤늦게 금융감독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금융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금융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데다 시작한 시기도 너무 늦고 말았다. 더욱이 기아사태가 터진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외국인투자자들은 한국의 금융당국을 불신하게 된다.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110-111


정부는 금융감독시스템 보완 필요성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지만 이미 대차대조표 손상[각주:16] 기업부실채권으로 인해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금융기관의 부실화로 연결된 상황이었다.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에서 다루었던 대기업군의 연쇄적인 도산이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 를 초래한 것이다.


The outcome of the lending boom arising after financial liberalization was huge loan losses and subsequent deterioration of banks’ balance sheets. In the case of the East-Asian crisis countries, the share of non-performing loans to total loans rose to between 15 and 35% (see Goldstein, 1998). The deterioration in bank balance sheets was the key fundamental that drove these countries into their financial crises.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3


97년 7월 22일 특융 대신 국채를 현물 출자하자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부실기업' 문제가 '부실금융기관'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255


위기의 그림자는 1997년 초부터 드리웠다. 나는 그림자가 번져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내게는 우울한 한 해였다. 그림자는 짙었고, 나는 무력했다. (...) 

"요즘 은행 대출 부실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전문위원 최범수가 내게 자료를 보여줬다. 은행 대출의 15%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였다. 이 통계가 한 경제신문에 흘러 나가는 바람에 정부는 발칵 뒤집힌다. 정부는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또 다른 위원은 "잠재적 부실까지 따지면 부실채권이 30% 안팎일 것" 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35-36)

(...)

외환은행의 부실이 그렇게 심각할 줄, 그래서 결국 감자까지 해야 할 상황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외환은행은 당시 국내 외환거래의 90퍼센트 이상을 맡고 있었다. 환거래를 위해 계약을 체결해놓은 코레스망도 세게적이었다. 기업 금융에 강했고, 인력 수준도 뛰어났다. 그만큼 외화 조달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데…….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 건 한 달 뒤인 6월 말, 은행 경영평가 뚜껑을 열고 나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외환은행의 부실여신은 10조 7,923억 원. 한 달 이상 연체돼 떼일 우려가 큰 돈이 그만큼이다. 평가를 받은 12개 은행 평균(3조 6,470억원)의 세 배. 외환은행 전체 여신의 28.6%나 됐다. 요즘 은행의 연체율이 1퍼센트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말이 안되는 수치였다. 하기야 그럴 만했다. 기업 금융을 많이 했던 게 원인이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주거래은행은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에 집중돼 있었다. 외환위기로 기업이 흔들리자 두 은행도 덩달아 부실이 커진 것이다. (140)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35-36, 140




※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은?


이번 포스팅에서 확인한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은행금융권' · '비은행금융권을 팽창시킨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와 비대칭적 규제' · '6~30대 재벌과 비재벌기업들의 대출증가로 인한 금융기관 자산구성위험도 증가' · '은행들의 고위험성 대출을 막지못한 취약한 금융감독 기능' 등을 통해서,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 문제 · 대기업군의 연쇄적인 도산이 국내은행위기(Banking Crisis)를 초래한 원인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1997년 당시의 경제위기를 '1997 외환위기' 라고 부른다.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에서도 언급했듯이, 외환위기(Currency Crisis)란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하여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증대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1997년 당시의 경제위기를 '1997 외환위기' 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 포스팅에서는 국내은행위기( Banking Crisis)가 외채위기(Debt Crisis) · 외환위기(Currency Crisis) ·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Frederic Mishkin. 1999.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강만수. 2005.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정덕구. 2008. 『외환위기 징비록』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1. 1972년 8.3 사채동결조치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참조. [본문으로]
  2. 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http://joohyeon.com/171 참조. [본문으로]
  3. 1997년 들어 문제를 초래하기 시작한 한국경제 특유의 성장방식 (기업들의 차입경영, 금융자원 동원) 은 '고성장' 이라는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에, 경제성장 과정에서 문제삼기 어려웠다. '고성장의 신화'에 가려 감춰져 있던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 특히나 '차입경영을 통한 대기업들의 외형확장'은 1997년 대기업 연쇄부도의 주요원인이 됐었다. 이에 대해서는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 대마불사에 익숙해있던 경제주체들 -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됐다고?' http://joohyeon.com/172 참조. 게다가 '금융시스템 낙후' 라는 또 다른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대기업부실'과 연결되어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본문으로]
  4. 이에 대해서는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http://joohyeon.com/172 참조. [본문으로]
  5. 이에 대해서는 밑의 파트 '※ 취약한 금융감독기능 - 대기업 연쇄도산이 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현상 방치' 에서 자세히 다룬다. [본문으로]
  6.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http://joohyeon.com/157 [본문으로]
  7.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본문으로]
  8. 1997 외환위기 원인을 탐구하는데 있어 경제학계에서는 "금융자유화 순서가 잘못" 이라는 관점과 "금융자유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금융감독체계 전반적인 문제" 라는 관점이 대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본문으로]
  9.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0. 5대 재벌의 해외차입 증가는 국내은행위기가 외환위기로 발전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 참조 [본문으로]
  11.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이 작동하던 시절 국가의 금융자원배분에 따라 (상대적으로 편하게) 영업하던 금융기관이, "금리자유화와 영업자유화"를 맞게 된다면 고위험 고수익 영업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최두열은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1998)을 통해, "금리의 자유화는 금융기관들간의 금리경쟁을 격화시켜 예대마진을 축소시켰다. 한편 업무의 자유화는 금융기관의 업무별 영역을 제거함에 따라 그 동안 진입제한에 따라 독점적 지대Rent를 보장해 주었던 금융기관의 영업기반을 취약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에 따라 금융기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성이 악화되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 │ 참고 :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본문으로]
  12.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3. 이에 대해서는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http://joohyeon.com/170 참조 [본문으로]
  14. 이종화, 이영수는 <한국기업의 부채구조-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1999) 에서 "한국에서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는 일본, 독일과 마찬가지로 매우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의 메인뱅크제도(main banking system)가 기업지배(corporate governance)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반면, 한국의 금융기관은 이러한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높은 부채비율은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관치금융, 비통화금융기관의 재벌소유, 느슨한 금융감독에 따른 '사금고화' 등의 문제에 더욱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라고 지적한다. 은행과 기업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15. 1997년 당시 정부는 ① 중앙은행의 위상 재정립 ② 금융감독기관의 통합 등 금융감독 시스템을 개혁 ③ 예금보험 체계 정비 ④ 기업 구조조정 활성화 방안 ⑤ 은행의 지배구조 개선책 등의 내용이 담긴 '금융개혁법안'을 입안하려 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 여부, 한국은행 소속이었던 은행감독원의 분리여부' 등을 둘러싸고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이 갈등을 빚으면서 1997년 11월 '금융개혁법안' 통과는 무산되고 만다. [본문으로]
  16. 은행 대차대조표상의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현상을 '대차대조표 손상 deterioration of banks' balance sheets' 라고 한다. 신흥국 은행들의 대차대조표 손상은 단순한 은행위기banking crisis와 외환위기currency crisis를 금융시장 전체가 마비된 체계적 금융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로 키우게된다. 은행들이 대차대조표 복구를 위해 대출자금을 급격히 회수하기 시작하면 기업들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게다가 국내경제의 건전성에 의심을 품은 해외자본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통화가치가 하락하여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위해 금리를 올릴 경우 은행의 부채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자본유출을 막기위한 금리인상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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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Posted at 2013. 10. 13. 02:11 | Posted in 경제학/경제성장, 생산성, 혁신


※ 비대칭적 규제 - 규제가 작은 부문으로 자원배분이 집중


보통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금융자유화가 진전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 이다. 금융시장이 발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시장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급격한 자본유출입 등이 발생해 시장전체의 불안정성을 키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융시장이 개방될수록 이에 걸맞는 "건전성 감독" 정책이 따라줘야 하는데, 1990년대 한국은 금융시장은 개방했지만 제대로 된 건전성 감독정책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은 "비대칭적인 규제 Unbalanced Regulation"을 1997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한다. 금융시장의 규제정도가 균등하지 않고 특정부문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상황에서, 규제가 작은 부문으로 자원배분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금융산업 부문간의 비대칭적인 규제라 함은 금융산업의 자금조달, 운용 및 건전성에 대한 감독에 있어서 금융산업 부문간에 규제의 정도가 균등하지 않고 일부 금융산업 부문의 특정활동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규제의 정도가 약하거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 (174)


"비대칭적인 규제가 생겨나 시행되면 가격과 규제에 대한 조정속도가 빠른 금융자산의 속성상 단기간 내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작은 부문으로 자원배분이 집중되어 이 부문이 비대화" (175)


"아시아 국가들은 경쟁제한적인 규제를 완화Deregulate하는 과정에서 은행과 비은행권Non Bank의 금융산업 부문간에 자금의 조달과 운용에 있어서 규제의 불균형이 존재하여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비은행권 부문이 외환위기 발생 이전에 비정상적으로 비대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비은행권의 비정상적인 비대화에 대해서 건전성 감독을 위한 재규제Prudential Regulation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에 따라 비은행권의 부실화를 방지하지 못하였다.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비은행 금융기관들이 부실화함에 따라 금융시스템 전체가 불안정하게 되고 이것이 외환위기 발생의 촉매를 형성하였다" (175)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74-175


그리고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이 작동하던 시절[각주:1] 국가의 금융자원배분에 따라 (상대적으로 편하게) 영업하던 금융기관이, "금리자유화와 영업자유화"를 맞게 된다면 고위험 고수익 영업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 또한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운다.


아시아 각국의 금융자유화의 내용은 주로 경쟁제한적인 규제의 완화로서 크게 금리의 자유화와 업무의 자유화로 요약된다. 금리의 자유화는 금융기관들간의 금리경쟁을 격화시켜 예대마진을 축소시켰다. 한편 업무의 자유화는 금융기관의 업무별 영역을 제거함에 따라 그 동안 진입제한에 따라 독점적 지대Rent를 보장해 주었던 금융기관의 영업기반을 취약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에 따라 금융기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성이 악화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경쟁제한적 규제완화를 통한 금융자유화와 동반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금융기관의 부실화와 이에 따른 금융시스템의 불안현상이다. 이는 그 동안 경쟁제한으로 인하여 독점적인 지대를 보장받던 기존 금융기관들이 과당경쟁으로 인하여 수익성이 악화되고, 신규 업무영역에 진입한 금융기관들이 시장점유율 제고를 위한 위험부담적인 영업High Risk and High Return과 경험축적 부족에 따라 부실화되고, 이에 따라 전체 금융시스템이 불안정해지기때문이다.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72-173




※ 1997년의 한국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비대화된 기업어음(CP) 시장


1997년 당시, 비대칭적 규제가 적용되고 금융기관들의 고위험 고수익 영업이 이루어졌던 금융부문이 기업어음(CP, Commercial Paper)이다. 서강대 국제대학원 조윤제는 1990년대 한국의 잘못된 금융자유화 순서가 기업어음 시장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은행수신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먼저 자유화되고 신탁계정의 금리자유화 폭이 컸었다. 그 결과 자금조달비용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행이 까다롭고 장기금융인 회사채시장에 대한 규제는 지속되고 기업이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는 단기금융인 기업어음 시장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었다. 따라서, 은행은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을 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회사채, 국채 등 비교적 안전한 자산보다는 기업어음 등 위험자산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즉,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시장으로 자원배분이 집중된 것이다.  


은행의 경우 장기수신금리가 자유화됨에 따라 장기수신비중이 늘었으며,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큰 CD 및 신탁계정으로 자금조달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같은 시중금리수준에 비해 평균자금조달비용이 상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자산운영도 금리가 규제된 대출보다는 금리가 자유화된 고수익자산 중심으로 운용하려 하게 되었다. 


  • 1990년 이후, 상대적으로 금리자유화 폭이 컸던 CD·금전신탁 계정으로 은행수신이 크게 증가하였다.
  •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조달비용은 증가하게 되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7-8


회사채금리의 경우도 비록 자유화되어 있었기는 했으나, 당국의 물량규제로 실질적으로 금리를 규제해왔다. 반면, 기업어음(CP)의 경우 1993년 만기 및 최저금액제한이 완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금리에 대한 행정지도도 완전철폐하였으며, 물량규제도 전혀 없어 실질적으로 거의 완전히 자유화된 금리가 되었다.


따라서 단기여신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어음이 거의 완전자유화된 반면 장기금융인 은행의 대출과 회사채금리에 대해서는 행정규제가 지속됨에 따라 개인과 금융기관의 자금운용이 CP 등 고수익단기금융자산에 크게 몰리고 대출과 회사채보유 등은 상응한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표2> 참조).


기업의 자금조달원도 이러한 단기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실제로 이들 기업부문의 자금조달의 flow측면에서 보았을때의 변화는 <표3>과 같다. 


(...)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규제완화의 일환으로 추진된 은행의 신탁자산운용에 대한 규제완화는 (1993년 10월) 신탁자산의 유가증권 보유를 크게 늘어나게 하였다. 은행의 경우 전반적으로 실질적인 금리자유화폭이 큰 신탁계정이 은행계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신탁계정의 자산운용측면에서도 신탁대출보다 유가증권 보유비중이 더 크게 늘어났다. 유가증권 보유에 있어서도 국채와 같은 무위험자산이 줄고, 주식이나 회사채 같은 장기금융보다 기업어음 등 단기채권 보유가 크게 늘어났다.



  • 1991년 이후, 은행들의 고위험 고수익 추구에 따라, 기업들도 회사채·은행대출·기업신용 보다는 기업어음(CP)에 의존해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 기업어음(CP) 증가율이 가장 높은 것을 <표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1990년, 기업들의 자금조달 중 기업어음(CP)가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불과했다.
  • 그러나 1996년, 기업어음(CP)이 차지하는 비중은 17.5%로 증가하였다.
  • 기업어음(CP)에 비해 안전자산인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1.5%에서 17.9%로 감소했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4-8

 



※ 취약한 금융감독 기능 - 기업들의 단기차입증대로 인한 채무불이행을 막지 못하다


은행들은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기업어음(CP)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기업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기업어음(CP)을 이용해 (편리하게)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1997년 이후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기업어음(CP)은 금리가 높기 때문에 기업들이 부담하는 평균차입비용이 높았다. 게다가 기업어음(CP)은 회사채에 비해 만기기간이 짧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악화되자 빠른기간에 만기가 돌아오는 기업어음(CP)을 결제하지 못하고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키운 또 다른 요인은 취약한 금융감독 기능이다. 조윤제는 "직접금융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기능의 신뢰성과 이를 위해 필요한 시장하부구조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기금융시장을 급속히 자유화하여 자금흐름의 왜곡을 증가시켰다(21)" 라고 지적한다.




감독 및 신용평가기능 등 시장의 하부구조(financial market infrastructure)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던 단기금융시장이 먼저 자유화되었다. 단기금융시장, 특히 기업어음시장은 때마침 많은 설립인가가 이루어진 종합금융회사들 간의 경쟁격화로 무분별한 할인이 확대되었으며, 이들의 이면보증에 의한 은행신탁계정 인수가 늘어남으로써 결과적으로 은행의 장기예금(엄격하게는 은행의 금전신탁)이 단기기업 어음할인에 쓰이게 되었으며, 은행의 직접적인 신용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보다 일천한 종합금융회사의 신용평가와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나라는 은행의 기능이 충분히 성숙되기도 전에 제2금융권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이에 따른 금융시장의 전반적인 기업감독기능의 취약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


직접금융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기능의 신뢰성과 이를 위해 필요한 시장하부구조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기금융시장을 급속히 자유화하여 자금흐름의 왜곡을 증가시켰다. 자금시장의 하부구조인 재벌기업들의 결합재무제표작성, 회계의 투명성, 공시제도 등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단기금융시장이 급속히 자유화 되었고, 반면 장기금융은 직간접적으로 규제되어 있어 많은 재벌기업들이 이시기에 확대한 중화학공업투자 등 장기투자를 결과적으로 2~3개월짜리 기업어음 등, 단기부채로 조달하게 함으로써 이들의 부도위험성을 높이게 되었다. 


또한 기업에 대한 금융자금 공급채널에 있어서 제1금융권으로부터 종합금융회사 등 제2금융권으로의 비중과 역할이 커지게 됨으로써 전반적인 금융감독기능이 크게 악화되었고, 또한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와 기업감독기능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어 재벌기업들의 투자에 대한 사전심사기능과 사후감독기능이 취약해지고 그 결과 금융시장이 이들의 단기차입증대에 의한 경쟁적 투자확대를 적절히 감시하고 제어하는 기능이 약해졌다. 


조윤제, 1999. "1990년대 한국의 금융자유화방식과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 <한국경제연구학회>. 19-22

 



※ 비대칭적 규제와 금융감독 기능 부재 - 금융회사의 사금고화 & 불완전판매 


금융자유화 과정에서 발생한 금융시장의 비대칭적 규제와 금융감독기능 부재는 기업어음(CP)시장 확대에 따른 기업들의 부채구조 단기화와 채무불이행 · 부도위험성 증가를 낳았다. 이것들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없었을까? 바로, 금융회사의 사금고화불완전판매 문제이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동양사태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포스팅에서도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경제관료와 재벌의 유착으로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금융산업은 단순히 자원배분기능을 하는 도구역할을 맡게되면서, 재벌로 대표되는 실물경제에 종속되는 모습을 띄었다. 1990년 이후,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금융자유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금융산업은 여전히 재벌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1997년 당시, 신동아그룹 계열사였던 대한생명은 "7개 계열사와 국내외 위장 계열사에 빌려준 돈이 2조 1,000억 원, 최순영 회장이 빼돌린 돈이 1,800억 원"에 이르렀다. 보험회사인 대한생명이 한 재벌총수-최순영 회장-의 사금고 역할을 한 것이다. 1997 외환위기 이후, 금융감독원 부위원장보를 맡았던 김기홍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Q. 1999년 3월 발표된 금융감독위원회의 대한생명 특별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자산보다 부채가 2조 9,000억 원 많았습니다. 신동아 그룹 7개 계열사와 국내외 위장 계열사에게 빌려준 돈이 2조 1,000억 원, 최순영 회장이 빼돌린 돈도 1,800 억원이 넘었지요. 당시를 돌아보며 "썩었다는 말 외엔 표현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고 하셨는데요. 처음 부실을 눈치 챈 건 언제였나요.


A. "내가 금감위 합류하기 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자 유치를 하러 다닌다기에 '외자를 도입하면 계열사 지원 절차가 번거로워질 텐데, 그래도 유치할 정도로 어려운가 싶었죠. 1999년 1월 부원장보가 되고 얼마 안 돼 메트라이프 측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순자산이 3조 4,000억 원이 모자란다'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Q. 왜 그렇게 자산을 까먹은 건가요?


A. "보험 영업으로 까먹은 돈은 없었어요. 부실 계열사에 빌려준 돈이 2조 원이 넘었지요. 최 회장이 개인적으로 빼돌린 돈도 상당 수준이었고, 대한생명은 금융회사가 재벌의 사금고화된 대표적인 케이스에요."


Q. 정부가 시간을 벌어줬다면 대한생명이 살아났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A. 자산이 15조 원도 안 되는 회사에 3조 가까이 구멍났는데 어떻게 살 수 있나. 결국 그 부실을 메꾸느라 3조 원 넘게 국민 세금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부실 금융기관이 어디 있겠어요.


이헌재. 2012. "잠깐 인터뷰". 『위기를 쏘다』. 200쪽


그리고 증권사와 투신사들은 개인고객에게 금융상품에 대한 기본구조와 원금 손실가능성 등의 정보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상품을 판매했다. 이른바 불완전판매 이다. 1997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았던 이헌재는 금융사들의 불완전판매 행태를 문제삼고, 개인고객에게 원금을 보장하라는 책임을 부담시켰다.


부담을 고스란히 금융회사에 지우기로 한 것은 맞다. 대우 채권이 섞인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가 80 퍼센트, 이를 굴린 투신사가 20퍼센트를 떠안케 했다. 


"개인투자자에게도 책임을 지워야지요." 강봉균 당시 재경부 장관도 서별관 회의에서 들고 나온 논리다. 원칙대로 하자. 말은 쉽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으랴. 그러나 당시 상황은 달랐다. 증권사 창구에선 "예금과 마찬가지"라며 수익증권을 팔았다. 금융당국도 그렇게 하도록 방치했다. 대부분 개인투자자들은 은행 예금 들듯 수익증권을 샀다. 그런 개인에 책임을 묻는다?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그뿐인가. 시장이 나빠지자 투신사들은 수익증권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렸다. 큰 기관이 가입한 펀드에서 불량 회사채를 빼서 일반인들이 많이 투자한 펀드에 집어넣었다. "대우 회사채는 없다고 해서 투자했는데 왜 대우채가 들어 있느냐"라고 항의하는 투자자들이 속출했다. 불법 편·출입, 이건 일종의 사기요 범죄다. 증권·투신사에 '원금보장'의 책임을 지운 건 그래서다.


이헌재. "투신시장의 안정(3)". 위기를 쏘다』. 217-218쪽

 



※ 2013년의 한국 - 1997년의 교훈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한국경제는 1997년의 교훈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최근의 동양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비대칭적 금융규제로 인해 자원배분이 특정부문에 집중되는 문제 

 금융감독 기능의 부실 

 금융기관의 사금고화 

 불완전판매 


문제는 여전하다. 


<조선일보>는 "CP의 최장 만기 제한이 폐지되면서, 기업들이 (규제가 있는) 회사채 대신 사실상 규제가 없는 CP로 몰리기 시작했다" 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비대칭적 금융규제의 문제로 인해 2013년 현재에도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 시장이 커져다는 것이다.


"우선 부실 금융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른 CP에 대한 통합 데이터베이스(DB)가 없다는 것이다. CP는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높은 금융이다. 이사회를 거쳐 공시해야 하는 회사채보다 느슨해서, 기업 입장에서는 대표가 결정해 공시할 필요도 없이 발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CP들이 얼마나 발행돼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어떤 금융 당국도 확인할 DB가 없다는 것이다.


(...)


CP가 널리 확산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정부가 CP의 최장 만기 제한(1년)을 폐지하면서부터다. 기업들은 공시 의무, 이사회 의결 같은 규제가 있는 회사채 대신 사실상 규제 없이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CP로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2010년 말 73조원에 불과했던 CP 발행액이 지난 5월엔 150조원으로 급증한 데는 이런 요인이 있다."


"동양 부실 CP, 中 경제 흔들었던 '그림자 금융(엄격한 감독·규제 안 받는 금융 행위)' 판박이". <조선일보>. 201310.08


실제로 동양그룹은 지난 2년 9개월간 1조 5,000억원 정도의 계열사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돌려막기' 해왔다.


지난달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한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등 3사의 CP와 회사채가 동양증권 창구를 통해 판매된 금액은 2011년 말(잔액 기준) 1조5500억원, 2012년 말 1조7100억원, 2013년 9월 29일 현재 1조3300억원이다. 지난 2년 9개월간 1조5000억원 정도의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돌려 막기'했다는 뜻이다.




"東洋 부실채권 年 1조 넘게 팔았는데… 금감원, 검사하고도 "문제없다"". <조선일보>. 2013.10.02


거기다가 금융감독 당국인 금융감독원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기업어음(CP) 시장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더러, 금융회사가 신용등급이 낮은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의 시행을 뒤로 미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금감원은 지난 3년간 동양증권을 4차례 검사하면서 매번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양증권이라는 회사의 건전성만 점검하고, 이 회사가 팔고 있는 막대한 물량의 동양그룹 계열사 CP와 회사채가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폭탄'이라는 것은 감지하지 못한 셈이다.


늑장 대응도 문제다. 금융 당국은 동양그룹 위기설이 확산되고 있던 지난 4월 금융회사가 신용등급이 낮은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6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면서 오는 26일부터 시행되도록 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대량으로 판매하는 동양증권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규제라 '동양증권법'이라고 불렸지만, 시행되기도 전에 동양그룹은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투자자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


금융 당국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문제다. 위험도가 높은 동양그룹 CP와 회사채를 산 개인 투자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애당초 당국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금감원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회사채는 증권신고서를 사전에 내고 공시해야 하는 등의 규제 절차가 있지만, CP는 기업이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어 당국이 어쩔 수 없다"면서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이 자본잠식 상태인 것은 전부 공시가 돼 있는데도 투자를 한 개인 투자자들이 이제 와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 당국은 금융회사 등 기관투자자들에게는 "투기 등급의 CP를 아예 보유할 수 없다"는 내용의 내규를 만들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감독권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하지 못하게 하면서,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위험하다'는 신호조차 제대로 보내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부에서는 금감원이 동양증권 관련 정보를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동양증권은 지난 2001년 동양현대종금과 합병해서 만들어졌고, 지난 2011년 11월 종금사 라이선스를 반납했다. 이후 원금이 보장되는 '종금형 CMA(자산관리계좌)'를 판매할 수 없게 됐다. 동양증권은 "종금사 영업이 끝났으니 투자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고지를 기존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금감원은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東洋 부실채권 年 1조 넘게 팔았는데… 금감원, 검사하고도 "문제없다"". <조선일보>. 2013.10.02


신용평가사들 또한 "자본잠식 상태인 동양 계열사에도 채무 상환 능력이 인정되는 B등급을 주고 있었는가 하면, 줄곧 우량 등급을 주다가 법정관리 한 달 전부터 무려 5단계를 초스피드로 떨어뜨렸다."


1999년 대우그룹의 회사채 파동 이후 최대 규모인 4만여명의 기업어음(CP) 피해자를 쏟아낸 '동양 부실 CP 쇼크'의 배후엔 부실한 신용평가 기능이 한몫을 하고 있다. 신용평가만 제대로 했더라도 부실 CP 발행이 불가능했고, 그랬다면 피해자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번 '동양그룹 사태'에서 신용평가사들은 자본잠식 상태인 동양 계열사에도 채무 상환 능력이 인정되는 B등급을 주고 있었는가 하면, 줄곧 우량 등급을 주다가 법정관리 한 달 전부터 무려 5단계를 초스피드로 떨어뜨렸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하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A3(상환능력 양호 등급·2012년 1월)→A3-(2013년 1~8월)→B+(상환능력 인정 등급·2013년 8월 29일)→B-(2013년 9월 27일)→D(채무불이행 등급·2013년 10월 1일)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2개 신용평가기관이 지난 1일 법정관리 신청을 한 동양시멘트에 대해 최근 2년간 내려온 신용등급의 변화 추이다.


'믿고 투자해도 좋다'는 등급(A)이 법정관리 신청 불과 한 달 전인 8월 29일부터 무려 5등급이나 초스피드로 급락해 D(채무불이행)등급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 입장에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신평사인 한국신용평가는 동양 계열사에 대해 평가를 중단했거나 하지 않아왔다.


현재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동양시멘트 CP 발행 금액만도 358억원.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될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법정관리 돌입 석 달여 전부터 (주)동양이 집중적으로 1500억원대 이상 발행한 CP(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는 동양시멘트의 '건전성'을 담보로 발행된 것이다. 에프엔 자산평가의 최원석 대표는 "'엉터리 뒷북 신용평가'만 없었더라도 동양 계열사들이 부실 CP를 마음대로 발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평가社들, 동양시멘트 우량등급 주다 법정관리 신청 직전 5단계 내려". <조선일보>. 2013.10.07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 시장이 팽창하고 금융감독 당국과 신용평가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동양그룹의 금융계열사인 동양파이낸셜대부와 동양자산운용은 사금고로 악용되었다. ""㈜동양이 자본잠식 상태인 동양레저 등에 직접 돈을 빌려주면 곧바로 '배임'에 해당할 수 있어, 중간에 동양파이낸셜대부를 집어넣어 계열사 간 돈을 돌린 것" 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CP 외에도 대여금, 일반대출 등의 형식으로 동양파워, 동양인터내셔널, 동양레저, 티와이머니대부, 동양생명 등 계열사로부터 1조4999억원의 자금이 동양파이낸셜대부로 들어갔다가 1조5443억원이 계열사들로 다시 빠져나갔다." 


그리고 "동양자산운용은 지난 2010년 1~3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이 발행한 회사채와 CP를 법정 한도(자기자본 대비 계열사 투자 비율)보다 31억원이나 초과해서 사들였다." "다른 자산운용사들이 기피하는 투기등급의 동양 계열사에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도의 투자를 한 것이다." 



'동양그룹 부실 기업어음(CP) 쇼크' 사태는 금융 계열사를 사(私)금고화해 계열 부실기업 자금줄로 이용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오너 일가가 그룹을 살리기 위해 고객이 금융사에 맡긴 돈을 맘대로 이용하는 바람에 막대한 개인 피해자를 양산했다.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동양그룹은 동양증권뿐만 아니라 계열 대부 회사인 동양파이낸셜대부도 부실 계열사 지원에 동원했다. 동양파이낸셜대부는 지난 9월 ㈜동양과 동양시멘트에 CP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각각 350억, 100억원을 빌렸다. 동양파이낸셜대부는 이 돈을 포함해 각각 420억원, 290억원을 같은 달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에 빌려줬다. 당시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은 완전 자본잠식 상태였다. 시중에서는 도저히 돈을 빌리기 어려운 부실 회사들이 계열 금융회사인 동양파이낸셜대부를 통해 재무 상태를 고려했을 때 상상하기 어려운 연 6.5~9.3%대의 저리로 대출을 받아낸 것이다.


(...)


◇부실 계열사 지원에 금융 계열사 총동원


동양자산운용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동양자산운용은 지난 2010년 1~3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이 발행한 회사채와 CP를 법정 한도(자기자본 대비 계열사 투자 비율)보다 31억원이나 초과해서 사들였다가 금감원으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 그 뒤로 동양자산운용의 40여개 펀드는 법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동양그룹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법에서 허용하는 한도인 462억원어치까지 꽉 채워서 지난 3월까지 보유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자산운용사들이 기피하는 투기등급의 동양 계열사에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도의 투자를 한 것이다.


"동양, 대부업체(동양파이낸셜대부) 동원해 부실 계열사 지원… 私금고 된 대기업 금융사". <조선일보>. 2013.10.09




동양그룹 계열 대부업체인 동양파이낸셜대부는 사흘에 한 번꼴로 CP를 발행해 계열사 자금 지원 통로를 하면서 정작 서민대출은 모두 합쳐 수십억원에 불과해 본말이 전도된 영업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업체가 진입 요건도 느슨하고 관리감독도 소홀하다는 점을 이용해 '대부업' 간판만 걸어둔 채 대기업의 'CP 공장' 역할을 한 것이다.


탁결제원에 따르면 동양파이낸셜대부는 지난해 4월부터 올 9월까지 1년 6개월간 사흘에 한 번꼴로 총 5058억원어치의 CP를 발행했다. CP를 하루에 7번 발행한 날도 있었고, 만기 5~7일짜리 초단기 CP도 상당수 있었다.


금액도 최소 1억원에서 최대 80억원까지 다양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동양파이낸셜대부가 발행한 CP는 시중으로는 유통되지 않고 전량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계열사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 등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됐다. 금감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CP 외에도 대여금, 일반대출 등의 형식으로 동양파워, 동양인터내셔널, 동양레저, 티와이머니대부, 동양생명 등 계열사로부터 1조4999억원의 자금이 동양파이낸셜대부로 들어갔다가 1조5443억원이 계열사들로 다시 빠져나갔다. 올 들어서도 2분기까지 동양파이낸셜대부는 동양인터내셔널과 동양레저에 각각 1300억원, 1800억원을 빌려줬다.

"東洋대부(동양파이낸셜대부), 부실 계열사엔 1兆(2012년 4월부터) 서민엔 수십억 대출". <조선일보>. 2013.10.10


법정관리를 신청한 동양·동양레저·동양인터내셔널 등 3개사는 동양증권을 통해 1조 3,311억원 규모의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판매했는데, 이 중 99% 이상인 1조 2,294억원이 개인 투자자들에게 판매되었다. 문제는 동양증권이 이렇게 발행된 동양그룹의 기업어음(CP)을 개인투자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도 알리지 않고 판매하였다는 것이다.[각주:2] 



이날 법정관리 신청을 한 3개사가 발행한 회사채와 CP는 총 1조9334억원어치(예탁결제원 기준)이다. 대략 4만여명 이상의 개인에게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3개사가 회생하지 못하면 모두 손실처리될 수 있다. 재계서열 47위(공기업 포함)인 동양그룹 법정 관리가 큰 파장을 낳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금융권 차입금보다 회사채와 CP 발행을 통해 시장에서 조달한 금액이 더 큰 만큼, 피해의 상당 부분이 개인 투자자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대우 회사채 파동 이후 가장 대규모의 회사채 파동이란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실제 이날 금감원 발표에서도 이런 우려는 확인되고 있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3개 계열사의 회사채와 CP 중 동양증권이 판매한 규모만도 4만1231명에게, 1조 3311억원어치다. 이 중 개인에게 팔린 것은 4만937명에게, 1조2294억원어치다. 99% 이상이 개미 투자자들에게 팔린 것이다. 이처럼 개인에게 집중된 이유가 있다. 회사채와 CP를 발행할 당시 동양그룹의 신용등급은 투자부적격 등급인 'BB'급이었다. 기관투자가는 동양그룹의 채권을 사실상 살 수 없었다. 또 동양증권은 부실 징후가 보이는 계열사가 발행한 CP와 회사채를 7~8% 후반대의 고금리를 내세워 상대적으로 정보에 어둡고 고수익을 노리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동양 채권(동양증권이 판매한 회사채·기업어음)에 개인투자자 4만명 물려… 大宇사태(1999년) 후 최대". <조선일보>. 2013.10.01


㈜동양·동양레저·동양인터내셔널 등 동양그룹 주요 계열사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CP·회사채 불완전 판매 문제가 또 불거지고 있다. 불완전 판매는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비롯해 LIG그룹과 웅진그룹, STX그룹 등 각종 부실 금융 사태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고 있다. 불완전 판매란 금융회사가 상품의 기본 구조와 원금 손실 가능성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행위이다.


지난 7월 동양그룹 CP에 6000만원을 투자한 김모(48)씨는 "증권사 직원으로부터 권유 전화를 받고 '창구에 갈 시간이 없다'고 했더니 가입 신청서를 우편으로 보내왔다"며 "신청서에 사인할 5곳이 형광펜으로 표시돼 있었다"고 했다.


본인과 부인·아들 명의로 2억3000만원어치 CP·회사채에 가입한 윤모(66)씨는 "8월 만기 연장 때 불안해서 물어봤더니 직원이 '그룹이 동양매직 매각을 추진 중인데 사려는 기업이 많다. 동양시멘트의 발전소 부지를 팔면 그룹이 정상화된다'고 해서 그 말을 믿었다"고 말했다.


(...)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상반기 3만8661건이었던 금융권 민원은 올 상반기 4만2582건으로 10.1% 늘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불완전 판매 및 부당 권유 관련 민원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권회사 중에서는 동양증권이 지난해와 올 상반기 모두 민원 건수 1위를 차지했다. 금감원 소비자보호처는 "동양증권은 회사채와 신탁 상품 판매 시 위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민원이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CP위험 제대로 설명 않고 "사도 된다"… 동양증권, 금융 민원 1위(지난해~올 상반기)". <조선일보>. 2013.10.13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무엇이 다를까? 1997 외환위기 이후 은행·증권·보험 시장을 종합적으로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이 설립되고 기업의 회계공시 제도도 자리잡았지만, 최근의 동양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1997년의 교훈은 잊은 듯하다.  





  1.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2013.08.20 http://joohyeon.com/157 [본문으로]
  2. 물론, 아무런 금융지식이 없는 개인투자자가 위험도가 큰 기업어음(CP)에 거액의 돈을 투자한 것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개인투자자 90%가 자신이 가입한 펀드의 이름도 모른다고 한다.;;; "개미 투자자 10명 중 9명, 가입한 펀드 이름도 모른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07/2013100704011.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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