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②]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외환위기 ②]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Posted at 2013.10.27 20:14 | Posted in 경제학/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 1997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기업들의 '차입을 통한 외형확장'


앞선 포스팅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1997년 한국경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고평가된 원화가치 ·  1996년 -229억 달러, GDP 대비 -4.75%에 달하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거시경제의 긴장도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가 발생하고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떠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국제채권은행의 채권인출사태'를 촉발시켰는지를 살펴보자.


1997 한국의 외환위기의 시작일자는 태국 외환위기가 시작된 7월 · 원화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한 10월말 · 대규모 국제채권인출 사태가 벌어진 11월 ·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11월 21일 등으로 각각 잡을 수 있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하는 건 1997년 1월 23일에 발생한 "한보그룹의 부도사태"이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7월에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경제위기는 그보다 앞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초반부터 연쇄도산한 대기업군을 살펴보면, 1월에 한보그룹(10위)[각주:1] · 4월에 삼미그룹(26위), 진로그룹(19위) · 5월에 대농그룹(44위), 한신공영그룹(58위) · 7월 기아그룹(8위) · 10월 쌍방울그룹(55위), 태영정밀그룹(81위) · 11월 해태그룹(24위), 뉴코아그룹(27위) · 12월 한라그룹(13위) 등이다. 


따라서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분석은 1997년 초부터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면 1997년초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대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주요원인으로는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한 기업 현금흐름의 이상 · 과잉투자로 인한 현금지출 증가 그리고 기업의 차입경영 이라는 한국경제 구조적문제 · 과도한 부채와 높은 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증가 · 단기어음을 통한 자금조달 등을 꼽을 수 있다. 




※ 1996년부터 악화된 수익률 - 원화가치 고평가와 과잉투자가 초래한 문제


수출주도형 제조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경제 특성상, 원화가치 고평가는 기업의 현금수입을 감소시킨다. 문제는 수출감소로 인하여 기업의 현금수입의 흐름이 감소되고 있는 반면, 기업의 현금지출 요인은 설비투자의 증가로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다. 현금수입은 줄어드는데 현금지출을 증가하니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당연히 악화되었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6 >


위에 첨부한 '<표 5-28> 제조업 현금흐름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출둔화로 인한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3.0% 감소한 반면, 투자활동 현금유출 증가(16% 증가)로 인해 투자활동 현금흐름은 -11.5% 감소했다. 그 결과, 1996년 제조업의 현금은 전년도에 비해 -75.1%나 감소했다. 그렇다면 이제 1996 당시 얼마만큼의 과잉투자가 발생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2 >    


1996년 당시 기업의 현금지출을 증대시킨건 기업의 과잉투자였다. 위에 첨부한 '<표 5-26 한국의 설비투자 및 생산능력 관련지표'를 살펴보면, 제조업의 설비투자는 1980년대 후반 GDP 대비 12%~13% 수준에서 19960년대 전반기 15%~16%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1996년도에 16.78%로서 정점에 달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설비투자가 증가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그 동안 과점상태에서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던 많은 업종에서 규제완화와 함께 새로운 진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산업으로는 자동차, 반도체, 철강, 항공, 석유화학 등의 분야였는데 새로 진입한 기업들에 의한 신규투자 외에 신규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기존업체들의 증설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과도한 설비투자가 이루어졌다.[각주:2] [각주:3] [각주:4]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    


특히나 철강산업의 경우 1993년~199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과잉투자가 발생했는데, 1997년 1월 부도처리된 한보철강의 경우 3년 사이 7,440억원의 투자비용이 지출되었다. 당시 한보그룹의 자산규모가 약 5조원 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짧은 기간동안 엄청난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4 >    


그 결과, '<표 5-27> 제조업 경영분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제조업은 1996년 수익성과 재무구조 측면에서 지난 9년간 최악의 성과를 거두었다. 1996년 매출액 증가율은 10.3%로 1995년에 비해 반토막이 났고,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6.5%를 기록하였다.




※ 문어발식 확장과 차입경영을 통한 재벌들의 몸집불리기 행태 - 한국경제의 구조적문제


무엇보다 당시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분별한 차입경영 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에서도 살펴봤듯이, 한국은 "기업이 독재정권에 정치자금을 대주고 독재정권은 대출을 통해 기업을 밀어주는 과정" 이라는 정경유착을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권에 계속 접촉하기 위해서는 '기업규모 Firm Size'가 커야한다. 기업들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규모 늘리기'에 열중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규모늘리기의 결과는 높은 부채비율로 나타난다.


< 출처 :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4-5 >


또한,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에서도 보았듯이, 기업이 부실에 빠지더라도 국가는 사채동결 · 공적자금 투입 등을 통해 기업들을 구제해줌으로써 대마불사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대마불사의 환경속에서 기업들은 주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왔기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위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risk-free 경제가 한국경제의 모습이었다.     


박종규, 조윤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2002) 논문을 통해 이러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편 우리 기업의 경영행태는, 특히 재벌기업들이 그러하였지만, 수익 극대화보다는 외형확대에 치중해왔다. 대마불사의 환경에서 기업의 자금조달은 담보대출에 많이 의존하였으므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식 및 채권시장 등 자본시장의 미발달로 자본시장이 기업의 수익증대를 독려할 인센티브가 없었으며, 기업회계의 불투명성과 기업정리, 인수·합병 관련 제도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회사가 어려워도 외부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진다 해도 주가하락으로 인한 경영상의 위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국 과거의 우리경제는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한, 위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risk-free 경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은 회사채 보유를 국채보유보다 선호해 왔다. 이는 금융기관들이 국제금리가 다른 채권금리에 비해 너무 낮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은행보증 회사채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가증권이 국채와 다름없이 안전하다고 여겼으므로 구태여 국채라는 안전자산을 따로 보유해야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사채는, 그것을 발행한 기업의 자산규모가 충분히 크다면, 대부분 안전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자산규모가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이 기업의 순위를 결정짓는 기준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산규모에 따라 기업들이 "계층화" 또는 "신분화"되어 대규모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시중 자금은 물론 우수 인력과 기술을 거의 독점 할 수 있었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계층화가 그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았듯이 자산규모에 따른 기업의 계층화로 인하여 우리경제의 활력도 점차로 상실되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14-15


<출처 :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18-25 > 


< 출처 :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5 >


실제로 한국기업들의 부채비율을 살펴보면, 1997년 말 현재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911조 원으로 GDP대비 1.9배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제조업의 부채/자본비율은 396.3%로서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인 대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4대 재벌의 평균부채비율 295%도 엄청난 규모지만 11위-30위 재벌들의 평균부채비율은 503.85%에 육박한다.


또한, 위에 첨부한 '<그림1 부채-자산비율(Leverage)과 총자산이익률(ROA)>'을 보면, 1989년을 기점으로 한국기업들의 전체부채비율(debt/asset)[각주:5] [각주:6]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게다가 앞서 논의했듯이, 기업들의 수익성악화로 인해 총자산이익률(ROA)는 계속 하락하는데 1996년에는 -0.2%를 기록하였다.   


본 논문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1999)를 쓴 이종화, 이영수는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500%가 넘는 30대 재벌의 부채/자본비율에서 나타나듯이 재벌의 문어발식 규모확장 및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아졌으며, 중복투자로 투자수익률이 계속 하락하였다는 점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가 외환위기 및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이러한 위기를 겪게 된 배경이 무엇 때문인가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구들은 한국경제에서 고도성장을 위한 관치금융, 그리고 이에 따른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가 기업의 과잉투자 및 금융부실을 가져왔으며, 이것이 현재 위기의 근본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부실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구제관행이 재벌그룹에게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으며, 이것이 투자사업의 위험과 수익률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차입에 의존한 규모확장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가 재벌그룹의 부채비율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게된 배경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911조 원으로 GDP대비 1.9배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제조업의 부채/자본비율은 396.3%로서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인 대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자본축적이 미미하고, 고도성장을 추진하고 있는 경제에서 기업의 부채비율으 높을 수 있으며, 또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가 밀접한 한국경제에서 부채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당연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500%가 넘는 30대 재벌의 부채/자본비율에서 나타나듯이 재벌의 문어발식 규모확장 및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아졌으며, 중복투자로 투자수익률이 계속 하락하였다는 점이다.


방만한 차입경영에 따른 높은 부채비율은 한국경제가 외생적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되었음을 최근의 금융위기가 입증하고 있다. 우선 해외부채(foreign debt)가 많은 기업은 급격한 환율상으로 큰 손실[각주:7]을 입게 되었고, 이것은 기업도산과 금융부실을 초래하였다. 


또한,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은 경기침체 및 금융경색가 같은 경제여건 악화에 대해 쉽게 대처하지 못한 것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외환시장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급격한 이자율상승은 기업 자본조달비용의 급상승을 가져와 많은 기업이 도산하게 되는 유동성 위기(liquidity crisis)[각주:8]를 겪게 되었다.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2


1997 외환위기 발생 이후, 경제위기를 수습하고 한국경제 구조개혁을 담당했던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기업들의 과도한 차입경영을 방지하기 위해 '부채비율 200% 미만' 유지를 기업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기업들은 일제히 "부채비율 200%는 못 맞추겠다" 라고 아우성 이었다. 그 동안 경제성장을 달성해오면서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해진 기업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부채비율 200퍼센트[각주:9]는) 1998년 4월,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취임하며 던진 기업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내년 말까지 부채비율이 200퍼센트를 넘는 기업은 도태될 겁니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나는 재벌 개혁을 두고 '야생마 길들이기' 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야생마를 길들이겠다고 처음부터 올라타면 다친다. 울타리를 쳐놓고 조금씩 좁혀가며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 부채비율 200퍼센트는 재벌을 옭아매는 담 중 하나였다.


200퍼센트, 사실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나온 기준은 아니었다. 해외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을 검토해 정했다. 당시미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10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일본이 150~200퍼센트 사이였다. 200퍼센트,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이미 시장의 법칙이 돼서 그렇다. 지금 부채비율이 300퍼센트쯤 되는 기업이 있다 치자. 모두 '불량 기업' 이라고 인식한다. 주가가 떨어지고 추가 대출이 막힌다. 이것이 시장의 감시다.


그땐 아니었다.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518퍼센트였다. 1000퍼센트를 넘나드는 회사도 있었다. 그걸 확 끌어내리라니 자연히 반발이 심했다. 대기업들이 대놓고 "우린 못 한다"고 나왔다. 4~5년 말미를 주면 몰라도 2년 안에는 절대 200퍼센트를 못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다. 금감위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다. 나는 아예 기업인들은 만나질 않았다.


그러니 은행에 호소했다. 금감위가 각 그룹에 "5월 초까지 주거래 은행에 제출하라"고 지시한 재무약정 자료, 15대 그룹은 일제히 "부채비율 200퍼센트는 못 맞추겠다"는 자료를 냈다. 어떤 그룹은 "건설·중장비 회사 특성상" 또 다른 그룹은 "막 인수한 회사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플레이도 잇따랐다.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부채비율이 높은 계열사를 팔거나, (그 회사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계열사를 팔면 됩니다." 나는 공개 석상에서 재벌을 압박했다. 왜 위기가 왔는가. 원칙도 두려움도 없이 성장만 쳐다보고 달려서다. 이제 그 원칙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이 장관은 "실속있는 기업 몇 개를 팔아서라도 부채비율을 맞추라"고 기업을 다그쳤다. 강 수석은 "계열사별 비율은 조정하더라도 그룹 전체가 200퍼센트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270-272    




※ 부동산가격 상승과 차입경영에 의해 지탱되던 한국경제 

- 부동산가격 하락과 높은 대출금리로 인한 금융비용의 증가


앞서 살펴봤듯이, 1996년 한국경제는 무분별한 차입경영에 둔감한 기업들이 원화가치 고평가로 인해 현금수입이 감소하고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지출은 증가해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또한 과잉투자는 단순한 현금지출증가 뿐 아니라 투자효율성을 낮추어 엄청난 규모의 부실 자산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더해 기업의 담보가치를 제공해주던 부동산 가격하락이 지속되어 기업의 재무구조는 더더욱 악화되어 갔다. 기업의 수익성은 떨어져가고 담보가치를 제공해주던 부동산가격도 하락한다? 이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달성에 큰 도움을 주었던 '기업들의 차입경영'이 문제를 초래하기 시작한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과도한 부채'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박종규, 조윤제는 "기업의 담보가치는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업손실을 자산가치의 상승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라고 지적한다.  




수익성 여부에 개의치 않는 외형확대를 위한 투자를 장기간 지속하다보니 투자 효율성은 낮아진[각주:10] 반면 자금과 인력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경제전체적으로 항상 인력과 자금이 모자라게 되어 자본수익률을 넘는 고금리, 노동생산성을 넘는 고임금이 지속되었다. 기업들은 고임금, 고금리, 고임대료에 의해 영업활동에서 손해가 났으나 공장이나 건물 등의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자산가치를 증식하고 이를 담보로 더 많은 대출을 받아 다시 공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산 수익율은 더 떨어져 경제의 불균형 상태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투자를 확대하면 할수록 실제 영업손실은 더 깊어지는 상황이 오래 지속된 결과가 바로 위기 이전 우리경제가 안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부실 자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개발 이후 계속되던 부동산 가격 상승세는 1991년 하반기 들어 소폭이나마 하락세로 반전되기 시작하였다.(<그림8>, <그림9> 참조) 즉 1991년 하반기부터는 그동안 한국경제의 성장방식을 유지해온 가장 중요한 동력 중 하나이던 '부동산버블'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담보가치는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업손실을 자산가치의 상승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과거의 관행을 관성적으로 유지하여 왔으며 자금과 인력에 대한 높은 수요도 줄어들지 않음으로써 고임금과 고금리, 고임대료 등 왜곡된 상대가격 체계도 별다른 조정을 받지 않은 채 1997년말 외환 및 금융위기가 도래하기까지 지속되었다. (...)


되돌아보면, 대략 이 시점, 즉 1990년대 초부터 한국경제는 새로운 방식의 성장패턴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대략 이 시점부터 해외투자자들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이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1991년부터 해외자본의 유입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의 구조개혁을 모색했어야 했던 시점에서 정책당국이나 일반 국민들은 한국경제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over-confidence)과 함께 경제의 흐름에 대한 착시현상을 가지게 되어 스스로의 개혁보다는 오히려 '개방화시대에 대규모 해외자본유입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국경 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일류가 되기 위해 어떤 투자를 늘이고 어떻게 경쟁의 우위를 선점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였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14-17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요소투입의 증가'에서 논의했듯이 한국경제는 '요소투입의 증가', 즉 투자investment 를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해왔다. 투자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니,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 금융시장은 만성적인 자금수요가 존재했고 따라서 높은 금리수준을 유지했다. 기업의 수익성이 양호하고 부동산가격 상승이 지속됐을때는 '과도한 부채 · 높은 금리로 인한 금융비용' 이 문제시 되지 않았지만,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부동산가격 상승이 멈추자 '금융비용 증가'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금융비용의 증가는 기업의 경상이익률[각주:11] 하락을 초래했다. 1996년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1.0% 로서 1996년 중 금융비용 부담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 출처 :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4 >

  • <[표 1-1] 국가별 금리 · 임금 · 지가 및 물류비 비교>를 보면, 한국의 실질금리가 미국·일본·대만에 비해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4 >  


박종규, 조윤제는 "대출금리 수준 자체가 높을 뿐 아니라 대출규모도 막대하였기 때문에 금융비용의 부담이 매우 높았다" 라고 지적한다.    


국제금리가 5~7%일 때 국내금리는 우리기업들의 투자수익률보다 높은 수준을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예를 들어 제조업의 평균 대출금리는 1990년대 들어 11~13%, 회사채 수익률은 12~18%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대출금리 수준 자체가 높을 뿐 아니라 대출규모도 막대하였기 때문에 금융비용의 부담이 매우 높았다. 그 결과 금융비용의 매출액 대비 비중도 1990년대 제조업의 경우 6%에 가까워 기업의 총자산 영업이익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금융비용등을 차감한 총자산 경상이익률은 영업이익률에 비해 대폭 줄어들고 있었다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한국금융연구원』. 30-31




※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조달의 증가 

- 대기업 연쇄도산의 파장이 커지게 된 원인


위에 논의했던 것을 종합하여 1996년 한국경제를 이해하자면, 차입경영을 통해 몸집불리기로 성장해왔던 한국기업들이 원화가치 고평가와 과잉투자로 인해 현금흐름이 나빠진 상황에서, 부동산가격 하락과 금융비용 부담증가로 인해 재무구조가 더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런데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투자를 위한 자금조달은 필요하다. 기업들은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통해 단기자금조달을 늘리기 시작한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6 >  


'<표 5-28> 제조업 현금흐름표'를 살펴보면, 1996년 단기차입금은 전년대비 43.9%나 증가했고, 회사채를 통한 현금유입도 전년대비 43.8%나 증가했다. 즉, 1996년 중에 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어 영업활동에 필요한 현금이 부족해진 데다가 투자활동에 소요되는 현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주로 단기차입금 및 회사채 발행에 의하여 현금을 유입하였기 때문이다.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0 >      


'<표 5-33> 기업의 자금조달 내역 추이'를 보면 기업 자금조달 구조의 악화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996년 기업의 자금조달에서 은행 등을 통한 간접금융이 아니라, 기업어음 · 회사채 발행을 통한 간접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였다. 설비투자 증가로 인한 현금유출의 증가와 원화 고평가 및 시장개방 등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기업 자금조달 구조의 악화로 나타난 것이다. 


기업어음 · 회사채 등은 은행대출보다 금리가 높기 때문에 기업들에 있어 높은 금리부담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기업의 자금조달 구조 중 기업어음에 의한 조달비중이 상승하였다는 것은 조달자금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1997년 초반부터 대기업군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각주:12]


<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4 >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대다수 자금을 종금사 등의 제2금융권을 통해 조달하였다는 것이다. 위에 첨부된 '<표 5-34> 금융권별 10대 부실기업 여신현황'을 살펴보면 1997년 부도처리된 10대 기업들의 여신 상당수가 종금사 등의 제2금융권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93-94 > 


이들 제2금융권의 무담보 기업어음에 의한 여신은 단기일 뿐만 아니라 담보에 바탕을 두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을 경우 갑작스런 여신회수에 돌입하므로 부도가 급증하게 된다. 위에 첨부한 '<표 19> 부도 대기업규모군의 차입금 현황'을 보면, 1996년에 비해 1997년 어음차입금 규모가 급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부실대기업군에 대해 제2금융권이 갑작스런 여신회수를 시행했음을 나타낸다. 기업어음에 의한 자금조달의 문제 만기구조가 단기일 뿐만 아니라 여신회수가 즉각적이라는 점이 1997년 초반부터 발생한 대기업군의 연쇄적 도산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될 수 있다.[각주:13]




※ 대마불사에 익숙해있던 경제주체들 

-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됐다고?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과 위에서도 논의했듯이, 그동안 한국경제는 기업의 부실이 생겼을때 부채를 탕감해주거나 공적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왔다. 대기업이 부도처리 되는 것에 익숙치 않았던 상황이다.


그런데 1997년 초반, 수익성 악화 · 과잉투자 · 차입경영 · 제2금융권을 통해 조달한 단기차입금이 문제가 되어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되었다. 당시 한보그룹의 자산은 약 5조원인 반면 총부채는 6.6조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막대한 부실규모는 우리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이 되었고 1997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더 큰 문제는 해외자본들에게도 한국 대기업의 부실처리가 익숙치 않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기업의 부실이 발생할 경우 정부주도로 처리가 됐었기 때문에 해외자본들은 손실을 전혀 부담해 오지 않았었다. 해외 자본들은 비단 한보그룹과 연관된 금융기관 · 기업들 뿐 아니라 한국경제 전체의 건전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인) 이규성은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보의 부도는 해외자본에도 큰 충격이었다. 이에 더하여 은행도 부도 처리될 수 있다고 청와대 당국자의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자 충격은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은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부실이 발생할 경우 시장에 의하여 부도처리되기보다는 정부주도로 정리해왔으며, 이 때 해외자본들은 손실을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


이러한 보도가 있은 후 일본에서는 몇몇 한국계 은행의 현지지점들이 일본계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단기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수습에 나선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2월 초에 한국계 은행의 해외지점에 대한 지불능력을 책임지겠다고 언론에 발표[각주:14]하기도 하였다.


해외 자본들은 비단 한보에 대출한 금융기관이나 한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전반에 걸쳐 건전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1997. 2월 초에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가 한국의 경제 위기감 고조라는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 등 외국 신문들이 한국의 금융위기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무디스(Moody's)는 1997. 2. 20일 한보에 대한 거액대출로 금융부실이 가시화된 조홍· 제일 · 외환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하향조정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은 국내금융시장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제 한보그룹의 협력업체 뿐만 아니라 일반 중소기업들까지 자금조달을 어렵게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금융기관들은 부실을 우려하여 기업대출에 소극적이고 경직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이에 더하여 3. 19일에 발생한 삼미그룹의 부도는 국내외 금융기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7-8


이규성은 뒤늦게나마 "왜 한국경제가 차입경영 · 대마불사 등의 구조적문제를 개혁하지 못했는지"를 돌아본다. 차입경영과 대마불사는 한국경제의 고성장을 이끈 방식이기도 했는데, 바로 이러한 '고성장의 혜택'에 가려 문제를 개혁하지 못했다[각주:15]고 반성한다.


놀랍게도 1970~80년대에 추진하였던 기업 및 금융개혁정책을 보면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과 내용이 거의 같은 것들이었다. 정부가 이처럼 일찍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경제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여기에는 첫째로 당시의 우리 사회가 고성장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 1970~80년대의 정권들은 정권창출 과정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좋은 치적이 필요하였으며 고성장은 가시적 성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좋은 표적이었다.


재벌들의 입장에서는 파산의 위험만 정경유착을 통하여 해결하면 차입에 의한 외형확장은 더 없는 부의 축적방법이었다. 근로자들에게는 고성장에 의한 일자리 마련이 가장 중요한 복지정책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업구조개혁의 당위성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고성장의 신화속에 매몰되었다. 결국 기업구조 개혁은 기업의 부실이 사회적으로 큰 과제로 떠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정책으로 전락하였다. (...)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고성장을 선호하고 시장제도의 미확립으로 인하여 재벌 중심의 경제시스템이 성장추구에 효율성을 갖는 상황에서는 기업구조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79-81




※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을 읽고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대기업들의 차입경영과 대마불사 신화는 그동안 한국경제 성장과정의 산물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대기업들이 제2금융권을 통해 단기자금 조달을 늘리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한국경제 특유의 성장과정이 금융시스템의 미발전과 제2금융권 발달이라는 문제도 낳긴 했지만, 적어도 1990년대 들어서는 금융시장 건전성 감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제2금융권을 통한 자금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② 기업어음(CP) 등을 이용한 단기자금 조달이 용이해진 배경은 무엇일까? ③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 증가로 금융시스템 내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금융감독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음 포스팅에서는 '경제성장과정에서 비은행금융권이 발달한 한국 금융시장' · '잘못 적용된 금융자유화 순서' · '비대칭적 규제로 인해 제2금융권을 통한 단기자금 조달의 증가' · '금융감독 시스템의 미흡' 등등 1997년 당시 한국 금융시스템이 가졌던 구조적문제에 대해 다루겠다.



 

<2편 참고자료>


1편 - 1997년 한국 거시경제의 긴장도를 높인 요인 - 고평가된 원화가치와 경상수지 적자. 2013.10.23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2013.08.18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2013.08.20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2013.10.18


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2013.10.25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2013.10.13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박종규, 조윤제. 2002.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 : 위기 이전과 이후'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1. 대기업 군의 서열은 1996년도 금융, 보험업을 제외한 기업집단의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출처는 최두열. 2002. "비대칭적 기업금융 규제와 외환위기". 한국경제연구원. 88 [본문으로]
  2.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본문으로]
  3. 자동차산업의 경우는 기존의 현대, 대우, 기아 외에 삼성자동차의 진입이 1994년 말 허용되어 1995년부터 설비투자에 들어갔다. 석유화학의 경우 1990년 이후 투자가 전면 자유화됨에 따라 기존의 업체들뿐만 아니라 신규업체들도 대규모 신․증설 투자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품목의 공급과잉과 업체간 과당경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1992년 3월「석유화학공업 수습 안정대책」을 수립하여 다시금 시설과잉 부문에 대한 신규투자 억제를 실시하였다. 항공산업의 경우는 1993년 7월 신경제 5개년계획에 중형항공기 개발계획이 반영된 이후 설비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철강의 경우도 한보철강을 비롯한 각사가 설비의 증설투자에 들어갔다.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193 주석 108 [본문으로]
  4. 이러한 중복과잉투자는 김대중정부가 '빅딜'정책을 시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5. 저자인 이종화, 이영수는 "일반적으로 부채비율은 총부채/총자기자본으로 정의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부채비율을 총부채/총자산의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헥 총부채/총자산의 비율로 부채비율을 정의하여 사용한 이유는 총부채/총자기자본으로 정의하여 사용하는 경우 '자본잠식' 기업의 경우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잠식' 기업은 전체분석기업 중 3%에 해당하나, 이 중에는 총부채/총자기자본이 -40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업도 포함되어 있어 평균값을 구하거나 회귀분석을 하는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잠식' 기업 역시 분석자료에 포함시키기 위해 총부채/총자산을 부채비율로 정의하여 사용하였다." 라고 덧붙인다. │이종화, 이영수 1999. "한국기업의 부채구조 - 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 5쪽 각주 7 [본문으로]
  6. 부채비율을 산출하는 일반적인 기준인 부채/자본 비율에 비해 부채/자산 비율은 수치 자체가 절대적으로 낮은값을 기록하게 된다. 이 점을 유의하고 살펴봐야한다. [본문으로]
  7. 경제학자 Paul Krugman은 '은행부채의 상당 부분이 외화표시로 되어있을 때, 해당국 통화가치가 급락하여 은행의 대차대조표를 악화시키는 것'을 '신흥국 대차대조표 위기 Balance Sheet Crisis'라 불렀다. │ Paul Krugman. 1999. "Balance Sheets, the Transfer Problem and Financial Crises" [본문으로]
  8. 이러한 현상은 신흥국의 외환위기를 체계적 금융위기로 심화시킨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보통 금리를 올림으로써 통화가치를 상승케 하는데, 금리를 인상할 경우 은행의 부채부담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 그러나 신흥국이 금리를 올리지 않고 통화가치 하락을 방치한다면,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고 기업과 은행의 부채부담을 증가시킨다. 그 결과, 은행은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하게 되고 금융시스템 자체가 마비된다. 금융경제학 권위자인 Frederic Mishkin은 논문 "Lessons from the Asian Crisis "(1999)를 통해 "A currency crisis and the subsequent devaluation then helps trigger a full-fledged financial crisi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because of two key features of debt contracts. In emerging market countries, debt contracts both have very short duration and are often denominated in foreign currencies. These features of debt contracts generate three mechanisms through which a currency crisis in an emerging market country increases asymmetric information problems in credit markets, thereby causing a financial crisis to occur." 라고 말한다. │ 이에 대해서는 '자본흐름의 갑작스런 변동 - 고정환율제도 · 외국통화로 표기된 부채 · 대차대조표 위기' http://joohyeon.com/176 참고 [본문으로]
  9. 여기서 말하는 부채비율은 '총부채/총자기자본'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의 '※ 요소투입증가, 즉 과잉투자가 초래하는 경제적 문제들' 참조 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11. 경상이익=영업이익-이자비용 [본문으로]
  12. 2013년 현재에도 한국경제는 '기업어음(CP)을 통한 자금조달'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양사태로 바라보는 1997년 한국과 2013년 한국' http://joohyeon.com/168 참조 [본문으로]
  13. 출처 : 최두열. 1998.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200-201 [본문으로]
  14. 이러한 정부 혹은 한국은행의 지불보증은 1997년 11월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 [본문으로]
  15. 이런 인식은 1997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방식에 큰 차이를 낳는다. 1997 외환위기가 발생한 주요원인은 '한국경제 구조적 문제' 라고 주장하는 측은 "강도높은 개혁을 주장"하고, '단순한 유동성 위기' 라고 주장하는 측은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아니라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화자금을 확보하면 됐을 뿐" 라며 반박한다. '1997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입장'과 'IMF가 내건 구제금융 조건들- 긴축정책과 자본시장 개방-이 타당했느냐'에 대해서는 추후에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1. 고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기업들의 자본조달내역을 보면 1996년에 도드라지는 부분이 CP나 어음도 있지만 더욱 특징적인 부분은 해외차입이라고 보입니다. 95년 5.6%에서 96년 10.4%로 거의 5%p 높아지고 있네요. 당시 기업들이 해외차입을 어떻게 이렇게 급격히 늘릴 수 있었을까요? 해외 투자자들이 당시에는 한국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뜻일까요?
    • 2013.10.28 20:04 신고 [Edit/Del]
      바로 그 부분이 국내경제위기, 국내은행위기가 외환위기로 확산된 주요원인 입니다 !!! 이에 대해서는 4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기업들의 자본조달내역을 보면 1996년에 도드라지는 부분이 CP나 어음도 있지만 더욱 특징적인 부분은 해외차 입 이라고 보입니다. 96년 6.6%에서 96년 11.4%로 거의 6%p 높아지고 있네요. 당시 기업들이 해외차입을 어떻게 이렇게 급격히 늘릴 수 있었을까요? 해외 투자자들이 당시에는 한국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뜻일까요?
  3.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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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대한민국 주식회사 -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와 기업의 리스크 분담

Posted at 2013.10.25 00:05 | Posted in 경제학/경제성장


※ 대한민국 주식회사 Korea, Inc. - 경제발전을 위해 나아가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 살펴봤듯이, 한국경제는 국가가 금융자원을 동원 control over finance 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경제개발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금융자원을 동원한 이유[각주:1] 중 하나기업가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한국경제는 수출지향 산업화전략 export-oriented strategy 을 통해 경제발전을 꾀했었다. '수출지향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 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수출기업들에게 더 많은 금융자원을 배분함으로써 수출에 대한 인센티브를 높였다. 당연히 기업가들은 이에 반응하여 수출규모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즉, 은행국유화를 통해 금융자원을 장악한 정부는 정책금융 policy loans 을 이용하여 기업가들이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 national interests 을 위해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 한국경제 개발시기, 수출기업들은 내수기업 보다 좀 더 쉽게 금융자원이용에 접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정부는 기업가 뿐만 아니라 은행에 대한 통제도 시행하였다. 수출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는 은행에 대해서는 은행장을 호출하거나, 기업부문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경우에는 수출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리도록 지시한다. 금융의 본래 목적인 자원재분배 re-distributional 보다는 경제발전 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온 힘을 쓰게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경제개발단계의 한국은 '대한민국 주식회사 Korea, Inc.' 나 마찬가지였다. 은행은 재무부서, 산업부문은 생산·마케팅부서, 정부는 총괄기획부서 였던 것이다. 


As they shaped their initial concept of industrialization, their immediate thought was how the government could be used to mobilize funds and support industrial investment. They wanted to control the behavior of industrialists in an effort to make their economic activities conform to national interests. Consequently, they needed governance control tools; "control over finance" became the major policy instrument for effecting the decision-makers' concept of industrialization. (...) (14)


Credit policy is formulated as part of development strategy; as such, its effectiveness is determined within the overall structure of industrial and macroeconomic policy. Korea's credit policies were well coordinated with its industrial policies. Korea wanted to pursue industrialization, and it realized that, given its small domestic market but relatively well-trained human resources, it could do so only by adopting an export-oriented strategy.


Credit, industrial, and macroeconomic policies were all geared toward this goal. Compared with many other developing countries whose credit policies are oriented primarily toward re-distributional purposes (or which lack a clear focus, so that almost all sectors are targeted, which is tantamount to targeting none), Korean credit policies were sharply focused on promoting exports and provided the support necessary to enable industry to pursue this goal. (...) (15-16)


In the early 1960s, the government adopted several measures to strengthen state control over financing. In particular, it nationalized commercial banks. (...) Chaired by the president, monthly export promotion meetings and monthly briefings on economic trends constituted a forum for ministries and the private sector to monitor the progress of economic policy and to build consensus on ways to address emerging problems. (17)


This style of economic management resembled the operational mode of a corporation - in this case, Korea, Inc. Within this management partnership, banks served as the treasury unit, the industrial sector as the production and marketing units, and the government as the central planning and control unit. (18)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KDI. 14-18 (PDF 파일 기준)


It is not easy to define policy-based loans in Korea. Because all major banks were owned by the government, which also set the interest rates for bank loans substantially lower than the market rate, all bank loans could be considered policy loans. (...) (76)


These loans were usually made according to the government's assessment of the progress of specific key projects and the constraints facing specific firms or industries. The decisions were usually made in consultation between the government and business sectors, and after close monitoring of progress by the government. 


For example, when the government assessed the progress of plant constructions for the chemical industry complex and found that they were well behind schedule because the lending banks were providing insufficient support, it summoned the bank presidents and asked them for greater cooperation in supporting the project. 


Moreover, when exporters reported in the monthly export promotion meetings that the international market was slow and that they had begun accumulating inventory, the government urged bankers to extend greater working capital credit to exports. In many cases, the establishment of new credit programs was also the product of this close consultation between government and business. (77) (...)


Control over finance confers some explicit governance rights to the government over the borrowers for the entire period of loans. Credit policies allow the government to allocate subsidies flexibly, according to the performance of supported firms or industries. In turn, such control extends to refinancing decisions - whether or not existing debt should be rolled over or new debt extended, and, if so, at what conditions. 


Well-measured refinancing decisions provide incentives? : good performance can be rewarded with continued or expanded support ; or a inappropriate use of funds is punished with a reduction in or even termination of support a threat that may make the survival of firms untenable. This carrot and stick policy underlying credit programs makes them an effective tool of government industrial policy - more effective than fiscal incentives, which stem from legislative initiation and are subject to rigidity of the implementation process. (106)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KDI. 76-106  (PDF 파일 기준)




※ 정부의 지급보증 덕분에 기업가정신 entrepreneurship 이 고양된 기업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국가의 금융자원 동원 control over finance' 이 가지고 온 또다른 효과이다.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자본투입 증가에 따른 경제성장은 부채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당시 한국기업들도 경제성장과정에서 과도한 부채를 지니게 되었었다. 일반적인 경제라면 과도한 부채를 지닌 기업은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파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는 금융자원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상환촉구에 따른 기업부도는 일어나지 않았었다. 오히려 정부의 지급보증 덕분에 기업들은 "과도한 부채를 지더라도 정부가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파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위험성이 risk 큰 사업에 과감하게 뛰어들게 된다. 기업가정신 entrepreneurship 이 고양된 것이다.


그리고 기업들은 더이상 단기적인 수익에 집착하지 않고 좀 더 장기적인 관점 a long-term business perspective 에서 사업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기업들은 지금 당장의 수익에 연연하기 보다는 자산규모 극대화와 (장기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정부가 일종의 리스크 파트너 a risk partner of industrialists 역할을 맡으면서 실패에 대한 위험성 risk of failure 를 줄이는 정부-기업-은행의 공동보험체제 a government-industry-bank co-insurance scheme 가 성립된 것이다.  


The impact of credit policies on economic growth is not limited to their impact on the cost of and access to credit. In an economy such as Korea's, in which the expansion of investment was financed by bank credit and foreign loans, the financial structure of firms was highly leveraged. By controlling finance, the government could become an effective risk partner of industrialists and could motivate their risk venture and entrepreneurship. 


It could induce the industrialists to take a long-term business perspective, while a competitive financial market may have prompted firms to take a shorter-term view. In other words, by controlling financing, the government established a government-industry-bank co-insurance scheme to protect industrial firms from shocks. This indirect impact of government credit policy may also have been an important determinant of the rapid industrialization of Korea. (105) (...)


But credit policies carry their own risk - the "risk of government failure." In Korea, the government's continuous communication with business leaders and close monitoring of firms through various channels (such as monthly export promotion meetings) helped reduce its risk of failure. Moreover, by controlling the banks, the government created incentives for firms to maximize their assets and growthrather than to strive for immediate profitability. (106)-(107)


As far as they satisfied the government by expanding exports and successfully completing plants, firms ensured their continual credit support and survival. As such, the government mitigated its risk of failure by adopting a sounder, more stable investment environment. (107)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KDI. 105-107  (PDF 파일 기준)




※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경제주체들의 리스크분담 risk-sharing


그러나 정부가 금융자원을 통제하여 기업들에 대한 지급보증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만다. 과도한 부채를 보유하게 된 기업들은 내부 · 외부충격에 취약한 상태 vulnerable to internal and external shocks 였는데, 자본투입 성장 정책의 부작용[각주:2]세계경기 둔화를 맞아 기업들이 무더기로 부실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장규는 저서 『대통령의 경제학』에서 당시 한국경제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해방 이후 막대한 원조를 통해 '대한민국 만들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은 한국이 원조시대를 끝내고 차관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오히려 인색한 나라가 됐다. (...) 이런 마당에 박정희가 1962년 기업들의 상업차관 도입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는 정책을 결정한 것은 합리적 판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사업은 기업이 벌여라. 책임은 정부가 진다'는 식이었다. (...)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무리한 정책추진의 부작용이 왜 없었겠는가. 외국자본이 들어와도 공장이 지어지고 수출이 늘면서 경제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그러나 세계경기가 불황이 되면서 차관기업들은 무더기로 부실사태를 빚었다. 환율과 금리 부담 속에 기업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기업의 부실은 이들한테 물린 은행들까지 연쇄도산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는 상황으로 번져나갔다.


1969년 재무부는 83개 차관업체 중에서 45%가 부실기업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결국 청와대에 부실기업정리반이 조직돼 30개 기업을 도산시켜야 했다. 한국 수출 산업의 선구자로 존경받던 전택보의 천우사도 이때 문을 닫았다. 


이장규. 2012. 대통령의 경제학』. 144-147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결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는 상황" 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1997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정부는 4차례의 대규모 구조조정(1969년~1970년 · 1972년 · 1979년~1981년 · 1984년~1988년)을 시행하였다.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이장규가 쓴 문구처럼 "정부가 구제금융 · 사채동결 등의 방식으로 직접 금융시장에 개입함으로써 the government made these bailouts by intervening in credit markets" 기업부실문제를 해결해왔다.


이러한 기업 구조조정에서의 직접적인 정부개입은 경제주체들이 경제전체의 리스크를 분담 risk-sharing 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직접 기업의 부채를 탕감해준 8·3 사채동결조치는 기업의 부담을 채권자인 은행에게 전가시킨 정책이다. 은행의 부담은 고스란히 예금자인 국민에게 이어진다. 그렇지만 부채탕감의 혜택을 입은 기업들이 수익을 다시 내기 시작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국민들은 경제성장 · 일자리 · 임금인상 이라는 혜택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해, 경제주체들의 리스크분담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Industrial investment in Korea was financed largely by debt, especially during the period of rapid economic growth. Fiscal incentives and low interest rates allowed some firms to accumulate retained earnings, but, in the absence of well-functioning domestic equity market, huge investment requirements for rapid industrial expansion had to be financed largely with bank loans and foreign debt. During 1963~71, the debt ratio of the Korean manufacturing sector increased by more than four times, from 92 percent to 394 percent (Box 2, Table C). (107)


Even in the 1990s, Korean firms remain highly leveraged, although their debt ratio in the second half of 1980s declined somewhat with the expansion of the stock market. Consequently, Korean firms became more vulnerable to internal and external shocks. In fact, Korea could have undergone several financial crises had the government not actively become involved in risk management through credit intervention.


The government undertook major corporate bail-out exercises in 1969~70, 1972, 1979~81, and 1984~88 to ride out recessions and avoid major financial crises. In a credit-based economy, the government made these bailouts by intervening in credit markets. The government's involvement in restructuring firms and industries, and in redistributing losses make risk-sharing among the members of the economy possible. Depositors usually took the lion's share of this cost, but they were rewarded subsequently with steady economic growth, increased job opportunities and as wage earners. (...) (108)


In a credit-based economy, creditors and borrowers should share some risk, otherwise, financial crises recur with economic downturns. In Korea, the government was directly involved in risk sharing by intervening in credit markets, as such, bank credit constitutes the primary source of risk capital through government involvement. (114)


조윤제, 김준경. 1997. "Credit Policies and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KDI. 107-114  (PDF 파일 기준)




※ 재벌들의 대마불사를 초래한 정부의 지급보증과 리스크 분담


앞서 살펴본것을 정리하자면, 금융자원을 통제하고 기업운영의 보증을 선 정부는 기업의 리스크를 줄임으로써 기업가정신 entrepreneurship 을 고양시켰고 기업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을 운영하도록 도왔다. 또한 기업구조조정에 적극개입한 정부는 기업부실로 인해 생긴 리스크를 경제주체들이 분담케 함으로써 경제성장의 동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금융자원을 통제하고 기업운영의 보증을 선 정부'가 한국경제의 좋은 영향만 끼쳤을까?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에서 언급했다시피, 정부의 지급보증은 은행과 기업들의 도덕적해이와 대마불사(大馬不死, too big to fail) 문제를 초래한다.


경제개발단계에서 단순히 국가의 금고 역할을 담당하고,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국가의 지시에 의해 부담만 떠안았던 한국의 은행들[각주:3]은 기업의 경영상태를 평가하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기업의 경영상태를 평가하지 못하는 은행은 무차별적인 대출을 할 수 밖에 없다. 1997 외환위기 이후, 은행을 통한 구조조정을 추진했던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회고록 『위기를 쏘다』 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98년 2월 9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에 들어서자 좌중의 눈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 내가 이날 전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해 주십시오. 그 계획대로 구조조정을 실천해 주십시오. 결과는 시장이 평가할 것입니다."


바로, '은행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이다. DJ 정권의 재벌 다루기가 첫 단추를 끼우는 자리였다. 구조조정 계획을 받기만 하면 된다. 내용은 상관없다.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을 만들게 하는 것, 그래서 주거래 은행이 그 계획을 점검하게 하는 것, 이게 핵심이었다. 그 순간 기업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은행에 맡기게 된다. 은행을 우습게 알던 때였다. 웬만한 은행장이 대기업의 자금 담당 이사를 만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63-64) (...)


이미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시절부터 '은행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을 약속한 터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각 은행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퇴출 기업을 골라내라"고 주문했다. 국내 은행들은 그때까지 기업의 금고나 다름 없었다. 기업 신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참에 그걸 배우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부실기업 판정. 은행들은 버거워했다. 우선 부실기업 퇴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퇴출된 기업에 빌려준 돈은 모두 부실 채권이 된다. 고스란히 은행 부담이 되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 계열사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계열사라도 뒤에는 대마불사의 본사가 버티고 있다. 괜히 건드렸다가 거래가 끊길까, 본사가 부실해질까 겁을 냈다. (267)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63-64, 267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기업들, 특히나 재벌들의 대마불사이다. 경영상태가 부실해졌을때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준 것을 기억하는 재벌들은 계속해서 차입경영을 하였고 그 결과 취약한 재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재벌들의 대마불사는 1997 외환위기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1997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정부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이규성은 저서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를 통해, 재벌들의 차입경영과 취약한 재무구조가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내외적으로 지혜를 동원하여 개발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우선순위 사업을 정하고 이들 사업을 시행할 사업자를 직접 선정하여 이들에게 장기 저리융자와 세제상의 혜택을 부여하고 외자도입도 주선해 주는 등 자원도 우선적으로 배분해 주었다. 


정부와 민간이 합심하여 한국주식회사를 만들어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방식은 단순한 캐치업 단계에서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한국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개도국 경제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 이와 같이 한국 경제의 큰 얼개는 선진국에 근접하고 있지만 내실면에서는 여러 가지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내실면에서 취약성의 하나는 기업 · 금융의 재무구조가 건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


우리 기업의 재무구조가 취약한 것은 그 동안 정부주도형 개발전략의 추진과정에서 기업의 차입경영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기업의 성장은 곧 부채의 누적이었다. (...)

차입경영에 따른 재무구조의 취약성은 경기가 좋을 때에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매출이 부진해지는 등 경영여건이 악화될 때에는 차입경영은 한계에 직면하고 부실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기업들의 부실이 크게 늘어나면 이는 곧 금융부실을 초래하여 자칫 경제시스템 전체의 불안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며, 특히 거액의 부채를 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다수가 부실화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과정에서도 대규모의 기업부실이 간단없이 발생하였다. 이 때 정부는 기업의 퇴출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직접 정리해 나갔다. (...) 정부주도의 부실기업 정리는 대체로 구제금융을 제공해 주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시키는 방식이었다. (...)


한편 금융운용의 실상을 보면 경제개발 과정에서 금융은 정부의 개발계획상의 사업을 차질 없이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금융기관은 금융의 본래기능인 사업성 심사를 통한 효율적인 자원배분기능을 수행하여 수익을 올리는 영리 기관이라기보다는 정부가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자금을 공급하는 신용배급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


기업의 차입경영에 따라 자금수요는 항상 넘치게 되었으며 이는 금융기관에 대한 자금공급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금융기관은 채권확보에 중점을 두고 신용배분을 하게 되었으며, 그 기준은 담보와 대기업 여부였다. 대기업들은 부동산 담보 외에도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각주:4]에 의하여 차입능력이 강화되었다. 


금융기관들이 파산할 경우 경제 전체의 불안정을 초래하기 때문에 금융감독 당국은 부실이 크게 발생한 경우에도 퇴출시키지 않고 한국은행 특별융자를 제공하여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전에 은행이 파산한 사례는 전혀 없었다.


이와 같이 정부가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실패위험을 전적으로 안아주는 보험자 역할이 지속되자 대기업 불사(too big to fail) 및 은행불패(不敗)라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현상이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었다. 이제 금융기관들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정부가 구제해 줄 것이라는 은행불패의 믿음 아래 대기업에 대한 대출에 대해서는 위험성이 높은 경우에도 주저 없이 자금을 공급해 주었다. 


대기업들은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 망하지 않는다는 대기업 불사의 기대 아래 잘 되면 크게 벌고 안 되면 정부가 도와줄 것이라면서 고수익 · 고위험 사업을 거침 없이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바로 정경유착의 심화로 연결되었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64-67  

      

은행의 은행불패 믿음과 기업의 대마불사 믿음이 어떻게 1997 외환위기를 유발시켰는지는 다음 포스팅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참고자료>


'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2013.08.18


'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2013.08.20


이장규. 2012. 대통령의 경제학』.


이헌재. 2012. 『위기를 쏘다』.


이규성. 2006.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1. 당시 한국정부가 금융자원을 동원한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투입의 증가'를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 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2. 이에 대해서는 '금융자원 동원을 통한 경제성장→8·3 사채동결조치→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의 '※ 요소투입증가, 즉 과잉투자가 초래하는 경제적 문제들' 참고. http://joohyeon.com/169 [본문으로]
  3. 이종화, 이영수는 <한국기업의 부채구조-재벌과 비재벌 기업의 비교>(1999) 에서 "한국에서 금융과 기업 간의 관계는 일본, 독일과 마찬가지로 매우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의 메인뱅크제도(main banking system)가 기업지배(corporate governance)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반면, 한국의 금융기관은 이러한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높은 부채비율은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관치금융, 비통화금융기관의 재벌소유, 느슨한 금융감독에 따른 '사금고화' 등의 문제에 더욱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라고 지적한다. 은행과 기업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 포스팅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4. 금융감독위원장으로서 외환위기의 수습을 맡은 이헌재는 '기업구조조정 원칙'으로 '①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② 상호지급보증 해소 ③ 재무구조의 회기적 개선 ④ 핵심역량 강화' 를 내세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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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개발시대의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초래한 한국경제의 모습

Posted at 2013.08.20 21:00 | Posted in 경제학/경제성장


개발시대 Financial Repression 정책과 이로 인한 재벌의 성장을 다룬 흥미로운 논문 한편을 소개.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첫번째 그림은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이 만든 금융시장의 불균형과 그 결과 생겨난 지대Rent[각주:1] 이다.


개발시대 한국은 국가가 금융자본을 통제하여 기업대출에 직접 관여하는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을 구사했다. 경제관료 bureaucrats 들은 특정집단에 자원을 몰아주기 위하여, 금융시장의 균형보다 상당히 낮은 금리 r* 를 인위적으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금융의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초과수요" 상황이 만들어지고, 대다수 기업들은 장외시장 curb market 에서 균형금리보다 높은 r**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두번째 그림에서 나오듯이, 공식금융시장의 대출금리 Bank Loans-General-B 보다 장외시장 Curb Market-A 금리가 높았다



이때, 공식금융시장과 장외시장 간의 금리 차이 (r**-r*) x 대출금액 Total outsanding loans 을 합친 것이 지대 Rent 이다. 그 당시 발생했던 지대 Rent의 정확한 시장가치를 세번째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는 금융시장을 통제하고 금리를 낮게 설정함으로써 지대 Rent 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겨난 잉여 Surplus인 지대 Rent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국가는 "정치자금을 받는 대가"로 특정기업들에게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준다. 그 기업들은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의 혜택을 받고 성장해 나간다. 게다가 정치권에 계속 접촉하기 위해서는 "기업규모 Firm Size"가 커야한다. 기업들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규모 늘리기"에 열중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순환작용이 발생한다. 국가는 규모가 큰 기업들에게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준다. 그 기업들은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의 혜택을 받으면서 규모를 키워나간다. 이 과정에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 small- and medium-sized firms"은 금융시장에서 소외된다. 중소기업들을 위한 금융시장도 발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의 재벌들은 "높은 자산대비 부채비율 the high debt/equity ratio" 을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전까지 유지했었다.




It is well documented that the Korean government tightly controlled the financial sectors during its economic development era. Access to precious funds was limited. Firms tried to gain access to the enormous rents that would accrue to them if they received loans with low interest rates. Through repression in the financial markets, rents have been created and shared by politicians, bureaucrats and business.


Firms, bureaucrats and politicians shared these rents. The larger the firms, the more political influence they could generate. Politicians took a lot of “voluntary” donations known as “quasi-taxes” from large firms in return for cheap loans and other favors. That is, the politicians and large firms created the pie, “rent,” and shared it together.


In this case, firm size was an important advantage for rent seeking, because firm size was an important criterion for political connections with business. Large firms were preferred in allocation of funds since, given the size of funds to be allocated, the number of transactions and transaction costs in rent sharing could be reduced. 


As a result, large firms with licenses to invest in projects had a great advantage in acquiring credit allocation from financial institutions. Also, financial market for small- and medium-sized firms has been underdeveloped in Korea, as noted by Lee (1995).


Korean firms tried to expand, both to obtain cheap loan and to make them so large that the Korean government would have no choice but to keep on supplying them with funds. These in sum resulted in high debt/equity ratios of Korean firms. That is, the high debt/equity ratios of Korean firms were the consequence of the tie between the politicians and business


While this has been recognized by many scholars, (e.g. Kang(2002)), little empirical work regarding firm size and financial structure has been offered. Also, the possibility that the financial markets might be intentionally suppressed to create rents is not fully recognized. Following Kang (2002) we argue that firms with access to financial resources have benefited from the suppression in financial markets, at the expense of the firms with little access to financial resources, mostly small- and mediumsized firms. 


Our argument is consistent with Lim (2004) who finds that profitable small firms are gaining access to the credit from financial institutions after the 1997 financial crisis. In sum, the Korean financial markets were in favor of large firms at the expense of small and medium-sized firms.


이상학, 정기웅. 2010. The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Structure of Korean Firms. 4-5




①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한국의 금융시장

②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의 혜택을 받은 결과, 높은 자산대비 부채비율 the high debt/equity ratio 를 가지게 된 재벌


이 두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논문의 주제는 이것이다.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 으로 인해 "한국 금융시장의 미발전"과 "높은 부채를 가지게 된 재벌".



  1. 지대Rent 란 공급이 제한되어 있을때, 공급자가 얻는 추가적인 생산자 잉여 producer surplus 를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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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한국의 경제성장은 "부패corruption"와 "금전정치money politics" 덕분?

Posted at 2013.08.18 23:00 | Posted in 경제학/경제성장


흥미로운 논문을 한편 소개. 한국경제 성장과정에 대해 리서치 하다가 발견한 논문.


제목은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 David C. Kang (2002)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 많이 언급되는 세력은 "경제관료" Bureaucrats 들이다. 엘리트 집단인 경제관료들이 수출주도 성장을 이끌었다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Development Economics 에서는 한국을 많이 다루는데, "(관료들에 의해 수립된) 국가의 경제정책"이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실증적 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다룰 때 등장하는 경제관료들은 부패의 온상이다. "한국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정실자본주의로 인해 외환위기를 맞았다" 라는 이야기.


두 이야기를 종합하면, "한국관료들은 유능한 것일까 아니면 무능력한 것일까?"


Development Economics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는 "국가는 전도유망한 산업을 선택해 육성할 수 있고 picks winners, 국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재 public goods 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는 전제를 따른 것이다.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 의 일종.


그러나 논문의 필자는 "(그 당시 한국지배세력 등의 부패정도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경제의 성장이) 국가의 자애심 benevolence 덕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러나 한국은 (국가의 경제정책 덕분에)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국가와 기업 간의 파워게임에 따른 금전정치money politics 와 부패 corruption" 개념을 들고 오면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경제관료들에 의해)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For decades the literature on Asian development largely treated the prevalence of money politics as inconsequential or as peripheral to the “real story” of Korea: economic growth led by a developmental state composed of technocrats and austere military generals who emphasized export-oriented industrialization. Growth was so spectacular that the reality of corruption was concealed or was dismissed out of hand. 


And until late November 1997 and the stunning fall of the Korean won, observers argued that better government in Asia was a prime reason for that region’s spectacular growth.


Has corruption historically been prevalent in Korea? If so, why? How can we reconcile the view of an efficient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before 1997 with reports of massive corruption and inefficiency in that same country in 1998 and 1999?


(...)


The Korean experience suggests broader implications for the study of government–business relations in developing countries. Most important, a model of politics is central to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al state. We cannot assume benevolence on the part of the developmental state. 


A “hard” view of the developmental state—that the state is neutral, picks winners, and provides public goods because the civil service is insulated from social influences—is difficult to sustain empirically. However, even the “soft” view—that governments can have a beneficial effect however government action is attained—needs a political explanation. The Korean state was developmental—it provided public goods, fostered investment, and created infrastructure. 


But this study shows that this was not necessarily intentional. Corruption was rampant, and the Korean state intervened in the way it did because doing so was in the interests of a small group of business and political elites. Producing public goods was often the fortunate by-product of actors competing to gain the private benefits of state resources.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3-4 





필자가 제시하는 types of corruption 은 4가지.


1. 강한 국가 + 강한 기업 = 상호인질관계 Mutual hostages


2. 약한 국가 + 강한 기업 = bottom-up type. 국가에 비해 기업이 우위에 선 구조. 업이 지대추구 rent-seeking 를 위해서 관료 등을 상대로 로비를 한다. 


3. 강한 국가 + 약한 기업 = top-down type. 국가가 강한 권력을 가진 구조. 강한 권력을 가진 관료 등이 정치자금 마련 등을 위해 기업을 약탈 predatory 한다.


4. 약한 국가 + 약한 기업 = 시장원리 Laissez-faire 대로 경제가 돌아감.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2. 약한 국가 + 강한 기업" 과 "3. 강한 국가 + 약한 기업"


개발시대 한국은 독재정권이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가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Financial Repression 정책을 구사하면서 은행의 기업대출에 직접 관여하였다. 투자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은 국가의 "대출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였다. 


따라서, 기업은 독재정권에 정치자금을 대주고, 독재정권은 대출을 통해 기업을 밀어주는 양상이 나타났다. 정치자금을 많이 건네준 기업이 독재정권의 선택을 받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부패 Corruption 정도가 기업의 성장을 결정하는 상황. 실제로 선택받은 상위 10개 기업들은 Financial Repression 정책에 힘입어, 당시 한국의 은행대출 38%, 시중통화량의 43%를 지원받고 "급속히 성장"해 나갔다.


- 현대 · 삼성 등의 재벌들이 새마을운동 지원금 · 일해재단 기부금의 명목으로 정치권에 건넨 정치자금 액수


- 정치자금을 건넨 대가로 국가로부터 금융혜택을 얻은 소수의 기업들. 1964년 8월 기준, 은행대출에서 (정치권으로부터 선택받은)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38%에 달한다.


Business and political elites exchanged bribes for political favors. Politicians used these political funds to buy votes and to serve basic greed. Businessmen used the rents from cheap capital to expand as rapidly as possible, thus ensuring their continued political and economic importance. Development and money politics proceeded hand in hand.


(...)


Businessmen often called “voluntary” donations jun joseh, or “quasi-taxes." (...)The fact remained that if businessmen did not provide politicians with sufficient funds when asked, the Bank of Korea called in their loans, or they suffered a tax audit, or their subsidy application was denied.


(...)


Given the Korean state’s total control over the financial sector in the 1960s and 1970s, businesses were naturally interested in gaining access to the enormous rents that accrued to a chaebol if it received a low-interest-rate loan. The state’s inability to control firms and their growth led to endemic overcapacity. Firms rushed willy-nilly to expand at all costs, whether or not it was economically feasible. The result was that in most major sectors of the economy there was excess capacity and overlapping and duplication of efforts as each chaebol tried to be the biggest. 


Rents in the form of U.S. aid, allocation of foreign and domestic bank loans, import licenses, and other policy decisions were based on a political funds system that required donations from the capitalists. During the 1960s, the expected kickback became normalized at between 10 and 20 percent of the loan.43 Park Byung-yoon points out that as early in Park’s rule as 1964, 38 percent of total bank loans—43 percent of M1 money supply—was given to only nine chaebol, all of which had family members in powerful positions in the ruling party or in the bureaucracy (see Table 2).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10-14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이 바뀐다. 국가의 힘이 약해져 버린 것이다. 독재시대와 달리 국가가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물론, Financial Repression은 계속 됐지만, 그 사이 기업들도 크게 성장해 "재벌"이 되었다. 정치권력이 재벌들을 함부로 컨트롤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세력들이 필요한 "선거자금"은 늘어나기만 했다. 과거 독재시대에는 선거가 필요 없었는데, 이제는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사회는 "취약한 법 제도 weak legal environment"를 가지고 있었고 "인맥 personal ties" 이 많은 걸 결정했다.


이제 힘이 세진 기업들이 정치권력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정치자금을 대주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관철시키는 양상이 나타났다. 시장 바깥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대추구행위 Rent-seeking behavior 가 나타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재벌들의 성장세는 계속 됐다. 자동차, 전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출했다.


- 1987년-1997년 사이의 대통령선거 동안 지출된 정치자금


- 1987년 민주화 이후, 재벌들이 부담한 정치자금 (일종의 준조세, quasi-taxes) 이 매우 커졌음을 알 수 있다.


-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재벌들은 정치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관철 rent-seeking 시켜 나갔다. 한국의 GNP에서 현대 · 삼성 · LG· 대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높아져만 갔다. 

- 그리고 금융억압 Financial Repression의 혜택으로, 재벌들은 손쉽게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996년 재벌들의 자산대비 부채 비중 Debt/equity ratio 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the most significant change was the 1987 democratic transition. A country’s shift from authoritarian institutions to democratic ones will have different results depend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tate and business (Figure 2). In Korea, where both the state and business were strong, a shift to democratic institutions benefited business more than the state—the state was weakened by the imposition of democratic processes.


(...)


Although many assumed that globalization and liberalization would reduce rent seeking and the power of the chaebol, the opposite might very well be the caseTable 9 shows that although in 1986 the four largest chaebol added 5.7 percent to Korea’s GNP, by 1995 their share had grown to 9.3 percent of value added to GNP. Unless liberalization is matched by stringent regulatory oversight that limits collusive practices and the exercise of market power, it can provide new opportunities for large firms to buy favorable policy. While measures to rein in the chaebol are popular politically, because of government–business ties such policies were unsustainable even after 1997.


(...)


the importance of personal relationships (inmaek) in legal and corporate institutions also increased. A historically weak legal environment— and the corresponding importance of personal ties— creates an environment where the founder/chairman can control a vast array of subsidiaries while having little or no formal title to them and can evade or influence government policy.


In this fluid institutional environment, personal ties between chaebol and politicians— always important—have become even more critical to business success. The transition to democracy did not change this need. Rather, the 1990s saw expanded opportunities for personal connections, influence peddling, and a “bigger is better” mentality. Business concentration continued to increase, while cross-holding ownership remained a standard Korean business practice.


David C. Kang. 2002. "Bad Loans to Good Friends: Mone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al State in Korea". 18-25




국가가 기업을 컨트롤하든, 기업이 국가를 컨트롤하든, 그 중심에는 뇌물bribery 등의 부패corruption 와 금전정치 money politics 가 있었다. 국가와 기업은 '뇌물'을 연결고리로 서로를 지원하고 이끌어 나간 것이다. 필자가 "한국의 경제성장은 (경제관료들에 의해)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부패한 모든 국가가 경제성장에 성공하는건 아니지 않나? 개발시대 한국의 부패 정도가 심했음에도 경제성장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1. 부패corruption는 국가경제정책과 자원배분에 관한 투쟁 이었다.

(Corruption may indeed consist of struggles over the distribution of state policy and goods rather than struggles over the absolute level.) (26)


- 개발시대, 금융자본을 움켜쥐고 있던 Financial Repression 국가권력이 "한국의 자원배분"을 결정했다. 국가와 기업간에 나타난 부패corruption은 이러한 "자원배분 distribution of state policy and goods"을 쟁취하기 위한 "기업들의 투쟁" 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사욕챙기기"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2. (뇌물을 통해) 국가의 자원을 쟁취하고 기업들이 사적인 이익을 향유했던 것은 공공재의 생산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Access to the private benefits of state resources was often contingent upon production of public goods.) (26)


한국의 재벌들은 뇌물을 통해 국가자원을 배분받거나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회인프라 건설, 고용창출 등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공공재public goods 를 생산해 냈다" 라는 말이다.



  1.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실례지만 경제학자로 일하고 계신가요? 네이버블로그로 스크랩하고싶은데 다음과 네이버는 연동되어있지 않은 것 같군요.
    • 2014.03.30 20:18 신고 [Edit/De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재 경제학 전공하고 있는 3학년 학부생 일뿐입니다. 스크랩기능은 연동이 안되니, 우클릭 복사하면 될 거 같네요.
  2. 이야. 모처럼 제대로 된 글을 읽었습니다. 3학년 학부생이라기에는 글의 논리력, 구조,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박사 논문을 읽는 듯 합니다. 글을 저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써야 하는데......학계로 나가도 될 정도로 좋은 내용의 좋은 글이네요
  3. HL
    여기 이런 내용도 있었군요. 잘 봤습니다. 경제학과 신데, 경제에 대한 정치학논문도 읽으시니 신선하네요. 이런 쪽에 대해 공부하는 정치학 박사생들은 The Politics of Economic Adjustment (Stephan Haggard, 1992)을 필수로 꼽더군요. 저도 경제학 박사과정 공부하느라, 경제학 공부나 수학공부같은 것들이 널널한게 아니라(혹은 제 역량이 모자라),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아 저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혹시 관심있으시면 추천드립니다.
    • 2015.12.01 23:21 신고 [Edit/Del]
      오 추천 감사합니다 ㅎㅎ
      사실 이 글이 오래전에 쓴 글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오~래전 글들은.. 비공개로 돌린것도 많거든요 ㅎ
      추천해주신 책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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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귀족과 한국의 재벌 - 상속 문제중세 유럽 귀족과 한국의 재벌 - 상속 문제

Posted at 2012.06.22 21:00 | Posted in 경제학/일반


한국의 재벌 체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가장 잘 묘사한 글


"중세 유럽 귀족의 가장 골치 아픈 숙제는 상속이었다. 핵심 자산인 땅을 아들들에게 나눠 상속하면, 그 집안은 몇 대 못 가 망한다. 아들 수대로 쪼개 줬다가는 일단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고, 몇 대 못 가서 자연소멸하거나 옆 동네 귀족에게 먹히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나온게 장자상속제다. 둘째부터는 수도원도 보내고 유랑도 시키고 그랬다. '성전'의 탈을 쓴 십자군전쟁도 실상은 과잉생산된 귀족 잉여들의 해외 취업 인턴십이었다.

가문 자산은 보존해야겠고 둘째도 먹여는 살려야겠고, 이럴 때 우선 손쉬운 옵션이 농노 쥐어짜기다. 코스트리덕션(단가인하)은 양반이고 교회와 법의 권위를 끌어오는가 하면 아예 사기에 갈취까지, 온갖 노하우를 동원해 둘째 아래로 가외 수입을 만들어준다. 요즘 말로 하면 하청회사를 쥐어짜 둘째 아들 앞으로 자회사를 하나 차려준 셈이다.

농노가 쥐어짤 게 많을리 없다. 곧 한계가 온다. 그때는 옆 동네 귀족과 한판 붙는 게 마지막 옵션이다. 과잉생산된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고조되고 지배체제에 균열이 온다. 이 틈으로 농민봉기가 터진다. 때마침 흑사병이라도 돌면 일손이 줄어들어 농노가 귀족에게 큰소리치는 세상도 잠깐 온다. 지배층은 공멸한다.

한국 재벌이 3세 경영 시대로 접어든다. '한몫' 챙겨줘야 할 아들과 딸이 대를 거듭하며 몇 배로 늘어났다. 가문의 장손이 자동차니 전차니 본업을 잇는 것도 수상하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둘째들과 딸들이 자꾸 카레집을 차리고 빵을 판다. 먹는 장사가 막다른 골목인 영세 자영업자는 어른거리는 재벌의 그림자에 비명을 지른다. 농노 쥐어짜기 단계다. 뼛속까지 '기업 프렌들리'라던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기업을 비판하고 나섰다. 말 다 했다.

좀 더 진도가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역사는 몇 번이고 답을 말했다. 우리 시대의 귀족들에게 배우려는 마음이 있을지는 별개 문제다."

-천관율. "재벌 3세 경영 또 다른 중세". <시사인>229호. 2012.02.04. 79쪽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이 기사 때문.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39052.html
"삼성 현대차 딸들 이번엔 중소 광고시장 싹쓸이". <한겨레>. 2012.06.22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녀 정성이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 이서현이 "별도의" 광고회사를 만들어 중소 광고 시장에 진출했다는 기사. 그저 "재벌의 사업 확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사회의 큰 문제인 "대기업 독과점"의 본질이 "상속을 위한 사업 확장"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의 지분구조와 재벌3세의 소유지분을 탐구할 정도로 잉여력이 넘치지는 않아서;;; 
그저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보통 한국의 범3대 재벌을 꼽으라면 삼성, 현대, LG를 이야기한다.

이때 

범삼성은 삼성그룹+한솔+CJ+신세계로 구성되고 

범현대는 현대그룹+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그룹+현대산업개발+현대백화점 

범LG는 LG+GS+LS.


이렇게 그룹이 나눠진 계기는 역시나 "상속 문제"인데.

이병철이 세운 삼성은 장남 이맹희의 CJ, 장녀 이인희의 한솔, 삼남 이건희의 삼성그룹, 오녀 이명희의 신세계 등으로 분화되었다.

마찬가지로 정주영이 세운 현대도 차남 정몽구의 현대차그룹, 삼남 정몽근의 현대백화점그룹,오남 故 정몽헌의 현대그룹, 육남 정몽준의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나뉘어졌다.

범LG의 경우 구씨와 허씨의 동업으로 시작하여 LG와 GS로 분화하여서 현대나 삼성과는 다른 것 같지만..

LG그룹은 구인회 → 장남 구자경 → 손자 구본무로 이어지고 있고, LS그룹은 구인회의 조카 구자홍이 회장. GS그룹은 허준구 → 장남 허창수로 이어지고 있다.

즉, 한국의 재벌은 '2세 상속'을 통해 분화해왔다.

이제 재벌 3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앞서 이야기한 "가문 자산은 보존해야겠고 둘째도 먹여는 살려야겠고, 이럴 때 우선 손쉬운 옵션이 농노 쥐어짜기다" 단계가 시작된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1325.html
"떡볶이까지 먹어치운 지네발". <한겨레21> 897호. 2012.02.13

이 기사를 보면 재벌들의 중소기업 진출 현황이 아주 잘 나와있는데... 

"전국적인 현상이다. 해마다 문을 닫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외식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5만 개 이상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폐업 식당 수는 2009년 2만9천여 개에서 2010년 4만7천여 개로 크게 늘었다. (...)

반면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은 무서운 속도로 외식시장에 침투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와 중소기업연구원 등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삼성, LG, SK 등 대기업은 물론 삼천리, 귀뚜라미, 대성 등 중견기업들도 외식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여기에 나와있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병철 → 삼남 이건희 →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3세)

이병철 → 장남 이맹희 → 장남 이재현 CJ 회장 (3세)

이병철 → 오녀 이명희 → 장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3세)

정주영 → 정몽구 → 장녀 정성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고문 (3세) 

구인회 → 삼남 구자승 → 장남 구본걸 LG패션 회장 (3세)

최태원 SK 그룹 회장 → 동생 최재원 SK 부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 장녀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 → 차녀 장성윤 블리스 대표 (3세)

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이부진, 정유경, 정성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장자(長子)"가 아니라는 것.

이부진 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정유경 위에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성이 위에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또한 장성윤과 구본걸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장자가 아니었다. 
롯데의 적통은 신격호 → 신동빈으로 이어지고 LG의 적통은 구인회 → 구자경 → 구본무로 이어진다.

즉 다시 말해, 정말 "가문 자산은 보존해야겠고 둘째도 먹여는 살려야겠고" 를 위해 재벌이 중소업종에 진출하는 것이다.

이와중에 범 4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더 가속화 되고 있는데, 김상조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범)4대 재벌 전체를 보면, 특히 2001∼2006년간 (범)4대 재벌 소속 계열사의 수(53개사→64개사)와 자산 점유 비중(34.1%→54.0%)이 크게 확대되어,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이 오히려 이들 (범)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상조. 2009. "1986-2006년간 한국의 200대 기업의 동태적 변화". 한국금융연구원 Vol.15. 21쪽


라고 한다.

이 논문의 부록인 "범8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추이"(49쪽)를 보면 (범삼성, 범현대, 범LG, SK + 롯데, 범한진, 한화, 두산)

GDP 대비 범4대 재벌 자산 비중은 50%, 범8대 재벌 자산 비중은 60%이다.
GDP 대비 범4대 재벌 매출액 비중은 50%, 범8대 재벌 매출액 비중은 60%,
GDP 대비 범4대 재벌 투자 점유 비중은 33% 범8대 재벌 투자 점유 비중은 37% 

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범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더더욱 가속화 되고 있고
장자가 아닌 자녀들에게 기업을 상속해주기 위하여
중소업종으로의 진출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

이와중에 개인이 운영하는 5인 미만의 사업체, 즉 간단히 말해 "자영업"은 죽어나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


ps


장하준은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재벌이 사회적 기여를 하게 하자'"라고 말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타협을 할것인가? 삼성이나 현대가 타협에 응할지도 미지수고!

그리고 누구와 타협을 할 것인가? 이건희와 이재용? 그렇다면 이부진과 이서현은? 현재 재벌의 독과점 현상 심화와 경영권 승계 문제는 '장자 이외의 자녀들의 생계(?)'가 걸린 것인데 어떻게 타협을 이룰 것이며, 타협을 이룬다고 재벌문제가 사라질까?


그리고 진보진영의 '재벌해체론'. 재벌은 '상속'을 통해 분화, 해체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가 현대자동차, 중공업. 삼성이 삼성, CJ, 신세계 등으로 분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창업자→2세→3세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해체'되고 있다. 

그런데 재벌이 이렇게 분화된다고 문제가 사라지나?


현재 삼성그룹 후계와 관련하여, 삼성전자는 이재용, 삼성물산 및 신라호텔은 이부진, 제일모직은 이서현으로 3분등 된다는 루머도 있는데. 재벌이 이렇게 분화된다고 '독과점 문제'가 사라지나? 삼성전자는 전자 분야에서 여전히 독과점일테고, 삼성물산그룹은 그 분야에서, 또 제일모직은 그 분야에서 독과점일텐데?


요근래 들어 장하성 김상조가 했던 '소액주주운동'이 '금융자본주의'의 모델이고 '외국투기자본을 불러들였다'라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장하준이 이렇게 비판을 하고 있지)

이들이 한국에서 재벌을 상대로 소액주주운동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이 있었다. 한국 재벌의 이런 현실속에서는 총수일가와 기업을 분리하는 것이 재벌개혁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며, 따라서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총수일가를 견제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


장하준은 개발독재시대처럼 '국가'가 강력히 재벌을 통제했어야 하는데, 장하성 김상조 등의 세력이 '경제자유화'를 외치면서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었다고 비판하는데....

200조를 굴리는 삼성전자를 (1년 예산이 300조인) 한국 정부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정치권력이 강했던 개발독재시대도 아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 말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시대인데?

장하준 측은 "경제자유화 때문에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이다. 선후관계 뒤집지 말라" 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국가가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진 사례가 있었나???


그리고 '국가가 경제를 통제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날까? 장하준은 제도주의 경제학자로서, '시장도 제도 중의 하나'로 바라보고 국가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시장주의자'-시장근본주의자가 아니라-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이건 정말 경제학을 공부하면 당연한거다.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자세히... (그렇다고 장하준이 시장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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